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하고 아이들도 잘 키워낸 아내에게 표현은 잘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국회의원 한 사람을 두고 얼마나 많은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평가에는 호불호가 엇갈리겠지만, 어쨌든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주인공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하다. 바야흐로 정치 인생 제2막을 여는 이재오 의원과 그의 든든한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 추영례 여사와 함께한 과거 그리고 미래.
재야운동가에서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으로 연속 당선되고 한나라당 원내총무, 사무총장, 최고의원을 두루 거친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63)은 국정감사의 모범생이자, 서민 정치인으로 손꼽혀왔다. 그리고 이제는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이끈 공신으로 통한다.
이재오 의원의 집을 찾은 날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특사 자격으로 러시아 방문을 하루 앞둔 지난 1월 19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의 갈등으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 의원에게 묻고 싶은 질문도 많았지만, 이날의 주빈(主賓)은 좀처럼 매스컴에서 만나기 힘든 부인 추영례 여사(59)였다.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 탓에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고, ‘검소한 국회의원’으로 불리는 남편과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동반자에게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먼저 건넸다.
“정치인 이재오는 언제나 악역을 담당하기에 강한 이미지로 비춰지지만, 제게는 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에요. 집에서는 마치 시트콤의 주인공처럼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아주 자상한 남편이랄 순 없지만, 아내 입장에서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접었으니까요. 우리는 동지적인 관계라고나 할까요.”
양복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온 이 의원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겠다며 안방에 들어간 사이 추 여사가 들려준 얘기다. 알려진 대로 이재오 의원과 추영례 여사는 부모가 연을 맺어준 사이다. 1940년대 일본에 부역을 나갔다가 만난 양가 부친은 1969년 결혼할 때가 된 서로의 자녀들을 소개해줬고, 2년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추 여사가 들려준 ‘동지적인 관계’라는 단어에 불쑥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된 일화가 떠올랐다. 아직 본격적인 교제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하루는 추 여사가 이 의원을 만나러 민주화수호청년협의회 사무실에 갔더니 ‘모처럼’ 데모가 없는 날이라 동대문운동장에 야구를 보러 갔다고 했다. 내친 발걸음에 야구장으로 향한 추 여사는 수백 명의 인파 속에서 단숨에 이 의원을 찾아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출현보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을 단번에 발견한 데에 놀란 이 의원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보나마나 돈이 없을 테니까 외야석 구석 자리에 앉아 있을 줄 알았다”는 것.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평탄치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요. 때문에 집에서는 반대를 많이 했지만 결혼을 결심했고요. 그때는 그런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어요. 자기 가치관이 또렷해 보였거든요. 제게도 영웅 심리가 좀 있었던 모양이에요(웃음).”
잘 풀릴 인연이었는지, 야구장에서 보여준 추 여사의 기지에 이 의원도 단단히 반했다. 그 역시 험난한 인생을 함께할 만한 사람임을 그때 직감했다는 후문이다.
정치인 아버지와 힙합 가수 아들의 하모니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부부의 결혼식은 1971년 10월 9일에 치러졌다. 결혼식 당일 수배령이 내려진 신랑의 처지가 어이없었는지 자리를 지키던 안기부 직원이 “오늘은 봐주고 내일부터 잡을 테니 알아서 도망가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단식농성 중에 달려와 허겁지겁 식을 올리는 신랑도 신랑이지만, 마음껏 행복을 뽐내지 못하는 신부의 처지가 그의 감정을 자극했으리라.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장녀 이고은씨(36)는 현재 동생 이은별씨(35)와 함께 패션 관련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오는 3월에 출산을 앞둔 차녀 은별씨는 10년 이상 여성지에서 생활 파트를 담당하던 기자 출신이다. 마감과 야근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안다며 추 여사가 눈을 찡긋한다.
큰누나와 열두 살 터울이 지는 막내아들 이민호씨(24)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늦둥이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이 의원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지만, 듣고 보니 그 이유가 어째 좀 슬프다.
“제가 감옥 갔다 와서 낳은 아이예요. 그 사이에는 낳을 수가 없었잖아요(웃음). 재야운동부터 시작해서 치열한 터널을 지나고 돌아보니 어느덧 아이들이 장성해 있더군요.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감옥에 있거나 집을 비우고 못 본 것이 많이 아쉽습니다. 어쩌다 친정에 들르는 딸들한테 애정 표현은 잘 못합니다만, 정말 각별하게 사랑합니다.”
이 의원은 딸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잘라 말하지만, 아닌 듯하다. “아버지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말을 안 할 뿐”이라는 추 여사의 말이 정답인 것 같다. 1992년 14대 총선 때 은별씨는 직접 그린 편지지에 아버지를 지지해달라는 글을 써서 군인들에게 보냈다. 무려 1천 통이라니 억지로 시켰으면 금방 질려서 도망갈 법한 양이다. 참고로 당시에는 불법선거운동이 아니었다. 한 가지 추가한다면 이후 은별씨는 군인아저씨들의 답장을 엄청 받았다. 이후 15대 때는 고은씨가, 17대에는 아들 민호씨가 선거운동원을 자청해 아버지를 도왔다.
“자식 농사요? 아직은 AS 기간이죠(웃음). 애들이 표현은 잘 안 하는 편인데, 툭툭 던지는 말 속에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어쩌다 ‘인터넷에 아빠 관련 글이 많이 올라오니까, 잘 살피세요’라는 얘기도 해요.”
국회의원 안사람 소리 듣는 것만으로 행복해
서울 은평구 구산동 000-00번지 실평수 23평의 단층 주택. 지난 1990년 그동안 모은 돈 8백50만원에 대출금 2천만원으로 장만한 이 집에서 이재오·추영례 부부는 3남매를 키웠고, 두 딸을 출가시켰다. 딸들이 시집간 덕분(?)에 비로소 ‘내 방’이 생긴 이 의원은 딸들이 물려준 화장대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번지수를 검색해 지도를 뽑아갔음에도 이재오 의원의 집을 찾는 데 꽤나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3선 국회의원의 집이라는 선입견에 그 동네에서도 제일 좋은 집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기 때문인 듯하다. 결국 수행비서관과 통화 끝에 “○○빌라 옆 전봇대 두 개 샛길 막다른 집”을 찾았을 때는 반가움보다는 주차를 어디에 하면 좋을지, 난감함이 먼저 몰려왔다. 이런 남편을 매스컴에서는 ‘검소한 국회의원’으로 선정해 보도하지만, 솔직히 아내 입장에서는 그저 달가울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에 남편이 갇혀 있을 때는 ‘남편이 나오면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했고 나오고 나서 한 차례 낙선한 뒤에는 ‘국회의원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했어요. 그런데 15대 당선 이후에 보니 똑같은 거예요. 국회의원이 된 뒤 비리와 연관되지 않도록 조심하려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이게 편해요. 정치인 돈 얘기 나올 때 떨릴 일도 없고요.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요. 국회의원 안사람 소리 듣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행복한 거죠.”
“주거 목적으로 마련한 집 한 채로 인해 ‘집 팔아 세금 내게 생겼다’는 분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 중이고, 정체 예방을 위해 이미 건설비를 뽑아낸 고속도로의 경우 명절 때 통행료를 무료로 하는 방안도 추진할 방침입니다. 주부들이 피부로 느끼는 민생경제 손질을 하려고 합니다. 변함없이 내조하고 아이들도 잘 키워낸 아내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쪽으로 관심이 더 갑니다. 표현은 잘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아내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4월 총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출마 의사를 밝히는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꿈꾸는 당사자는 일단 제쳐두고, 그들의 아내에게 전하는 추 여사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솔직히 부인의 입장만 따지자면, 남편이 출마하지 않는 게 행복할 거예요. 남편이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부터 편안하게 살겠다는 의지는 버리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 해요. ‘내가 국회의원 아내니까 인사를 해야지’가 아니라, 지역민들에게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겠죠. 4년 임기 동안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남편이 출마하지 못하도록 꼭 붙잡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면에 나서지 않는 조용한 내조자로 알려진 추 여사의 활약상은 은평구 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노래교실에 갔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은맥여성문화센터가 올해로 설립 16년째를 맞았다. 지역 여성들의 여가 선용과 취미 활동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평생교육원으로 지금은 은평구 어머니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40대에 처음 센터를 찾은 분들이 이제 60대가 됐어요. 서로의 생활과 애환을 다 아는 사이가 된 거죠. 그분들에게는 우리가 정치인이 아닌 그저 매일 보는 이웃이죠. 최근엔 센터 덕분에 우울증을 치료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가 가장 뿌듯했어요.”
정치 인생 20여 년, 더 낮은 자세로
이명박 캠프의 대선 승리에는 추영례 여사의 노고도 녹아 있다. 당내 경선을 앞두고 상대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했던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의원 그룹을 형성하기 위해 이재오 의원은 동료 의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명박 후보가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손님상이라고 해봐야 그가 평소 먹는 대로 된장찌개, 생선구이가 오르는 소박한 찬이었지만, 특급 호텔의 고급 정찬보다 값진 위력을 발휘했다. 단순히 선거운동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가 있음을 피력하는 데 그만한 것이 없었다. 80명에 가까운 이들의 식사를 손수 차려낸 아내에게 그는 이제야 “우리 집사람 고생했지”라고 툭 한마디 던진다.
“이름을 붙이다 보니 ‘한반도 대운하’가 됐는데, 사실은 강길 따라 옛날 뱃길을 복원한다는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는 마포에서 충주까지 새우젓배가 다녔는데, 지금은 못 다니지 않습니까. 농축산업 폐수로 오염된 하천의 퇴적물을 거둬내고 옛날의 뱃길을 복원해 막힌 곳의 물길을 다시 잇는 겁니다.”
이 의원은 한반도 대운하의 난코스로 지목된 문경새재의 한 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터널을 뚫어서 물을 위로 끌어올려 잇는 공사를 해야 하는 그 산의 이름은 배 주(舟), 달릴 월(越)을 써서 ‘주월산(舟越山)’인데, 이는 조선시대 고승 무학대사가 “이 산을 배가 넘어다닐 것이다”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지선 열두 대를 강에 띄우면 트럭 4천5백 대 분의 물량을 실을 수가 있습니다. 물류뿐 아니라 강을 끼고 발달한 역사와 옛 문화를 복원해 우리나라 문화관광벨트로 만들 계획도 있습니다. 단순 토목공사가 아니라 나라 구석구석을 다시 일으키는 일종의 국토 재창조 개념으로 보셨으면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라기보다는 ‘한반도 물길 잇기’, ‘물길 따라 뱃길 잇기’가 더 적확한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이재오 뽑길 잘했다’, ‘국회의원이 되려면 이재오처럼 하라’는 소리를 듣겠다는 심산으로 뛰어든 정치 인생이 20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동안 그의 꿈은 ‘좋은 대통령을 만들자’로 바뀌었고, 지난 대선을 치르며 그 꿈이 실현됐다고 믿고 있다. ‘세상은 거저 얻는 것이 없다. 내가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청년 시절의 다짐은 근래 서서히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 이후 이 의원은 과거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의 대상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까지를 정치 인생 1단계라고 말하는 그에게 바로 오늘은 정치 인생 제2막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든든한 ‘동지’이자 부인 추영례 여사가 있다.
“남편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 고생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전 비굴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남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언제나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저 사람이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시 냉철한 판단을 했구나’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참 대단하다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때(스무 살 시절)는 철없을 때라 남편이 참 멋있어 보였다”고 말하던 추 여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또렷한 가치관을 가진 남자여서 좋아 보이더라”는 얘기도. 이재오 의원의 그 한결같음은 지척에서 그의 무게 중심이 되어주는 아내 추영례 여사의 ‘단단한 동지애’가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하다.
■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이재오 의원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