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5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아주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타이틀은 ‘원로 성악가 소프라노 황영금과 함께하는 예술 가곡과 중창의 밤’. 올해 77세로 희수(喜壽)를 맞이한 황영금씨는 90분 남짓 13곡을 부르며 전성기 못지않은 무대를 선사했다. 그는 더 이상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지지 않는 성가대원이라해도 80세까지 계속 노래하겠다는 ‘영원한 소프라노’다.
1962년 데뷔, ‘가면무도회’ 한국 초연 등 1960~1980년대 한국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던 소프라노 황영금씨가 아주 특별한 공연을 했다. 국립오페라단 창단 멤버인 그가 1990년대 중반 은퇴한 이후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요청으로 15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너무 오래간만에 무대에 섰어요. 그동안 교회에서 노래한 게 전부라서 많이 부담되고 긴장됐어요.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더 그랬지요. 나이도 많은 제가 13곡이나 불렀으니 당연히 힘들었죠.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 연습하는 것도 즐거웠고 함께 공연하는 뿌듯함이 컸어요.”
염색도 하지 않는다는 백발의 이 원로 성악가는 무대를 채운 제자들, 관객석까지 꽉 들어찬 까마득한 후배들 때문에 결국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공연 말미에 이제는 중견 성악가가 된 제자 35명과 그들의 제자인 대학생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와 ‘스승의 은혜’를 불러줬다.
“그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노래’를 2절까지 불렀어요. 관중석을 안 보고 뒤돌아서서 숙연하게 들었어요. 순간 감사와 온갖 감회가 머리를 스치면서 눈물이 났어요. 나중에 들으니 그때 감격해서 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황씨는 뛰어난 프리마돈나이기에 앞서 훌륭한 스승이었다. 44년 동안 연세대학교 성악과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끼던 제자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이름을 꼽을 수는 없지만 소프라노 김주연, 배기남, 송윤재, 이은주, 이현주, 메조소프라노 장현주, 테너 김홍태, 바리톤 윤영덕, 베이스 임철민 등이 함께 무대에서 노래했다. 70세까지 강단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이제는 한국 성악계의 대들보가 되어 든든하기 그지없단다.
황씨는 더 이상 오페라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도 없지만 이제는 ‘성가대 솔리스트’라는 소박한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에서 귀국한 1959년부터 시작한 봉사가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집에서 가까웠던 경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게 1959년이었어요. 당시 음악도 없고 성가대도 없고 그래서 독창을 하겠다고 자원했어요. 첫 곡으로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를 불렀는데 다행히 금세 성가대가 만들어져서 무거운 짐을 덜었지요. 지금도 일요일마다 솔리스트이자 음악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어요. 외국에 나가거나 아프지 않는 한 거의 빼놓지 않고 섬기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합창단에서 프리마돈나의 꿈 시작, 가족 지원으로 결실
황씨가 처음부터 굉장히 뛰어난 노래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청진여고 시절 합창단 시험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 외롭던 어린 시절 노래하면서 자신감을 찾았고, 합창단에 떨어뜨렸던 선생님이 나중엔 황씨에게 독창을 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음악 공부에 대한 열정만으로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서울대 음대 재학 시절 일본에 있던 친구의 간곡한 부탁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무렵에 친구 가족들을 데리고 일본에 갔어요. 성악 공부가 무척 하고 싶었거든요. 물론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일주일 동안 단식한 끝에 결국 일본행 배에 올랐죠. 수교도 안 된 시기라 학비를 부쳐줄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장학금을 받았지만 굉장히 고생하면서 공부했어요.”
1958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황씨의 노래를 들은 연세대학교 관계자의 제의로 1959년부터 연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지금껏 성악가와 교수로 일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는 가족들의 공이 컸다고.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둔 황씨는 딸 둘을 음악 종사자로 길러냈다. 첫째 딸 소영씨는 한국의 첫 오페라 연출가로도 유명하다. 독일에서 음악기획사를 운영하는 셋째는 이번 공연에도 함께 참여했다고. 한마디로 ‘음악 가족’이다.
“소영이가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연출을 공부했어요. 지금은 국내 첫 오페라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지요. 성악을 공부한 셋째는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매년 현지 가수들을 데려와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열어요. 제가 원해서 음악을 한 건 아니고 애들이 좋아했죠. 아이들 덕분에 지금까지 음악을 더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MBC 개국공신인 남편 이수홍씨와는 중매로 결혼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산 덕에 아이들 돌볼 걱정은 덜었고,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원 때문에 지금껏 ‘프리마돈나 황영금’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공연도 교직도 은퇴했으니 가정에 조금 더 충실하려 한다. 일요일마다 남편과 함께 교회를 나가는 평범한 즐거움도 누려야겠지만, 음악을 삶에서 끊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번 디바는 영원한 디바니까.
“80세까진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할 겁니다. 여러분이 이번 공연을 좋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런데 제 힘만이 아니고 신의 도움으로 해낸 거예요. 남은 생애에도 힘닿는 데까지 음악을 보급하는 일에 힘쓸 겁니다. 2년에 한 번씩 제자들이 제 이름을 걸고 공연하도록 독려할 거구요.”
■글 / 위성은(객원 기자) ■사진 / 이명헌(Pien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