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은 참고서다. 그 뒤를 자기 계발서와 실용서가 잇는다. 자기 계발서의 핵심은 ‘자신을 사랑하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이,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일까?
수험생이 아니라면, 서점에서 참고서를 구입할 일이 없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주부나 ‘입시’ 못지않은 부담감을 느끼며 산다. 세상은 온통 ‘부자가 되라’, ‘성공하라’는 목소리로 시끄럽다.
‘성공’을 향해 쉼 없이 달리고 있는 당신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은 ‘자기계발서’다. 직장상사와 대화하는 비결, 성공하는 리더가 되는 비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비결이 한 권에 다이제스트로 들어 있다. 읽는 동안은 모른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은, 혹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최면에 빠진다.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느껴지는 안정감이 ‘마약’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성공’에 종속되면서 점점 스스로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자기 계발서의 함정이죠. 현란하게 변해가는 현대사회를 숨 가쁘게 따라가기만 하려니, 자신을 규제할 수 없는 거죠.”
사회는 이미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변하고 있다. 쏟아지는 정보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퇴근 후, 한숨 돌리고 싶어 들른 커피숍에서 혼자 책을 읽는다. 아무리 바빠도 베스트셀러 정도는 읽어줘야 대화가 된다. 집에 가기 전에는 피트니스 센터에 들른다. 유행하는 미니스커트 정도는 입어줘야 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사회가 변해가는 속도는 빠르고, 개인이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이 넘쳐나죠. 우리는 시간을 쓸 방법을 잊었거나 아니면 그냥 흘려버리기 일쑤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 주부는 리모컨을 잡는다. 연예인의 얼굴이 남편보다 익숙하다. 언제부터인지 속을 알 수 없는 남편보다는 그들의 결혼 소식이 더 궁금하다. TV만큼 시간을 빨리 흘려보내게 해주는 도구도 드물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는 간식을 준비한다.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차린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궁핍하다. 자식 자랑을 하고, 남편 흉을 보는 것도 TV 못지않게 빠르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남편의 스케줄, 아이들 진학, 아파트 평수, 자동차 급수, 집값…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도대체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사랑할 여유가 없죠.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실, 행복해지는 비결도 자기 계발서에 ‘몽땅’ 들어 있다. 하지만 한 권이라도 읽고 깊이 공감했다면, 이제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이런 것도 있어요’라고 새삼스럽게 권하고 싶은 마음뿐.
자기 계발서의 반대편에 죽어 있는 시집?
세계적인 추세를 생각한다면, 시가 죽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유럽에서도 시집은 팔리지 않는다. 시는 음악과 함께 노래로 소비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를 짓는 사람들은 여전하지만 독자가 죽었다.
한국의 상황은 특별하다. 시인도, 독자도 살아 있다. 김선우 시인의 첫 시집은 12쇄를 찍었다. ‘시의 시대’라고 할 법한 198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도 시집이 나오면 만 부 이상 팔리는 현실은 놀랍다.
“올해 7월에 나온 시집은 세 달 만에 4쇄를 걸었어요. 놀라운 일이죠. 대중적인 감성의 쉬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도, 만 부 이상 팔리는 젊은 작가가 여전히 있어요. 외국 시인들이 부러워하죠. 천연기념물 보듯 한다니까요(웃음).”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나 베스트셀러 소설에 비할 숫자는 아니다. 그간 외면당했다고 생각한 시는 살아있다. 시를 소비하고, 그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히 크다. 인터넷 블로그에는 음악과 함께 시를 올려놓는 네티즌이 많다. 일종의 ‘장식적인 욕구’다. 동시에 시를 향유하고자 하는 잠재된 욕구라고도 볼 수 있다.
느닷없는 시 타령이 어렵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시를 분석하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했어도 ‘즐기는 방법’을 배운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애초에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말랑말랑한 감성의 청소년기에 이미 ‘시는 어렵다’는 관념이 박혀서 그래요. 시는 능동적이고, 속도를 강요하지 않죠. 베스트셀러가 재미있는 이유는 속도감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능동적으로 소설을 읽더라도 결국은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수동성이 있죠.”
시가 어렵고 당황스러운 이유는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자유’ 때문이다. 강요에 익숙한 일상에 길들여진 요즘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 강요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때문에 완전히 자유로운 독서와 감상이 가능한 시집 앞에 서서 망설인다.
“시 한 편을 백 명이 읽으면 감상도 백 개, 같은 시를 열 번 읽어도 각기 다른 열 개의 감상이 가능해요.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장르죠. 그 즐거움을 향유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의 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사랑하고 싶으세요? 사랑받고 싶으세요? 시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이 사랑의 능력을 복원하는 일이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고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못 듣게 되면서 삶이 속박되는 거죠.”
24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소비하는 것은 무리다. 일상에서 완벽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대하는 것도 욕심이다. 하지만 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욕심없이 선선하게, 팍팍한 일상을 파고든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훌륭한 시인과 시를 동시대에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어요. 그런데도 한 번도 들춰보지 않고 사는 것은 억울하지 않을까요? 갖고 싶은 명품을 사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지만, 6천원짜리 시집은 영혼을 채워줄 수 있어요.”
어느 연예인과 똑같은 명품을 사면 순간 ‘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장난감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감흥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 번 읽은 소설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 읽었을때의 감흥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느 쪽을 펼쳐 읽어도 3분이면 읽을 수 있는 시는 음악보다 빠르고, 영화보다 쉽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깊어지는 ‘맛’이 주는 만족감은 명품에 비할 게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싶은 당신의 손에는 이제, 자기 계발서 대신 시집이 들려있다.
“잠깐이라도 삶의 템포를 정지시키고 자기를 바라보는 방법을 알아야 해요. 그게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고, 시는 훌륭한 친구가 될 수 있어요(웃음).”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성훈 ■장소 협찬 / 합정동 즐거운 북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