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퍼스트레이디이자, 궁극의 사치를 누린 구두 여왕으로 불리는 전 필리핀 퍼스트레이디 이멜다 여사가 경향신문 유인경 기자와 만났다. 질문지를 보낸 지 석 달 만에 날아든 오케이 사인은 8시간이 넘는 인터뷰로 이어졌다. 이 기사를 읽는다면 더 이상 이멜다 여사를 구두 3천 켤레를 수집하는 사치광으로만 기억하지는 않을 듯하다.
이멜다 만나러 간다구? 아직도 살아 있어?” “그 구두 여왕 말이지? 구두 몇 켤레만 가져와.”
전 필리핀 퍼스트레이디 이멜다 마르코스(79)를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대체 언제적 이멜다인데 아직도 건재한지, 또 세계를 놀라게 했던 수천 켤레의 구두는 안녕(?)한지를 모두 궁금해했다. 궁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3월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한국부인회 회장 김기인씨는 “이멜다 여사가 한국 식당에 자주 오는데 한국인들이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여전히 인기 있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3천 켤레의 구두’를 비롯해 사치와 부패의 상징으로 꼽혀온 그가 어떻게 지금까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는지 그리고 일흔아홉 살인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했다. 솔직히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력보다 이멜다의 근황에 더 관심이 갔다.
정식으로 질문지를 보내고 석 달을 기다렸다가 인터뷰 허락을 받았다. 퍼스트레이디에서 물러난 지 21년째인 지금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있지만 대부분 거절한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올 초에 블룸버그통신에서 한 것이 전부였다. 밤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가서 이멜다 여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놀라움’은 그치지 않았다.
구두는 보이지 않는 소박한 집 안
필리핀 마닐라의 부촌인 마가타 지역의 고급 빌라가 최근 이멜다의 거주지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와 비슷한 분위기. 집에 들어서니 뜻밖에 소박했다. 그 유명한 구두들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조개로 만들었다는 새빨간 장미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잠시 후 비서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멜다 여사가 등장했다.
“당신이 보내준 질문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사실 인터뷰는 굉장히 피곤하고, 때론 너무 왜곡되게 나를 다뤄서 대부분 거절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한번 한다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하죠.”
완벽주의자답게 그는 인터뷰를 위해 화장과 옷차림은 물론 질문지에 대한 충실한 (주로 자기 변명과 미화였지만) 답변을 준비했고,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자신의 과거 업적과 인생철학을 설명했다. 또 자동차로 5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마르코스 기념관(과거에 살던 집)을 소개해주었고 현재 9백1건이라는 소송 관련 자료도 보여주었다. 덕분에 1시간 정도로 예상했던 인터뷰는 8시간이 넘게 걸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멜다에 대한 비판의식보다는 감동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유명하건 악명이 높건 명사들에겐 뭔가 특별한 점이 있고 배울 게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먼저 이멜다의 근황을 살펴보자. 그의 가장 주요한 업무는 재산환수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다. 한때 1백억 달러에 달하던 재산은 거의 대부분 필리핀 정부에 귀속됐다. 이 가운데 50억 달러의 재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걸었다. 재산 환수 소송 말고도 현재 국내외에서 9백1건의 민사·형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찾아오는 손님을 맞고, ‘마르코스 기념관’에 가끔 들르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최근에는 ‘마더링’이란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의 책이란다.
워낙 열정적인 성격인 데다 수천억원에 이르는 재산을 찾는 소송, 그것도 한두 건이 아니라 9백1건의 소송에 관련된 자료를 검토하고 증거자료를 찾아 변호사와 상의하다 보니 머리가 녹슬거나 심심해서 우울증에 걸릴 염려는 없을 것 같다. 과거의 명예와 함께 돈을 되찾으려는 열정 덕분에 그는 여전히 퍼스트레이디 같은 파워와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전혀 사치와는 거리가 먼 듯 집 안 곳곳엔 과거 퍼스트레이디 시절에 만났던 숱한 지도자들과 찍은 사진들,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지구 환경에 대한 자료들이 걸려 있었다. 시선을 끈 것은 미국 현대미술박물관에서 판다는 이멜다 구두의 모형품으로, 장식장 안에 들어 있었다.
커피를 내온 잔 역시 아주 소박한 제품이었다. 1년에 의상과 보석 구입에 수십억원을 쓰고 신어보지도 않은 구두를 수천 켤레 사두기만 했다는 병적인 수집광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웠다. 그런데 장식장 위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거 미켈란젤로예요” 한다. 소문에 따르면 피카소 작품도 몇 점 있다는데 안방에 있는지 보지 못했다.
이멜다 마르코스는 미스 필리핀 출신이다. 젊을 때부터 워낙 아름다웠고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언변이 뛰어나 숱한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녀보다 열한 살 많은 페르디난도 마르코스가 그녀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해 청혼한 지 11일 만에 결혼한 것 그리고 죽는 날까지 절절한 연애편지를 남겼다는 러브 스토리도 유명하다. 천재라고 소문날 만큼 능력이 뛰어났고 좋은 가문이긴 했지만 나이도 많고 못생기고 키도 작은 남자를 왜 남편으로 선택했을까.
“페르디난도는 전쟁 영웅이었고 당시엔 굉장히 유능한 정치인이었죠. 그보다 날 더 사랑해줄 사람은 없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고, 무엇보다 이 남자의 청혼을 거절해서 만약 그가 죽어버리면 국가에 엄청난 손해를 끼칠 것 같아 청혼을 받아들였죠. 11일 만에 결혼했고 11년 후에 그는 대통령이 되었답니다.”
마치 자신이 남편을 대통령으로 만든 듯 자부심이 얼굴에 가득했다. 사실 그녀의 외교력과 정치력도 유명하긴 하다.
“내가 영부인이 됐을 때 필리핀은 정말 가난했답니다. 10개 가문이 모든 땅과 재산을 소유해 개발도, 정부 사업도 힘들었어요. 잘사는 가문은 개인 헬리콥터가 있으니 시골에 고속도로를 건설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요. 마르코스 대통령은 땅이 없으면 (간척해서) 땅을 만들면 된다면서 간척지에 교육, 의료, 문화시설을 지었어요. 우리 부부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하지만 21년간의 마르코스 시절이야말로 필리핀의 영광의 시기였고 많은 국민들이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 그녀는 또 다른 필리핀 대통령이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마닐라 시장을 지냈으며, 정치적 영향력은 남편을 뛰어넘었다. 그의 활동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활발했다. 빌라 곳곳에 내건 각국 수반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이를 웅변한다. 간디 인도 전 총리와 처칠 전 영국총리, 존슨 전 미국 대통령, 마오쩌둥 전 중국 주석 등이 그녀와 함께 사진에 담겨 있다.
“마오 주석을 만났을 때 필리핀 예법대로 손등에 이마를 대고 72세인 마오에 대한 존경을 표했더니 곧 내 손등에 키스로 화답했어요. 마오 주석은 ‘이멜다는 총이 아니라 평화와 사랑을 가져왔고, 우정과 존중이 시작됐다’고 큰 찬사를 보냈답니다. 그 순간 냉전은 끝난 거죠. 사실 당시 우리나라는 가장 큰 해외 미군주둔기지가 있는 등 미국의 종속국으로 여겨졌는데 마오 주석은 나의 존경심에 그런 것을 다 이해한 것 같아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로사란 스무 살짜리 동창이 있었어요. 학교에 늦게 들어오기도 했지만 워낙 학습 능력이 떨어져 우리는 그 아이를 ‘멍청한 로사’라고 불렀죠. 그런데 내가 영부인이 되어 바티칸에 교황을 알현하러 갔는데 교황청 복도에서 누가 ‘이멜다!’를 외치며 달려오는 거예요. 가까이서 보니 로사, 그 멍청한 로사였어요. 깜짝 놀라 ‘네가 여기 왜 있니?’라고 묻자 로사가 그러더군요. ‘나, 여기 살아. 교황을 보필하는 수녀거든…’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어요. 공부도 잘했고 영부인이 된 나는 겨우 교황을 한 시간 만나는 것도 영광스러워 하는데 세상에 그 멍청한 로사는 하루 종일 교황 곁에 머물며 하느님 은총을 받다니요.”
스스로 ‘베스트 베스트 베스트’ 시절이라고 회고하는 영부인 시절은 20년 동안 지속됐다. 그는 많은 공적도 남겼지만 그만큼 사치도 했고 구두만이 아니라 각종 보석과 그림을 수집했으며 많은 돈을 해외에 빼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1986년, 구두 3천 켤레만 남기고 가장 초라하고 서글픈 모습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 ‘워스트 워스트 워스트’의 생활이 시작됐다.
큰돈도 없이 남편, 아이들과 함께 미국에 온 그녀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외국 언론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하고 수집을 한다는 뜻의 ‘이멜다픽’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비난했다. 7개의 루이뷔통 트렁크에 가득했다는 보석도, 엄청난 액수의 재산도 빼앗기고 추락한 그는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어느 겨울날, 뉴욕에서 모임이 있었어요. 나는 그 추운 날씨에도 일부러 얇디얇은 필리핀 전통 드레스에 시폰 가운을 입고 갔죠. 아마 남들은 내가 미친 줄 알았을 거예요. ‘난 필리핀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내가 여기 뉴욕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죠?’라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죠. 이젠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그땐 정말 비참했어요.”
‘이멜다 컬렉션’으로 패션사업 진출
하지만 그는 활기찬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필리핀 부유층 깊이 뿌리박힌 이멜다의 영향력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주변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지난 5월엔 마닐라시장 출마를 검토하기도 했다. 이멜다는 “아들 봉봉은 상원의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봉봉은 외아들 마르코스 2세(40)의 별칭이다. 딸 둘은 ‘이멜다 컬렉션’이란 장신구 사업을 하고 있다.
이멜다가 선보인 패션 라인에는 그녀의 큰딸과 패션모델로 활동 중인 두 손자가 디자인한 제품을 비롯해 이멜다가 소유했던 보석과 신발, 옷과 함께 이를 본떠 만든 제품들 역시 포함됐다. 이멜다는 이번 사업에 대해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역시 아름다움뿐”이라고 말했다.
한 호텔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에게 미소를 짓는 마닐라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함께 사진을 찍자”며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멀리 떨어져 손가락질을 하며 적의에 찬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비서는 “최근 한 외국 대사가 환담 자리에서 이멜다 여사가 차기 대통령이 돼야 필리핀이 잘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멜다 여사가 통 잠이 없어 새벽 3, 4시에도 전화해서 ‘아직도 자고 있느냐’며 나무랄 때가 제일 괴롭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한국 식당 ‘가야’에서 이멜다 여사가 좋아하는 한식을 가져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멜다 여사는 놀랍게도 육회, 로스편채, 족발 등의 고기 요리를 아주 맛있게, 많이 먹었다.
“난 하루 2시간만 자요. 졸릴 만큼 피곤하지 않으니까요. 별다른 운동도 하지 않아요. 그리고 보다시피 많이 먹죠. 그런데도 건강해요.”
그가 이 말과 함께 하녀에게 뭔가를 주문하자 하녀는 엑스레이 사진을 가져왔다.
“보세요. 난 일흔아홉 살이지만 내 등뼈는 열여덟 살 수준이래요. 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서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이멜다 여사는 자신의 건강과 아름다운 노후 비결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긍정적인 생각이 아름다운 노후 가져와
“긍정적인 생각은 좋은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가 날 건강하게 만듭니다. 내가 구두 수집 등으로 물욕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눠줄 때가 제일 행복해요. 9백1건의 소송을 진행하느라 때론 억울하고 속상할 때도 많죠. 「성경」에도 과부와 어린아이는 괴롭히지 말라고 했는데 이 정부는 (과부인) 나를 왜 이리 괴롭히는지…. 하지만 영부인으로 있을 때보다 지난 21년간의 시련을 겪으면서 난 더 성숙해지고 더 많은 것을 얻었어요. 남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도 배웠고 진정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만약 정부가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날 사면해주면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해 불우한 이들을 도울 생각도 하고 있답니다."
80년 가까운 삶, 질곡과 영광이 교차된 삶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였느냐고 묻자 그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거예요. 그는 자다가도 일어나 나를 바라보며 ‘그동안도 당신이 그리웠소’라고 했죠. 죽는 그 순간까지 날 사랑했어요. 지금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페르디난도가 내 곁에 있다면 내가 어떤 결정을 하길 바랄까’를 생각하고 판단해요.”
사치의 여왕, 철로 만든 나비…. 이멜다 마르코스를 평가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 그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는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이자 여전한 열정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벽에 걸린 미켈란젤로의 그림보다 그 사랑이 더 부러웠다.
이멜다 마르코스 Imelda Romualdez Marcos
1929년, 비교적 부유한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멜다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급격한 집안의 쇠퇴를 겪었다. 타고난 성정은 적극적이고 다재다능했지만 가정 형편상 주눅들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고모의 도움으로 마닐라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날개를 단 듯 주목받는 삶을 살게 된다. 인기 있는 여고생 시절을 마치고 단과 법률대에 입학한 그녀는 쟁쟁한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1953년 미스 필리핀 대회를 발판으로 그녀의 인생은 그야말로 수직상승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노동으로 혹사당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일념은 그녀의 콧대를 더욱 높였다. 이듬해 정치가 집안의 촉망받는 상원의원이자 확고한 신념을 지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만난 이멜다는 그의 야망에 인생을 걸었다. 결혼 후 마르코스의 정치적 행보는 더욱 거세졌고 마침내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멜다의 노력이 단단히 한몫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후 그녀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그때부터 그녀의 사치벽이 무르익었다. 이 무렵 이미 그녀의 구두가 1천 켤레를 넘었다니 말이다.
1986년 발생한 시민혁명인 일명 ‘피플 파워’ 이후 마르코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 하와이로 망명했던 그녀는 1993년 부패 혐의로 기소됐다가 5년 뒤 무죄 혐의로 방면됐다.
이멜다가 세계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낭 궁에 3천 켤레의 구두를 비롯해 수백 벌의 의상과 장신구 등 어마어마한 사치품을 남기고 떠나면서부터. 1989년 망명지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난 남편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인이자, 가장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 글 / 유인경(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