사이버 멘토링에 참여하는 멘토의 역할은 온라인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후원 사이버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정용실 아나운서와 맺어진 4명의 멘티들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아나운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대표 멘토’ 정용실 아나운서의 자세
지난 9월 12일 오전 11시 KBS 본관 시청자 광장.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20대 초반의 여성 4명이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노트와 서류가 펼쳐져 있다. 펜을 들고 뭔가를 준비하는 모습도 보인다. 테이블 위에 있는 원고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시선은 사뭇 진지하다.
약속 시간 11시. 정용실 아나운서가 바쁜 걸음으로 걸어와 인사를 건넨다.
“항상 ‘멘토’가 되어야겠다는 의무감이 있었어요.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할 당시에는 여자 선배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87학번이 졸업할 당시에는 여성들이 막 사회로 진출하려는 시기였죠. 여성의 사회 진출 욕구는 높았지만 사회는 아직 받아줄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정용실씨가 대표 멘토가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 가을 연세대학교 경력개발센터 특강에서 만난 후배 여학생들의 분위기가 계기가 됐다.
“저는 여학생들이 아주 저돌적이고, 전투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젊으니까요. 우리 세대와는 다른 뭔가를 기대했죠. 여학생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구요. 그런데 의외로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특강에 참여한 여학생들에게서 희망보다는 답답한 안개 속을 걷는 듯한 암담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안개를 걷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환한 세상이 아직 안 보이는 모양이지? 그럼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며 연세대학교의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던 차에 지난 4월, 여가부에서 정용실 아나운서를 대표 멘토로 지정했다.
“사실 얼마나 확실한 대답을 줄 수 있을지 저도 확신이 없어요(웃음). 힘든 산행을 해야 하는데, 저도 이제 산 중턱에 와 있으니까요. 밧줄 잡고 혼자 올라가기도 벅차죠. 누가 나를 잡아주는 것도 아니고.”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전히 어렵다. 진출 문턱은 낮아졌지만 성장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정용실씨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다른 장르에 있는 여성들과도,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후배들과도 ‘같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됐다.
“자식도 마찬가지지만,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도 큰 욕심을 내지는 않아요. 원하는 만큼 자식이 따라 오리라고 기대를 가지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있는 그대로를 보고 변별하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끌고 갈 수만은 없어요.”
정용실 아나운서는 멘티들에게 “아나운서만을 유일한 목표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아나운서를 꿈꾸고 있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속 깊은 조언이다.
“멘티들을 아나운서 시험에 꼭 붙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은 자기 주도적이 돼야죠.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지금 단계에 제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한 만남일 뿐입니다.”
4명의 멘티들은 정용실 멘토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잽싸게 받아 적었다. 앳된 글씨로 꾹꾹 눌러 적으며 선배를 바라보는 멘티들의 눈빛이 명민하게 빛났다.
정용실 아나운서의 엄격한 레슨
그는 냉정한 선배다. ‘칭찬만 받아서는 발전할 수 없다. 아픔을 느끼고 피를 흘려봐야 스스로 단점을 고쳐나갈 수 있다’며 거침없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죠. 손등을 맞아가면서 혹독하게 연습을 시킵니다. 제가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렇게 배우지 않으면 자꾸 몸과 마음이 편한 대로 습관이 굳어집니다. 기본기를 제대로 닦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격해야 해요.”
윤희진 멘티의 질문지를 본 정용실 아나운서는 대답도 하기 전에 꾸짖기 시작한다.
“이런 사소한 기술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 이건 질문을 위한 질문이지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야. 내가 지난 한 달 내내 지적했던 부분을 그대로 가지고 왔네. 1번, 2번…나머지 질문들도 마찬가지야.”
지난달 만남에서 이미 ‘원고를 완전히 이해하고 몰입한 후의 리딩’을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인데, ‘어떻게 전달할까’만 고민하고 있다고 따끔하게 혼냈다.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어. 내 비위 맞추려는 질문은 하지 마. 질문을 가지고 오라니까 가져 오긴 했는데, 이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잖아.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얘기지. 진실한 질문을 하세요.”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흔히 원고를 전달하는 ‘기술’에 집착하기 쉽다. 이날 가장 혹독한 지적을 받은 것도 그런 점이었다. ‘기술’에 집착하면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정용실 아나운서의 조언이다.
“원고의 내용과 감정에 완전히 몰입해야 해.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잘 알 수 있겠어?’ 그런 마음으로 몰아지경이 돼야지. 아무것도 신경 쓰면 안 돼. 집중하고 시청자와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목소리가 어디서 나왔는지, 소리는 예쁘게 나는지, 화장은 잘 먹었는지, 입 모양이 어떤지 신경 쓰고 있으면 내용 전달이 안 돼.”
아나운서 지망생들의 발음은 ‘지나치게’ 정확하다.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기본’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정용실씨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반제품 조립 형태로 / 라노스와 / 젠트라를 생산해왔습니다’라는 문장은 어디에서 쉬어 읽어야 할까요?” - 멘티 윤희진
“원칙을 정하지 마. 원칙을 고수하면 자연스러움이 묻혀요. ‘와’라는 연결 접미사가 중요한 것을 연결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연결할 때도 있죠. 그럴 때는 슬쩍 읽으면 돼. 의미가 없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 그런 원칙을 세우면 안 돼.”
“목소리 예쁘게 내려고 의식하지 마세요. 얼굴도 생긴 대로, 목소리도 생긴 대로 사는 거예요.”
정용실씨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방송에서 접하던 차분한 모습과는 달랐다.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멘티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집어내고 혹독하게 다그쳤다.
아나운서는 대화의 전문가다. 진짜 대화는 서로에게 ‘홀랑’ 빠져서 ‘당신과 나’, 둘만 섬처럼 있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서 감정의 물결이 오고가는 것을 느껴야 한다. 정용실씨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대화의 기본’이다. 카메라가 앞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방송에서 너처럼 진행하면, 시청자들이 몰입을 못해. 뉴스도 마찬가지. 뉴스에 빠져 들어서 해야지. 한 번을 나와도 가슴에 꽂아줘야 해. 그렇게 하면 백 번 나올 필요가 없지. 한 번을 나와도 제대로. 그건 아주 미묘한 차이야. 스스로 깨달아야지.”
한 마디라도 더 듣고, 한 번 더 지적받고 싶은 멘티들은 적극적으로 질문했고, 정용실씨는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속도로 그들을 가르쳤다. 수업은 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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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멘토링]정용실 아나운서와 예비 아나운서의 수업 참관기
수업이 끝나고, 멘티들에게 물었다. 정용실 아나운서를 만나고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말이다.
“크게 두 가지요. 신념이 확고해졌어요. 선배님을 롤 모델로 삼게 됐고, 아나운서가 되고자 하는 내 신념이 맞다는 확신이 섰죠. 두 번째는 스터디나 학원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단점을 거침없이 말해주신다는 점이에요.” - 멘티 윤희진
윤희진씨는 ‘눈에 생기가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항상 명랑하고 쾌활하다는 얘기를 듣는 그로서는 의외의 지적이었다. 집에 가서 원고를 읽는 장면을 캠코더로 촬영해봤다. 원고를 읽는 표정에, 긴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건 주관이 없어서 그래. 주변의 말에 너무 쉽게 귀를 기울이지 마세요. 그건 타당성을 따지지 않고 의심하는 거지 신뢰가 아니야. 걔들이 뭘 알아? 욕심을 버려요. 그래야 정신이 맑아지면서 마음이 열려. 주관이 없으면 인생이 불쌍해져(웃음).”- 정용실 아나운서
정지원씨는 아나운서로서의 조언은 물론이고 ‘삶의 자세’에 대한 진중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기술적인 부분은 연습을 통해 하나하나 쌓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훈련’만으로는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 이제 친구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나서, 어떤 노력을 하면 성장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저는 아나운서가 ‘항상 배우는 사람’이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여성으로서 결혼과 출산, 육아를 병행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배우고 있습니다.” - 멘티 최지민
이하나씨는 정용실 아나운서와의 멘토링이 ‘틀’을 깨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지망생들끼리 스터디를 하면 학원에서 가르쳐주는 틀에 얽매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멘토링을 통해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자유로운 자신감’을 얻었다.
‘언론고시’를 통과해 기자나 PD가 되는 길은 매우 좁다. 아나운서는 더하다. 매년 각 방송사의 합격자들은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다. 수천 명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열심이다. ‘누구는 눈을 고쳤대’, ‘누구는 얼마짜리 프로필 사진을 찍었대’ 준비과정부터 말이 많다.
아나운서가 되는 길을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기술’에 집착한다. 기술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본질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정용실 아나운서의 조언은 ‘기술’보다는 ‘기본’을 강조한다. 냉정하지만 사려 깊은 ‘선배’의 조언은 멘티들의 인생 전반을 아우른다.
“제가 원래 직선적인 성격이에요. 어릴 때부터 말이 많고 ‘나대는 애’로 유명했죠. 예의 차리면서 에둘러 말하지 않아요. 아나운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길이 될 수 있는 직업이죠. 내 공부가 되니까요(웃음).”
멘티와의 밀도 깊은 만남을 마치고 다시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정용실 아나운서의 발걸음은 처음 들어설 때처럼 바빴다. 방송국을 나서는 멘티들의 얼굴은 뿌듯했다. 그리고 각각 스터디를 하러, 수업을 들으러, 친구를 만나러 갈 길을 재촉했다.
■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사이버 멘토링이란 온라인상에서 여성들이 삶의 지혜와 용기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만남의 시스템을 지칭한다.
●멘토란 멘토링 관계에서 역할 모델, 상담자, 교사, 후원자 역할을 하는 선배.
●멘티란 멘토로부터 다양한 조언을 듣고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대화자.
●참여방법
위민넷(www.women-net.net) 홈페이지를 방문해 사이버 멘토링 회원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면 내용을 기준으로 멘토와 멘티를 선정해 매칭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