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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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팔도의 맛과 멋 그리고 이야기까지 담았습니다”


큰 행사에는 으레 그 행사를 빛내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도 답례 만찬으로 등장한 ‘팔도 대장금 요리’가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팔도의 ‘이야기’를 요리 재료로 사용했다는 이춘식 조리팀장으로부터 정상회담 만찬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맛깔스럽게 풀어낸 만찬장 풍경이 주요리라면, 더불어 들은 그의 요리 인생은 주요리를 빛내는 깔끔한 후식으로 손색이 없었다.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팔도 대장금 요리’ 제작의 주역을 만나러 간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 지하 2층. 분주히 오가는 조리실 직원들 사이를 스치며 몇 굽이 통로를 돌아 조리팀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에서 큰 실내창 너머로 호텔의 낯선 조리장 풍경을 구경하는 사이 서글서글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은 한 남자가 문을 열며 인사했다. 그가 바로 남북정상회담 답례 만찬을 지휘한 이춘식(46) 조리팀장. 이 팀장은 ‘팔도 대장금 요리’의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요리
그는 “요리의 테마가 잘 잡힌 것 같다”며 요리 이야기의 운을 뗐다.
“처음에는 ‘팔도 궁중요리’로 이름을 지으려 했어요. 그런데 청와대 쪽에서‘대장금’을 쓸 것을 제안했어요. 사실 우리가 발굴한 팔도 요리에는 궁중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도 포함돼 있었어요. 김정일 위원장이 드라마 ‘대장금’을 좋아한다는 점이나, 궁중요리와 서민요리를 아우를 수 있다는 점으로 볼 때 ‘팔도 대장금 요리’가 테마로 아주 적합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팔도 대장금 요리’를 궁중요리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설명이다. 보통, 남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점 때문에 당연히 고급스런 궁중요리가 제공됐을 거라 예상하지만, 이 팀장이 선택한 요리의 진짜 초점은 ‘궁중요리’라기보다 ‘팔도의 이야기’였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한 요리는 좌중의 대화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법. 그래서 이 팀장은 만찬장에 참석하는 인사가 대부분 남성인 점을 염두에 두고 복분자주를 바른 풍천 장어구이를 준비했다. 장어구이가 테이블에 오르자 자연스레 ‘요강 뒤집는’ 이야기로 이어졌고 남북 인사들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연출됐다고 한다.

“복분자까지 한 잔 하고, 거기에 복분자를 바른 풍천 장어까지. 이거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요? 긴장된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좋은 소재였죠.”

이뿐 아니라, 이 팀장은 제주 흑돼지를 이용한 맥적과 김치 누름적으로는 서민들의 애환을 이야기하려 했고, 가을과 잘 맞는 봉평 메밀쌈을 통해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이야기하고 싶었단다.

만찬장 요리 이야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남북 인사들에게 영덕 게살 죽순채와 봉평 메밀쌈에 들어간 소스가 무엇인지 맞춰보도록 한 일이다. 바로 MBC-TV 드라마 ‘대장금’의 궁녀 회식 장면에서 궁녀들에게 냉채의 재료로 무엇이 들어갔는지 물었을 때, 어린 장금이가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사온데…” 했던 장면을 차용한 것이다. 홍시 소스 하나로 남북 인사들이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할 소재를 만든 격이다.


답례 만찬 준비, 그 긴장의 연속
이 팀장이 팔도 각지에서 직접 공수해온 신선한 재료로 만찬 당일 직접 요리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요리사가 조리 장소에서 신선한 재료로 직접 요리한다는 점이 뭐가 대단한가 싶겠지만 사정을 알고 보면 이번엔 그야말로 경우가 다르다. 조리 장소가 평양이다 보니 남측에서 재료를 준비한 후, 회담 이튿날인 만찬 당일까지 요리 재료가 조리 전 상태로 있어야 했던 시간이 3일이었던 것. 그야말로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제가 그동안 몇 번 정도 큰 만찬을 치렀나 헤아려 보니, 총리급 이상의 인사를 대상으로 한 만찬이 18차례 이상 되더군요. 그런데 다른 만찬과 달리 가장 고민이 됐던 점은 남측에서 준비한 요리 재료를 조리 전 상태로 신선도를 유지하며 3일이나 보관해야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요리 준비 과정 하나하나에 타이밍이 생명이었음이 쉽게 짐작된다. 그 덕에 그는 하마터면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만찬 직전까지 요리 타이밍이 맞지 않아 준비가 다 되지 않았던 것이다.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답례 만찬 준비는 당일 아침 9시부터 시작됐다. 그런데 점심 무렵 북측 조리팀이 ‘옥류관’에서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고, 평양냉면의 맛도 궁금했던 이 팀장은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그런데 옥류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날 옥류관에는 대통령 내외가 참석하는 오찬이 계획되어 있던 지라 대통령 내외가 이동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어 2시간 동안이나 옥류관에 발이 묶였던 것이다. “육즙이 빠질까 봐 갈비도 양념에 재우지 않고 썰기만 해서 가져갔다”는 이 팀장. 적절한 요리 타이밍을 놓칠까 봐 그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게다가 아무리 남북의 베테랑 조리사들이 모였다 해도 엄연히 남과 북의 언어나 문화가 다른 현실이고 보니 일의 진척이 쉽지 않았다. 결국,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덧 시간은 저녁 8시 30분에 다다랐다. 만찬은 9시 시작이었다.

그런데 일이 되려고 그랬던 걸까. 때마침 회담 시간이 길어져 답례 만찬이 1시간 뒤로 늦춰졌고, 이 팀장은 가까스로 준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와, 정말 마음이 다급했죠. 제가 기독교인이라 그때 기도를 했어요. 10분 만에 기도 응답이 왔어요. 만찬이 10시로 연기된 거예요. 그때 진짜 땀 많이 흘렸죠.”


내 팔 내가 흔들며 산다?
이처럼 출발 전에 조리를 일체 하지 않고 음식 재료만 준비해 현지에서 직접 요리한 것은 1차 남북정상회담과 분명히 대조되는 면이다.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대부분의 요리를 미리 조리해뒀다가 만찬 당일 데워서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팀장에게는 팔도에서 모은 식재료를 현장에서 직접 조리해 더 맛있고 멋들어진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팀원들이 ‘거봐라, 미리 조리해서 가져오자고 했잖느냐’는 이야기도 했지요. 하지만 퀄리티를 포기할 순 없었어요. 요리를 쉽게 할 수도 있지만, 음식 맛을 원하는 대로 나오게 하려면 하나하나 할 일이 참 많아요. 아마 팀원들이 성질 깐깐한 팀장 만나 고생 좀 했을 겁니다.(웃음)”

사실 만찬 당일 숨 가빴던 상황은 이 팀장이 ‘사서 고생한’ 일일 수도 있다. 너무 깐깐하게 요리의 질을 따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속 타는 일을 겪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는 한 선배가 좋아했던 표현이라며 자신의 소신대로 하는 성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 팔 내가 흔들지 못하는 일은 못 하죠. 남이 내 팔을 붙잡아서 흔드는 거 같다면 일의 즐거움이 없잖아요. 나중에 보람도 찾을 수 없고.”

그러나 다른 사람이 납득할 수 없는 소신을 그저 밀어붙이기만 한 것이라면 팔도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조화시킨 ‘팔도 대장금 요리’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조리 장소를 미리 방문해보지 못한 팀원들을 위해 1차 답사 때 조리장을 비디오로 모두 촬영해왔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조리장의 특성과 장소에 따른 예상 진행 내용을 꼼꼼하게 설명했다.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팔도의 맛과 이야기로 정상회담을 요리한 이춘식 조리팀장

“비디오 덕분인지 팀원들이 처음 조리 장소에 가서도 ‘아, 여기네’ 하며 익숙해하더군요. 이야기 안 해도 다 자기 일 할 자릴 알아서 찾아갔지요.”


아버지의 입맛과 어머니의 요리 솜씨 물려받아
정상회담 답례 만찬을 ‘펑크(?) 낼’ 뻔한 이 팀장의 요리에 대한 소신은 어디에 뿌리를 둔 것일까. 웬만큼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소신이 있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을 터였다. 이 궁금증에 대한 힌트는 “요리를 잘하는 것이 집안 내력인지”를 묻는 것에서 엿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제가 봐도 요리를 참 잘하세요. 그래서 요즘도 시골 내려갈 때면 어머니가 어떤 요리를 해주실까 궁금해 하며 가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입맛도, 손재주도 상당히 까다로우세요. 아버지가 미식가셨으니 어머니가 요리를 잘하셔야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입맛이라는 게 다 부모님 물려받는 거 아니겠어요? 제 딸도 제 입맛을 물려받은 것 같아요.”

그가 가진 요리에 대한 소신은 어찌 보면 집안 내력에 그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의 뛰어난 입맛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그가 요리에 입문하던 시절 그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엔 요리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2대 독자라는 그가 집안의 반대가 뻔히 예상되는 직업을 선택한 계기는 무엇일까?

“사실 제가 2대 독자다 보니 집안 어른들께서 저를 너무 아끼셔서 잘 혼내지도 않으셨어요. ‘내 팔 내가 흔들며’ 살았던 거죠. 하지만 내심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집에서 도망 나와 ‘품안의 자식’ 생활을 끝내고 싶었어요.”

청소년기의 이 팀장은 집안 어른들의 두둔을 등에 업고 동네에 소란을 일으키는 소문난 악동이었다 한다. 그러던 그가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 자신의 길을 찾았다. 상고 3학년 당시 서울 남대문 쪽에 있던 도쿄호텔로 실습을 나갔다가 한 일본인 요리사의 눈에 들어 졸업 후 주방에서 그릇 닦는 일과 레시피를 타이핑하는 일을 하게 됐던 것. 그렇게 시작된 외길 요리 인생이 벌써 30년 경력을 바라보고 있다.

소신과 관록 그리고 팀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남북정상회담 만찬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춘식 팀장.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뒤에는 장인의 날카로운 눈매와 섬세한 손놀림이 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팔도 대장금 요리’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절도 있고, 다양하면서도 조화를 해치지 않게 팔도의 말과 멋, 그리고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요리를 만든 이 팀장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요리에 대한 평가보다는 요리 자체가 즐거운 장인이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답례 만찬 메뉴는 무엇이었나


남북화합을 위한 염원을 담아 전국 팔도에서 공수한 신선한 재료로 마련한 ‘팔도 대장금 상차림’의 코스 요리는 총 9가지로 구성됐다. 그중 메인 요리를 비빔밥으로 정한 것은 남북이 한데 섞여 화합하자는 뜻이었고, 후식으로 준비한 버선발 모양의 매작과는 손님이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갑게 맞이하던 조상들의 전통을 살린 것이라 한다. 쉐라톤그랜드워커힐 한식당 온달에서는 10월 10일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답례 만찬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가격은 20만원(세금 봉사료 포함).


1. 영덕게살 죽순채와 봉평메밀쌈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강원도 봉평의 메밀로 쌈을 만들고 영덕 대게의 살과 죽순으로 냉채를 만들어 감잎 위에 올려 냈다.
2. 흑임자죽
충주산 흑임자(검은깨)와 이천쌀을 곱게 갈아 만든 건강식품.
3. 완도전복과 단호박찜
완도 앞바다에서 자연산 다시마와 미역을 먹고 자라 살이 도톰하고 쫄깃한 완도산 전복의 깊은 맛이 일품이라고.
4. 제주흑돼지 맥적과 누름적
외국의 개량종에 비해 몸집이 작으나 고기질이 좋은 제주흑돼지로 ‘대장금’에서 정 상궁이 임금께 첫 수라를 올릴 때 만든 맥적을 만들었다. 돼지고기의 누린맛을 제거하기 위해 된장양념과 홍시 소스를 사용했다.
5. 고창 풍천 장어구이
육질이 뛰어나 맛이 담백하고 구수해 으뜸으로 치는 고창 풍천장어에 고창의 또 다른 명물인 복분자즙을 발라 구워 냈다.
6. 횡성 평창 너비아니 구이와 자연송이
청정 지역 강원도 횡성 평창에서 기른 한우의 안심을 배즙 양념에 재워 굽고 흑미와 수삼소스를 곁들여 담백한 맛을 더했다. 여기에 최고의 궁합은 오대산에서 채취한 자연송이.
7. 전주비빔밥과 토란국
평양의 냉면, 개성의 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꼽혔던 전주비빔밥. 이천쌀에 가을햇밤과 대추를 넣어 만든 영양밥에 각종 나물 등 재료를 곁들였다.
8. 호박 과편, 삼색 매작과와 계절과일
잔치나 궁중에서 후식으로 이용한 한과의 일종으로 호박을 재료로 꽃 모양의 편을 만들었다. 매화나무에 얹은 참새 모양과 같다고 해 이름 붙여진 매작과와 나주 배, 대구 사과가 준비됐다.
9. 안동 가을 감국(甘菊)차
국화생육에 필요한 토질과 적절한 일교차, 일조량 덕분에 다른 지역에 비해 맛과 향이 뛰어난 안동의 국화차.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유승태(자유기고가) 사진 & 사진 제공 / 원상희·쉐라톤그랜드워커힐서울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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