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슬퍼하고,방황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애도’라 한다. 작가 김형경은 아름다운 환경을 잃었을 때 역시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작가를 인터뷰하고 나서 기사를 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무서운 독자는 바로 그 인터뷰 대상자인데, 그가 바로 작가라면 부담은 백배로 커질 수밖에 없다. 김형경은 기자의 가장 큰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글 잘 쓰고 싶죠?”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형경의 신작 「꽃피는 고래」는 작가의 이러한 배경이 충만하게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고래나 장생포(처용포) 이야기는 그가 기자 시절 실력을 발휘해 취재해 얻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 소재를 10년이란 시간 동안 숙성시켜 보편적인 정서의 소설로 탄생시켰다. 이러한 노력 덕분일까. 환경오염과 소녀의 상실을 절묘하게 엮어 하나의 주제로 매듭짓는 작가의 역량은 감탄할 정도다.
고향의 강이 오염된 모습 보고 충격받아
열일곱의 소녀 ‘니은’은 한순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는다.
아무 예고 없이 닥친 불행 앞에 소녀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기도 하고,
익숙한 등굣길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니은은 아버지의 고향인 처용포로 내려간다. 처용포는 과거 고래잡이가 성업했던 포구지만,
고래잡이가 금지된 후에는 공업단지로 변했다. 공업단지로 변한 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흙도 물고 공기도 변했다. 소녀는 처용포에서
고래잡이 명수였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버려진 고양이와 개를 돌보는
왕고래집 할머니를 만난다.
소녀의 성장소설인 것 같기도, 환경오염을 다루는 환경소설 같기도 하다. 작가는 애도(哀悼)의 소설이라 한다. ‘애도’라는 단어 안에는 소녀의 성장과 환경오염이 모두 들어 있다.
“대상을 잘 떠나보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그것을 애도라고 해요. 말 그대로 슬퍼하기의 과정이에요. 애도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아요. 애도의 대상이 환경이나 부모일 수 있고, 이데올로기나 지위, 권위일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잃으면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되죠.”
애도는 정신분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심지어 애도의 개념으로 작품을 읽거나 사회, 정치, 윤리 등 인문학까지 애도를 통해 풀고 있다고 한다. 「꽃피는 고래」는 애도의 과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애도를 잘하면 더 좋아져요. 성장하는 계기가 되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한 단계 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 된 것 같아요.”
“고향 마을의 강물이 더러워졌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들어가 온몸으로 사용했던 곳인데, 손을 담글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더라고요. 항상 그 강을 생각하면 기쁨으로 가득하곤 했거든요. 그때 받은 충격, 감정이 바로 애도였던 것 같아요.”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처용포는 작가가 만든 가상의 공간이다. 물론 모델은 있다. 울산에 있는 작은 포구 장생포다. 고래잡이로 유명하고 환경오염이 심각한 점은 처용포와 같다. 그러나 소설 속 처용포는 환경이 회복되어가는 중이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장생포는 그대로다.
“장생포는 여전히 방치되어 있어요. 매립된 땅은 터가면서 마르고 있고, 뒷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어요. 겨우 소규모 어업만 하는 실정이에요. 이러한 환경을 소설 속에서나마 회복시키고 싶었어요.”
10년 전에 썼더라면 환경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은 바뀌었다. 환경을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시간을 통해 얻은 지혜다.
콤플렉스 없는 요즘 세대 부러워
소설의 화자는 열일곱 살 소녀다. 성인이 되기 전 혼자 자립하는 모습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감정 등 많은 부분, 작가의 자전적 소설 「세월」과 겹쳐진다.
“특별히 그 시절을 생각한 건 아니에요. 열일곱이라는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았을 때 느꼈던 어떤 특별한 느낌, 그때의 정서를 유지하려고 했죠.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바탕은 똑같으니까요. 30년 전에 에밀 아자르가 쓴 14살짜리 아이 이야기를 읽으면 공감하거든요. 어린이의 원형, 소년의 원형이 있어요. 어른 같지도 않고, 아이 같지도 않은 그 원형적인 느낌만 살리려고 애썼죠.”
정서는 원형을 갖고 있다지만, 언어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언어는 세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자신의 언어를 인식하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
“글을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40대 후반의 언어가 나오는 거예요. 퇴고를 할 때 많이 고쳤죠. 쉬운 단어, 짧은 문장으로. 그 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간 다음에도 출판사로부터 ‘이건 너무 전문 용어예요, 이건 너무 어려워요’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열일곱 살의 김형경은 어떤 소녀였을까. 주인공 니은과 달리 전형적인 모범생이었지만, 분위기가 엄했던 학교 내에서는 평범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요즘 시대 젊은이들로 이어졌다. 굴곡진 역사를 경험했던 그에게 자유로운 요즘의 젊은이들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아이들을 보면 부러워요. 콤플렉스 없는 자유로운 세대잖아요. 우리 세대는 아직도 머릿속에 ‘국산품 애용’이라는 표어가 있어서 외제는 불편해요. 요즘에는 시위하면서 한 손에 ‘이명박 아웃’, 다른 손엔 에비앙 물병을 들고, 어깨에는 프라다 가방을 메고 있어요. 부러워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구나, 하고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믿음
소설에서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는 주인공을 돌보는 역할로 나온다. 혈육도 아닌 고향 어른들인 이들은 소녀의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 차리라고 화를 내지도 부담스럽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이는 그저 작가가 만들어낸 이상향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을 믿는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선량하고 서로 도움을 준다고 믿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면 경쟁하고 속여 먹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건 피상적인 현상이나 사건일 뿐이고, 본질로 들어가면 인간은 서로 돕고 살거든요. 그런 믿음이 있으면 세상사는 게 정말 편해져요.”
김형경은 그 기적의 산증인이다. 이번 소설을 쓸 때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그는 여전히 그 기적을 누리고 있었다.
“이유 없이, 별 기대 없이 선행을 베풀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꼭 언젠가는 돌아오는 거예요. 그것도 제가 딱 필요한 시점에요.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후배 중에 특별히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아이가 있어요. 친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생의 고비마다 저와 고민을 나누던 후배였어요. 어느 날 문득 후배가 공연에 오라는 거예요. 사실 그런 곳에 절대 안 가는데, 거기는 가보고 싶더라고요.”
한창 소설의 긴장 해소 부분, 즉 주인공이 새로운 삶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구상 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의 공연은 이 소설의 한 페이지에 그대로 담겨졌다.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를 단박에 속 시원하게 풀어준 이는 그가 오랫동안 상담해주었던 후배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다시 한 번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서로 돕고 산다는 것을 믿어요.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역시 세상은 그런 거예요. 이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의심하지 말고 한번 믿어보세요.”
우울증 이겨내고 더 좋은 삶 찾아
소설 「성에」,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에세이 「천 개의 공감」, 「사람풍경」에 이어 이번 소설 「꽃피는 고래」까지, 모두 그가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쓴 책이다. 이쯤 되면 정신분석학 전문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초반에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사회생활을 시작해보니 조직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 안에서 제일 튀었어요. 직장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심지어 사람들의 농담에도 웃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나는 저들과 다를까? 인간의 마음은 어떤 건가? 궁금해서 무작정 정신분석학 책을 읽기 시작했죠. 읽다 보니 제게 정말 문제가 많더라고요.”
책을 읽으면서 그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겉잡을 수 없이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나는 이제 괜찮아’라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삶이 멈추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우울증이었어요. 단순히 우울한 것이 아니라 정신상태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생체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었죠. 그런 날들이 몇 달째 계속됐어요.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죠.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았어요. 전문가 상담은 책으로 읽는 것과는 정말 달라요. 상담을 받으면서 인생을 완전히 다시 되찾았죠.”
김형경은 참 잘 웃는다. 유난히 많은 일을 겪은 그지만, 충분히 애도했기 때문인가. 그의 웃음소리는 티 없이 맑고 신선하기만 하다.
■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