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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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방문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 긴박하고 가슴 벅찼던 3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현 여성단체협의회장 김화중이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남북정상회담에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 긴박하고 가슴 벅찼던 3일간의 여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처음 남북정상회담 공식 수행원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내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고,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여성단체 대표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그동안 서울대학교 교수로, 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북한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필수적이었기에 북한의 의료는 물론 정치, 경제 상황까지 익숙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면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북한에 관한 정치, 경제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통일부에서 보내준 책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여성단체 사람들을 만나며 의견을 모았다. 여성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했다.


6개월 전과 달라진 평양 시내
나는 그동안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여성단체협의회 회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통일부 통일고문으로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에는 민화협의 양묘사업(묘목을 키우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은 아직도 나무를 떼고 있어 산에 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매해 홍수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평양 여성이나 남성들은 매일 똑같은 의상을 입고 다녔다. 나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북측 관계자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우문이었다. 나도 1960~1970년대에는 교복을 맞춰서 그것만 입곤 했었는데, 그동안 어려웠던 시절을 잠깐 잊은 것이다. 현재 북한의 상황이 학창 시절과 비슷한 걸로 보아 남한의 70년대 초반 수준으로 가늠되었다.

북한은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이 때문에 평양 시내에는 가로등이 없어 밤이 되면 깜깜해진다. 건물들은 칠이 안 된 상태로 초라했다. 평양국제공항은 텅 비어 있다. 비행기라곤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 단 한 대뿐이었다.
그런데도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참 밝았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북한은 빈부 격차가 크지 않으니 어떤 것이 잘사는 건지 잘 모른다. 70년대의 나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평양 시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건물에는 모두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가장 예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놀랍게도 평양 시내 가로수에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조명 장식을 달아놓아 어두웠던 밤거리가 환해졌다.

거리에는 남측 방문단을 환영하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들은 우리를 보기 위해 앞을 다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동원되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머무른 3일 동안 어디서든 우리만 보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그들을 보며 ‘우리는 하나’라는 생각이 피부에 와 닿았다.


앵무새처럼 김일성, 김정일을 이야기하는 북한 주민들
남한 방문단의 안내원들은 모두 사회나 정치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중요한 외국 회의에도 참여하는 사람들로 소위 고위층에 속했다. 차로 이동하면서 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은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가장 성공시킨 나라가 북한이라며 체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덕분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남한이 잘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전혀 부럽지 않다고 했다. 빈부의 격차보다는 차라리 모두 가난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지 돈이 있다고 공부하고 없다고 공부를 못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남한에서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장학금이 주어지고 기초생활보장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북한에서는 하라는 만큼만 일을 한다. 우리는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버니까 생산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는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했다.

분야별 회의에서 남북의 여성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였다. 우리는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영유아 사업과 여성 보호를 의제로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일성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이 이렇게 잘해주셔서…”와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회담이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알았다. 이제 그만하라. 공동선언문에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다. 구체적인 방안을 이야기하자”고 잘라 말했다. 내 이야기에 그들은 “좋다”면서도 통일 이야기와 준비해온 체제 찬양만 계속했다. 우리는 결국 서로 벽만 보고 이야기한 셈이다. 회담이 끝나고 “구체적인 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 그러려고 모인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북측 사람들도 웃었다. 나는 “우리 자주 만나기로 하자. 그렇게 되면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북한에 다녀온 김화중 전 장관

북한 사람들은 아이에서부터 할머니, 지식인 할 것 없이 모두 입만 열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했다. 그것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절절하게 이야기한다. 김일성 대학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김일성, 김정일이 언제 다녀와서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모두 기록해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김일성, 김정일의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한 듯했고, 어쩌다 눈빛이라도 마주치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참 재미있다. 북한에서는 입만 열면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입만 열면 노무현 대통령 비판이다”라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에게 체제 비판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김일성, 김정일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 자신이 그렇게 좋고 행복하다는데 굳이 비판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상대방 체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매순간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정상회담
이번 정상회담은 초반부터 5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서로 얼싸안았던 그때와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과 굳은 얼굴로 악수만 한 것이 이번 환영식의 전부였다. 대통령뿐 아니라 방문단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회담을 위해 가져온 의제들이 많아 부담감이 컸으니 더욱더 긴장됐을 것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만찬에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없었다. 우리는 이번 회담이 잘되지 못한 채 돌아가면 얼마나 야단이 나려나 하는 걱정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둘째 날인 10월 3일 점심 때까지 이어졌다.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날 협의가 잘 안 된다면 저녁 때 ‘아리랑’ 공연도 보지 못할 거라고 했다. 함께 간 재벌 총수들도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전 회담을 마치고 난 노무현 대통령은 굉장히 힘든 얼굴로 “개방, 개혁이 어디서나 좋은 말인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신중하게 써야겠다”고 했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오후 7시가 조금 안 됐을 때였다. 모두 잘 해결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을 그쪽에서 다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놀라운 결과였다.

그때까지 가장 힘든 문제는 상호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북측이 원하는 건 적화통일이고, 우리가 원하는 건 자본주의통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상호체제를 인정하기로 하니, 그 뒤의 모든 문제들은 일사천리로 해결이 됐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합의되고 나자 김정일의 표정도 밝아졌다. 마지막 환송식장에서는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테이블마다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가 답례로 테이블을 돌면서 웃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첫날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남북이 상호 협동해야 하는 이유
정부의 대북사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퍼주기식’이라고 쉽게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직접 북한을 방문하고 오랫동안 북한에 대해 연구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우선 개성공단만 해도 그렇다. 개성공단은 남한과 아주 가까운 군사 요충지다. 그런데 북한은 그곳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그들이 전쟁을 하려고 했다면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개성에 방문해보니 개성공단만 내준 것이 아니라 개성시 전체를 내준 것이었다. 개성시를 우리가 4단계로 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일 북한이 우리에게 강릉시를 내달라고 했다면 주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신의주까지 철도를 놓자고 제안한 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으로 편리하게 나아가려면 북한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철도를 운행할 물량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이다. 물론 미래에는 분명 북한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북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에서 잘 받는다는 봉급이 7만원 정도고, 보통이 5만원 정도다. 북한의 예산은 남한의 국방비보다도 적다. 값싼 노동력 때문에 요즘 북한 시장에 많은 선진국들이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남과 북은 말이 통하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상호협력만 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유리할 것이다.

이번에 협의된 사안 중에 조선회사 건립이 있다. 한국의 조선 기술은 세계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배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그런데 배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 주문을 다 못 받고 있다. 대우조선 사장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배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어떤 곳보다 북한이 적지라고 판단했다. 남북이 함께 조선사업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게 되고, 북한에게는 고용창출과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문


1 다음달 남북총리회담 개최
2 다음달 남북 국방장관회담 개최
3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원칙적 합의
4 서해에 공동어로수역 추진
5 통일지향적으로 남북의 제도, 법률 정비
6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7 이산가족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편지교환사업 추진
8 백두산 관광을 실시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합의
9 북경올림픽 남북단일팀 원칙적 합의
10 한국전쟁 종전을 위한 3자 혹은 4자회담 추진


정리 / 두경아 사진 / 이주석·경향신문포토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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