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댓글 공유하기

“포크레인 유리 상자에 갇혀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신춘문예는 마약이다. 문학에 꿈을 가진 사람들은 습관처럼 글을 쓰고, ‘신춘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출품한다. 몇 번의 고배를 마셔도 열정은 죽지 않는다. 이종률씨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사로운 담론이나 농담 같은 소설보다는 서사의 뼈대가 확실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문장은 소설의 피부고, 서사는 골격이니까요”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문학과 ‘포크레인’
굴삭기와 문학의 조합은 어색하다. 굴삭기가 문학의 소재가 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어도, 굴삭기사가 소설가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누구나 소설을 쓸 수는 있지만,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30년 가까이 굴삭기를 몰아온 이종률 씨(48)는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됐고, ‘등단작가’가 됐다. 한국소설가협회가 주는 ‘올해의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그동안 각종 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출품한 횟수는 20회가 넘는다. 1990년대 초반부터 매년 출품했다. 좁다란 굴삭기 조종석의 ‘유리 상자’는 그에게 ‘창작의 공간’이었다.

“덤덤해요. 거쳐 가야 할 과정을 통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운이 좋았죠. 한꺼번에 두 개의 상을 받았으니까요(웃음).”

이종률씨는 고교 졸업 직후부터 굴삭기를 몰았다. 18세 때 굴삭기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6, 7년은 참을 만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예민한 감성은 굴삭기 조종석에 갇혀 있길 거부했다. 천생 ‘문학청년’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낙동강을 건너 학교를 다녔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홍수가 나면 선산을 돌아가곤 했죠.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오전 10시가 넘을 것 같고, 그러면 그냥 안 가는 거죠. 공부에 흥미도 없었고, 강의 유혹에 빠졌다고 할까요. 그것도 고 3 때(웃음).”

‘땡땡이’ 친 손에 든 것은 종이와 연필이었다. 버드나무 밑에 앉아서 소설을 읽거나 시를 썼다. 강물에 들어가 멱을 감기도 했다. 그는 “안 잘린 게 다행”이라고 웃으며 회상했다. 그때 쓴 시들은 입대 직전 불살랐다.

“인생은 한 번뿐이잖아요. ‘내 인생이 포크레인 유리 상자에 갇혀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에서 공상했죠. 이야기를 만들었고, 어원(語原)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와 정리했어요.”

수상작은 좧탑리에는 숨 쉬는 비아그라가 있다좩라는 단편소설이다. 작중 화자도 소설가다. 근근이 원고 청탁을 받기도 하지만 고료는 우스운 수준이다. 소설에서는 ‘비아그라 세 알’을 고료로 받는다. 작품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다. 회원들은 때로는 진지한, 때로는 가볍기 이를 데 없는 댓글 혹은 비평을 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 오늘날의 문학이 얼마나 가벼워졌는지를 시사한다. 화자의 소설은 ‘비아그라 세 알’ 의 교환 가치를 가진다. 심사평은 작품을 두고 “오늘날의 글쓰기 행태가 너무나 사사로운 담론 주고받기에 빠지고 말았다는 통렬한 비판이자 신랄한 조롱”이라고 썼다.

“소설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사로운 담론이나 농담 같은 소설보다는 서사의 뼈대가 확실한 작품을 쓰고 싶어요. 문장은 소설의 피부고, 서사는 골격이니까요.”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맨땅에서 맨손으로
‘소설가가 된 굴삭기 기사’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가난’이다. 그러나 이종률씨는 구미에 굴삭기 12대, 몽골에 5대를 소유하고 있는 중기업체의 대표다. 그는 “이거 다 팔아도 서울 가면 열 평짜리 아파트도 못 산다”고 농을 쳤지만, 그 모든 것은 맨손으로 시작해 일군 결과다. 그의 명함에는 “대한중기 신화창조팀”이라고 써 있다.

“제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굴삭기 한 대에 기사가 두 명이었어요. 교대로 일했죠. 굴삭기를 타지 않는 시간이 아까워서 못을 줍기 시작했어요. 버린 못을 줍다 보니 동료에게 담배 한 갑 정도 사줄 수 있는 용돈은 벌 수 있었죠(웃음).”

남는 시간에는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못을 주워 팔았다. 고물상에서 무게를 달아 값을 쳐줬다. 하루에 네 깡통 정도 주우면 당시(1980년대 중반) 화폐 가치로 3천원 정도를 받았다. 지금 돈으로는 7, 8천원 정도다. 굴삭기 기사로 일한 돈은 차곡차곡 저축하고, 못을 주운 돈으로 생활비와 용돈을 썼다.

“그렇게 못을 주우면 하루에 담배 두 갑, 주전자 막걸리 한 되 먹을 정도가 됐죠. 부기사에게 담배를 사주기도 하고, 그러면 부기사는 ‘우리 사수 짱이다’라며 좋아했어요(웃음).”

돈 대신 받아온 고장난 자전거를 수리해서 타고 다니면서 더 많은 못을 주워 팔 수 있었다. 일을 하고 못을 줍는 동안 헌 자전거는 50cc 오토바이가 되고, 곧 포니 승용차로 바뀌더니 작은 굴삭기 한 대를 구입할 수 있는 정도까지 됐다. 한국과 몽골에서 굴삭기 열일곱 대를 가지고 회사를 꾸릴 수 있었던 저력이다.

“제가 하는 것이 ‘신화창조’예요. 신화를 일구면서 살아야죠(웃음). 젊었을 때부터 하고자 한 일은 일구지 않은 것이 없어요. 하고자 했던 일이 안 될 때는 스스로에게 물어요. ‘사력(死力)을 다했느냐’고. 그게 좌우명입니다.”

굴삭기를 몰았던 30년이나 소설을 쓰고 신춘문예에 출품을 계속해온 십여 년이나 차이는 없다. 먹고 살기 위해 굴삭기 핸들을 잡은 손으로 저녁에는 글을 썼다. 굴삭기는 몸을 살렸고, 글쓰기는 마음을 살렸다.

“즐기면서 썼어요. 처음에는 먹고살기가 어려웠죠. 제대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가 둘이었으니까요(웃음). 머리가 채 길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사글세방부터 시작했어요.”

네 가족이 열 달 사글세방에서 살았다. 굴삭기를 몰고, 못을 주워서 돈을 모으니 열 달 후에는 전세값이 모였다. 2년 후에는 구미에 있는 8평 주공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동안 굴삭기는 두 대가 됐다. 구미 공단이 활성화되면서 사업도 확장했다.

“이제는 내리막이죠. 경기도 좋지 않고, 나이도 있으니까요. ‘낙법’ 익혀야 하는 나이입니다. 중기로는 더 이상 키우는 게 불안하고, 이제는 어디로 ‘엎어져야 할지’를 고민해야죠(웃음).”

60세가 되면, 개인택시를 몰 생각이다. 그토록 바라던 ‘등단작가’가 됐지만 글만 쓸 생각은 없다. 일과 체험이 있어야 글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손님 있으면 태우고, 없으면 말고”라며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이다.


‘등단’이 선사한 자유
“해마다 그랬습니다. 남다른 비애를 느끼는 거죠. 다름 아니라 신춘문예 때문입니다. (중략) 어떤 ‘눔’은 나를 종심이 형이라고 부른답니다. 최종심만 일곱 번. 그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지요. 나는 왜 안 되죠? 딴 사람 다 되는데….”

지난 2006년 12월 26일, 이종률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제목은 ‘‘씰씰’하고 비애스럽고 쪽 팔리는 연말’이다. 1990년도부터 도전한 신춘문예에 또 한 번 고배를 마시고 쓴 글은 절절하다. “홍사는 신춘에 안 되면 중견이고 되면 신예인데 뭐 하려고 도전하느냐”는 이규리 시인의 조언에는 “규리 언냐!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전 꼬리표가 없어요”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마흔일곱 살에 신춘문예 등단 굴삭기사 이종률씨의 꿈

“이제 신춘문예 때문에 비애를 느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괜찮은 글을 써야죠. 독서량도 부족했어요. 인식과 사유의 지평을 넓혀야죠. ‘문단의 금옥’이 된다거나 ‘베스트셀러’를 쓰겠다는 얘기는 할 수 없어요. 되지도 않고요(웃음). 제 마음에 드는 글을 꾸준히, 지속적으로 쓰는 자세. 그게 신화가 아니겠어요?”

집필 중이거나 구상 중인 소설이 없으면 ‘직무 유기’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것은 ‘숙제’가 됐다. 10년 전부터 그랬다. 그때부터는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고, 사명감도 느껴졌다.

“저는 ‘일회성’ 삶을 살고 있지만, 역동적인 상상력으로 화자의 입장에서 사유하고 소설 속에서 상상의 지평을 넓혀가고 싶어요. 주인공을 통한 간접 체험으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죠.”

‘신춘문예 등단작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그동안 일정한 틀에 맞춘 글을 써온 것도 사실이다. 신인다운 패기, 실험적인 언어와 구성, 그리고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신춘문예의 기준이다. 당선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선물했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야죠.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터지기 전에 좧타이탄좩이라는 소설이 먼저 나온 것처럼, 사회적 문제를 먼저 ‘때려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고령화 시대 ‘노인의 성(性)’을 다룬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사사로운 담론과 농담이 넘쳐나는 시대, 이홍사(필명)의 소설에 담길 이야기의 무게는 사회를 향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이주석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