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하인스 워드를 감동시켰던 것처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죠”
오랫동안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한길을 걷는 사람은 그 분야의 ‘대가’임이 분명하다. 27년째 국내외 귀빈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롯데호텔 이병우 총주방장만 봐도 그렇다.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을 펼치고, 한식의 세계화를 꿈꾸는 그의 쉼 없는 도전을 엿본다.
미국 프로 풋볼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계 혼혈인 하인스 워드다. 하인스 워드와 그의 어머니는 방한 기간 동안 롯데호텔에 머물렀다. 당시 하인스 워드는 롯데호텔에서 맛본 요리에 상당히 만족했다고 한다. 이병우(53) 총주방장에게도 그 일은 잊을 수 없다.
“하인스 워드가 맛본 한식은 미국에서 엄마가 해준 게 전부예요. 그가 한국 음식의 뿌리를 제대로 접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전통 음식’을 제대로 맛보게 해주고 싶어 신선로와 구절판 요리를 준비했죠. 처음 접하는 전통 한식이었지만 하인스 워드는 거부감 없이 잘 먹었어요. 그는 역시 한국 사람이었어요. 하인스 워드가 떡볶이와 순대 등도 먹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줬어요.”
슬로푸드 운동에 동참하라
요즘 이병우 총주방장의 관심은 ‘슬로푸드 운동’에 쏠려 있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식생활 운동을 말한다. 나라별·지역별 특성에 맞는 전통적이고 다양한 음식과 식생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워낙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어요. 패스트푸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그보다는 각 나라가 갖고 있는 고유의 식문화를 파괴한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큽니다. 더구나 비만 문제도 있죠. 우리나라에도 슬로푸드 운동 본부가 있어요. 그동안 ‘환경 먹을거리’로 고객 사은 행사를 하고, 환경운동가 최율씨와 함께 ‘환경 영화제’를 열기도 했죠.”
사실 오래 지속되어온 식문화를 개선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개선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병우 총주방장은 온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주부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한다.
“식문화를 개선해나가는 데는 주부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인스턴트 제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부들이 직접 식재료를 씻고, 썰고, 굽고, 끓였으면 해요. 인스턴트 제품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거든요. 라면 속에 들어가는 ‘`파’를 생각해보세요. 인스턴트 스프에 들어 있는 파와 직접 채를 썰어 넣은 파 중 어느 것이 더 맛있는지. 번거롭겠지만 엄마가 직접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해줄 때, 아이들은 변형되지 않은 순수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이병우 총주방장은 198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현재는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프랑스 요리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그는 제아무리 잘해봐야 프랑스인 요리사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우리의 식자재를 이용한 프랑스 요리였어요. 요리의 기본 틀은 프랑스식이지만 그 내용은 신토불이인 거죠. 한식을 세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수많은 요리 경연 대회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고, 수준 높은 호텔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지만 이병우 총주방장에게도 어려운 점은 있다. 호텔 내 식음료 업장의 개보수와 관련, 새로운 컨셉트의 메뉴를 선보이지만 고객들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다. 그렇다고 주저앉진 않는다. 고객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는 “2008년에는 호텔 내에 프랑스 요리 명인인 피에르 가니에의 레스토랑 분점을 오픈할 예정이고, 뷔페 식당도 리노베이션 중”이라고 했다.
후대에 ‘요리사 이병우’로 기억되고 싶어
경희대 경영대학원 호텔관광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이병우 총주방장은 내친 김에 박사 학위에도 도전했다. 5년간 주경야독한 끝에 ‘고객 시선 이동 모델 개발을 통한 최적 메뉴 디자인 설계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요리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짓는 것이 메뉴판이라는 점에 착안해 최상의 요리를 만들기 위한 메뉴의 적절한 구성 요건 등에 대한 연구에 몰두했어요. 학업과 직장 일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적으로 많이 쫓겼죠. 학교에 가는 중에 일 때문에 다시 호텔로 돌아온 게 셀 수 없을 정도예요. 남들은 보통 5학기에 졸업하는데, 저는 8학기 만에 졸업했습니다(웃음).”
그가 이렇게 공부하는 이유는 ‘직장인은 자신의 벨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호텔 내 조리부에 있는 2백80명의 직원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요리는 물론, 경영 전반에 대해서도 신경을 쏟아야 할 터였다.
공부 욕심이 많은 그는 ‘미학’에 관한 공부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학위를 따기 위한 공부가 아니므로 크게 부담스럽진 않다. 놀이를 하듯 즐겁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다. “바로 시작할 예정”이냐고 묻자 그는 “우선 아내에게 물어봐야 한다. 아내는 자기한테 소홀하다는 이유로 내가 공부하는 걸 싫어한다”며 웃는다.
‘요리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그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