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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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이었던 1982년, 유일한 직장인 출신 선수로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지만 ‘패전 전문 투수’로 불리며 1승 15패의 성적으로 물러났던 감사용. 2004년 개봉한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화제를 모았던 그가 최근 자신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야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의 인생 스토리.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추억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
감사용(52)은 아직까지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모자와 글러브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2년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 6개 구단 중 가장 마지막에 창단한 팀이다. 당시 그는 삼미종합특수강에 근무하며 직장인 야구의 매력에 빠져 있었다.

“`주위에서 이번 기회에 테스트를 받고 프로야구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몸담고 있던 야구팀 회원들이 ‘직장 야구에서 우승한 것도 있고 하니 충분히 합류할 수 있는 실력’이라며 힘을 실어줬죠.”

45일간의 동계훈련 기간 동안 배팅볼 투수를 자처하며 연습하던 그는 테스트를 받고 극적으로 팀에 합류했다.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한 언론의 평은 좋지 않았다. 언론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전체 구단 중에서 최약체다. 실업 야구 수준의 팀이다’라고 했다. 프로 구단에 들어가고 싶던 그에게 언론의 평은 중요치 않았다.

“`한 달이든 1년이든 삼미팀에서 주어진 역할에 따라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어요. 사내대장부답게 한번 해보자고 말이에요. 그런데 기쁨도 잠시더라고요. 선수 유니폼을 입고 3개월이 지난 뒤부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장거리 이동과 계속되는 경기로 체력이 고갈됐죠. 몸이 힘들다 보니 중간에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프로야구의 벽은 높았다. 아마추어 야구가 육상의 단거리 종목이라면 프로야구는 마라톤에 가까웠다. 아마추어 야구에 길들여져 있던 그에게 프로야구의 세계는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야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받는 연봉을 생각하면 적잖이 위안이 됐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몇 년 열심히 하면 결혼 자금도 마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각 팀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와의 경기를 승수를 쌓아올리는 호기로 여겼고, 우리 팀과의 경기에서 진 투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렸어요. 주위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삼미팀의 선수들은 진지했어요.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인천 시민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들에게 승전보를 전해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장애인 유소년 야구단 만드는 게 꿈
그가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자신의 야구 인생을 솔직하게 고백한 「슈퍼스타 감사용, 꿈과 도전 그리고 인생 이야기」(대경북스)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 개봉된 이후 제게는 늘 ‘슈퍼스타’라는 황송한 별명이 따라다녔어요. 어느 순간 ‘슈퍼스타 감사용’이 아닌 ‘인간 감사용’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인간 감사용이 어떤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요. 바보 같지만 우직하게 꿈을 향해 한길을 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말이에요.”

그가 15개월 동안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글에는 진해중학교에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담겨 있다.

경남 김해 외곽의 농촌에서 태어난 감사용은 어린 시절 야구에 매료돼 지금껏 야구만을 꿈꾸며 살아왔다. 메이저리거도 되지 못했고 10승 투수도 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했기에 부끄럽지 않다. 살아오면서 굴곡도 여러 번 겪었다. 하지만 그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경남 진해에서 장애인 유소년 야구단 창단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경남 지역의 장애우들을 대상으로 선수 모집을 하고 있어요. 몸은 조금 불편해도 야구를 통해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올가을쯤 되면 창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다음 목표는 제가 만든 장애인 유소년 야구단에서 한국 프로야구 선수가 나오는 거예요. 또 캄보디아, 몽골 등에서 야구를 통해 기독교 전도 활동도 하고 싶어요.”

야구 없인 살 수 없다!
현재 경남 진해에 살고 있는 그의 형편은 넉넉하지 않다. 간간이 대학 등지에서 특강을 해서 얻는 수입으로 월셋방에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식당을 운영하며 건실한 사업가로 자리 잡기도 했지만 외환위기 때 주식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은퇴하고 나서 마산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했어요. 장사가 제법 잘됐어요. 식당을 하면서 조금씩 여윳돈이 생기자 주식에 투자해 돈을 모아 큰 식당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손해를 보자 마음이 다급해지더군요. 나중에는 ‘본전’ 생각이 나서 주식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죠.”

주식으로 큰 손해를 보고 난 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는 그. 가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 주식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해준 것도 야구였다. 야구장에만 가면 모든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리라 결심했다. 지나가버린 일들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딛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2004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개봉 이후, 한줄기 빛이 비치는 듯도 했다. 국제디지털대학 야구팀에서 꿈에 그리던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대학에서 야구부를 창단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팀을 창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어요. 학교에서 어느 정도 지원과 후원을 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 측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죠.”

그러던 중 그는 ‘어차피 나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준비된 곳에서 시작하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에서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아도 제가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끄는 팀이 1승을 올렸을 때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어찌나 기뻤는지 몰라요. 창단 첫해 1승이라도 하면 학교에서 지원을 좀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만의 착각이었어요.”

학교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비를 선수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선수들은 식비를 낼 수 없었다. 선수들의 식비와 숙소 운영에 들어가는 경비 마련을 위해 감사용은 뛰어다녔다. 종국에는 경비 마련은 고사하고, 숙소를 마련하기 위해 받은 대출금의 이자를 갚지 못해 숙소마저 경매에 넘어가고 말았다.

창단한 지 1년 6개월 만인 지난해 3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팀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는 또 ‘1승 감독’에 그쳤다. 자존심을 많이 다쳤다. 그래도 야구를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저에게 야구만큼 소중한 건 없어요. 결과가 반드시 좋진 않더라도 스스로 떳떳한 게 더 중요하잖아요. 포기하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안 될 때일수록 노력하고, 더욱더 많이 두드려야죠.”


못다 이룬 꿈은 손자에게
자신은 1승 투수였지만 아들만큼은 10승, 아니 그 이상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는 감사용. 그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루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감인호(24)군이 세 살 되던 해부터 손에 플라스틱 야구 배트와 공을 쥐어줬다.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슈퍼스타’ 감사용의 야구를 향한 꿈과 도전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직접 야구를 가르쳤어요.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는 매일 새벽마다 함께 운동을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되던 무렵, 아들의 공을 받아보니까 묵직하니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무릎 부상으로 뼈가 부러진 거예요.”

그때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암투가 시작됐다. 아버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아들은 달랐다. 무릎에 깁스를 하고 3개월, 재활하느라 3개월. 그렇게 6개월을 야구와 떨어져 지낸 아들은 폭탄선언을 했다.

“어느 날 아들이‘야구를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야구를 사랑하시지만 저는 포기합니다. 야구에 대한 미련도 없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를 아들이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연습시키곤 했는데, 그게 아들을 힘들게 한 건 아닌가 싶어요. 한때는 야구하기 싫다며 반항하기도 했거든요. 그걸 이해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다그치면서 상처를 줬으니….”

결국 아들도, 아버지도 꿈을 접고 말았다. “많이 아쉬울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어요. 손자한테 가르쳐야겠어요”라며 웃는다.

인터뷰 말미, 그는 세상이 그를 ‘패전 전문 투수’로 기억하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저도 사람인데 ‘패전 전문 투수’라고 불리는 게 좋지만은 않죠. 야구에서 패전 전문 투수가 어디 있어요. 야구에는 그저 구원투수만 있을 뿐이죠. 사실 패전 처리 역할은 피할 수도 있었어요. 패전 처리 투수가 필요할 때면 동료 선수들은 다들 감독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나 화장실을 가곤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팀이 요구하면 던지는 게 투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냥 열심히, 묵묵히 할 뿐이었어요.”
그때 당시 간혹 가다 불만이 솟구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가끔 ‘왜 또 내가 이걸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막상 투수판만 밟으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는 거예요. 혼신의 힘을 다해 던졌어요.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요. 누구나 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슈퍼스타라고 생각해요.”

그의 인생에서 야구는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야구 자체가 그의 인생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좋은 걸 어떻게 해요(웃음). 어쩔 수 없어요. 그냥 우직하게 밀고 나갈 겁니다.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하니까요.”

감사용은 올여름 인근 양덕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 야구교실’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라도 달려갈 생각이라는 감사용. 그의 야구 사랑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모양이다.

글 / 김민정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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