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네팔 산악 지대에서 추락한 유엔 네팔임무단(UNMIN) 헬기(MI-8) 탑승자 박형진 대령의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반드시 생존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온 국민의 바람은 이제 슬픔이 되어 울먹이고 있다. 사고가 난 지 보름째, 그가 남긴 빈자리는 너무 크다.
“아직 믿겨지지가 않아요. 그냥 저와는 상관없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남편이 평소에 몸이 아팠다든지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진 않을 텐데…. DNA 검사할 때 병원에 갔던 흔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검사하기가 쉽대요. 그런데 병원 한번 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굉장히 건강하셨거든요.”
이번 고(故) 박형진 대령(50, 육사 38기)의 파견은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루지야에서 1년 반 동안 정전감시단 근무를 마치고 2006년 9월 귀국한 박 대령은 곧바로 유엔 네팔임무단 파견 제의를 받았다. 보통 해외 근무를 마치면 1년 동안 국내 근무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네팔로 처음 임무단을 파견하는 유엔은 경력자를 요청해왔다. 그루지야에서 돌아온 지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보내던 오붓한 시간은 다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가지 않겠다고 하면 안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루지야에서도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온지라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저를 설득하더라구요. 나는 이미 당신하고 결혼하기 전에 국가와 결혼했다고, 자신은 국가가 부르면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고 언제든지 가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 뜻을 꺾을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개인적인 일로 가겠다고 했으면 천 번 만 번 말렸을 거다. 하지만 신난수(48)씨는 남편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떠난 남편은 귀국을 4개월 앞두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며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아이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2003년도에 남편이 군수 교관이 되면서 가족 모두 미국에 갔어요. 아이들은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죠. 저와 남편은 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거든요. 아이들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하니까. 특히 딸아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자마자 아빠가 그루지야로 파견이 됐고, 그루지야에 다녀오자마자 다시 네팔로 파견돼서 아빠와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너무나 할 말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는 할 수 없게 됐다며 가슴 아파해요.”
여러 해외 근무로 가족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지만 고(故) 박형진 대령은 표현을 잘하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멀리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혹여 자신의 빈자리에 아이들이 외롭진 않을까 항상 메일과 전화로 세심하게 챙겼다.
“우리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 아빠가 멀리 와 있는 거라며 이해해달라고. 누군가의 희생은 필요한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항상 아이들을 다독였어요. 아이들도 그런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구요. 다정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 사랑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어딜 가든 나라 사랑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는 이웃집 낙엽 청소까지 도맡아 할 정도였다. 그에게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됐다.
“군수 교관으로 미국에 있을 때 각 나라에서 온 대표들이 한동네에 모여 살았어요. 옆집에 프랑스, 영국 대표가 살았는데, 남편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옆집 청소까지 다 하는 거예요. 버지니아는 가을에 낙엽이 많거든요.”
그렇게 온 동네 청소를 다 하다 보니 아침마다 마당에 낙엽 모은 봉지만 20~30개였다.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낙엽 주우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미 다 청소가 돼 있으니까. 한국 사람이 이렇게 부지런하고 성실한지 처음 알았다고 하더라구요.”
미국에 군수 교관으로 있을 때에는 각 나라에서 온 장교들 중 우수 장교로 뽑히기도 했다.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이었다. 사령관이 남편에게 한국과 미국 군수 외교에 큰 힘이 됐다며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부탁을 할 줄 알았던 남편은 사령관의 한국 군사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제대하고 나면 뭐를 해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한국 군사학교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사령관이 깜짝 놀란 거예요. 직접 오셔서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가해달라고, 그래서 서로 더 좋은 군수물자를 교환하는 데 도와주셔야 할 부분들을 눈으로 확인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결국 사령관은 약속을 지켜 한국을 방문했고 그 일로 인해 우리나라의 군수 교환에 가속도가 붙었다. 남편은 사령관이 방문했을 때 계획 장교로 통역과 번역을 도맡아 했다. 표창장도 받았다. 그때가 2004년이었다. 조그만 일부터 큰일까지 고(故) 박형진 대령은 언제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군수에 대해 전문가였잖아요. 물자나 지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강대국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절감한 것 같아요.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좀 더 앞서 갈 수 있지 않을까, 시간만 나면 영어 공부를 하셨어요. 특히 군사용어는 전문용어잖아요. 말 한마디에 엄청난 물자가 왔다 갔다 하니까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철저하게 공부하셨어요.”
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
자상했던 남편은 네팔에 근무하면서도 수시로 메일을 보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사는 막사, 네팔의 시장, 사람들까지 메일을 통해 그곳의 모습을 전해왔다. 멀리 떨어져 불안해할 가족들을 위한 배려였다. 때문에 신난수씨는 네팔에 가지 않아도 남편이 오늘은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곁에 있는 사람처럼 알 수 있었다.
“지난 남편 생일에 전화가 왔더라구요.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저는 미역국 못 끓여줘서 미안하다고 했죠. 가슴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생일날 혼자, 허름한 막사에서 지낼 남편을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죠. 그런데 남편이 자기네 집에 누가 방문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친구하고 같이 있었대요. 제가 너무 반가워서 ‘누군데?’라고 물으니 도마뱀이라는 거예요. 네팔은 유엔이 처음 파견된 곳이라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막사 천막에서 먹고 자는데, 도마뱀이랑 같이 생일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네팔에 가지 않고 한국 연합사에 근무했으면 집에서 아이들과 편하게 있었을 텐데,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생일 밥 먹으며 오붓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저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 그때도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며칠 후 남편으로부터 도마뱀 사진이 담긴 메일이 도착했다.
‘도마뱀 시리즈.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내일 캠톤먼트 부대를 위해 준비하는 중 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도마뱀은 이제 일상적으로 방 혹은 거실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데 내 여행 가방 안에서 도마뱀 가족이 단체로 발견됐습니다. 네 마리 새끼 중 한 마리는 죽어 있었고 세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어서. 위의 두 사진은 새끼들 사진이고 아래는 부모.’
자신의 막사에 들어온 도마뱀을 보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남편이 보내온 메일을 보여주며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곳에서 도마뱀이랑 살면서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게 남편이 있던 곳이에요. 이렇게 허름한 막사에서 흙바닥에서 밥 해먹으며 지냈어요.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설사를 했대요. 물이 안 맞아서.”
하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고(故) 박형진 대령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근검절약하며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아껴 쓰라고 당부했다.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은 4년간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수업이 끝나면 학교 식당에서 일하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옷이나 운동화도 항상 제일 싼 것으로 살 정도로 아버지 말씀을 잘 따랐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언제나 큰 산이 되어 가족을 지켜주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아이들에게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아빠가 길러줬어요. 그런 아빠가 이제 없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엊그제는 딸아이가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엄마, 나 이제 아빠가 없는 거야?’하고 묻더라구요.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한 번도 아빠가 안 계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딸아이도 이제 실감을 하나 봐요. 한참을 울었어요.”
남편의 선물
신난수씨가 남편을 만난 것은 남편이 생도 3학년 때였다. 육군사관학교 축제 때 파트너가 되어 만남을 이어오다 남편이 졸업하던 날 학교 잔디밭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남편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자를 위해 기도를 했대요. 그 배우자가 저라는 거예요. 만약에 자기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분명히 이혼할 거라고,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보내준 사람이라고 결혼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때부터였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며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 그렇게 두 사람은 졸업하는 날 약혼을 하고 7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군인의 아내로 스무 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며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남편과 결혼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결혼 생활하면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외국에 있어도 항상 전화로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꽃다발이나 목걸이, 향수 같이 작은 선물이라도 꼭 챙겼어요.”
남편에게 받은 선물 중에 몇 년 전에 받은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군인의 아내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 역할에 충실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6장의 편지지에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남편이 나라를 사랑했던 만큼 가정도 사랑했기에 나라 일에 바쁠 때에도 그의 빈자리가 크지 않았다. 함께 있지 않아도 그 마음이 충분히 와 닿을 정도로 자상하고, 또 사랑을 표현하던 남편이었다. 남편의 부재는 아직까지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슬픔이다.
“어제 사망신고 하고 집에 왔는데 이제 정말 남편이 없구나, 실감이 나는 거예요. 며칠 동안 전화가 없으니까, 그게 제일 커요. 매일은 아니었지만 남편과 통화하는 시간대가 있었거든요. 네팔 카트만두는 하루에 12시간이 정전이에요. 국제 전화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서 통화를 했어요. 그 시간대가 되면 저도 다른 일을 하다가 전화를 기다리곤 했죠. 항상 자상하게 전화해주고 메일 보내주고 그랬는데 이제 전화도 없고 메일도 없으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요. 그저께는 집에 있는데 남편과 항상 통화하던 시간에 전화가 온 거예요. 전 그 사람이 죽었다는 걸 순간 잊어버리고, 그 사람 전화인 줄 알고 안방에서 뛰어나와 ‘여보, 당신이야?’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더라구요.”
혹시나 하고 메일도 확인해봤지만 더 이상 남편에게 온 새로운 메일은 없었다. 항상 곁에 있던 남편의 소식이 이젠 더 이상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슬픔이 밀려왔다. 지금쯤 하늘에 있을 고(故) 박형진 대령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전 매일 남편하고 얘기해요. 워낙 둘이 얘기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아무 일도 아닌 이야기로 밤새도록 이야기하곤 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기도하며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누구를 만나는지 다 얘기했어요. 그리고 부탁했어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천국에서 우리를 잘 지켜봐달라고.”
신난수씨의 미소는 굵은 눈물이 되어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제 남편 대신 국민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남편이 그동안 해왔던 일들을 보면서 얼마나 나라가 소중한지 느꼈습니다. 남편은 이제 없지만 우리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군인이 무엇인지, 충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화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듯이 남편의 죽음도 많을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어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이뤄가며 나라를 위한 마음을 조금씩만 가져주셨으면 해요. 그게 바로 남편이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고(故) 박형진 대령은 훌륭한 군인이자 자상한 남편, 다정한 아버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만, 또다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남긴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는 또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눈물을 멈추기 전에, 다시 힘을 내기 전에 한 번 더, 고(故) 박형진 대령의 명복을 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