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꿈만 꾸던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가정부와 운전사까지 고용하고 각종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살아도 한 달에 백만원이면 된다. 필리핀 얘기다. 하지만 언론에 공개된 성공사례가 은퇴 이민의 전부는 아니다. 그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인생을 정말 치열하게 산 어르신이 있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돈도 많이 벌었죠. 연세가 육십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조용한 곳에서 책도 읽고 내 삶을 글로 쓰면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필리핀 수빅 지역에 통유리로 된 콘도를 구입하셨어요. 해변에 있는, 정말 낙원 같은 곳이죠.”
은퇴 이민을 결심한 60세 남성의 예다. 결과는 실패다. 한 달 후에 홍정렬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미치겠다, 우울증 걸릴 것 같다. 매일 보는 바다와 갈매기도 지겹다’는 하소연이었다. 일에서 자유로워진 후에는 자신만 남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르면 지상낙원도 한 달 만에 질린다. 홍정렬 부장은 필리핀 은퇴청(Philippine Retirement Authority) 공식 마케터 (주)락소에서 은퇴 이민 전반에 걸친 교육, 답사 및 조언과 진행을 담당한다.
“막연하게 꿈꾸고 있는 은퇴 이민 이후의 삶이 정말 자신과 맞는 삶인가, 그것을 상기시키고 준비하는 작업이 반드시 선행돼야 성공적으로 은퇴 이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쉬고, 골프 치고…. 그것도 매일 하면 지겨워요.”
골프와 유흥이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마냥 한가롭게 정의하면 안 되는 이유다. 실상은 생각처럼 여유롭지만은 않다. ‘삶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는 과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해외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먼저 다양한 설명회에 참여해보는 게 첫 번째 단계다.
“동남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 다양한 나라가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을 정하려면, 설명회를 권합니다. 어디가 좋더라는 얘기에만 의존하면 왜곡되기 쉬워요. 가고 싶은 나라를 정하고, 그 나라에 대해 공부하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른들의 삶은 ‘살고 싶은 삶’보다는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 의무적인 삶을 살았고, 어느 정도 성공한 은퇴자들은 기존의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머릿속에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파라다이스’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먼저 자신을 찾아가는 노력을 하셔야 해요. 계획 없이 이주한 후에 지나치게 여흥에 집중하는 것도, 그렇다고 새로운 돈벌이에만 집중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 어딜 가든 돈을 벌면서 사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런 경우는 은퇴 이민이 아니라 그냥 ‘이민’이죠.”
은퇴 이민 과정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한국에서 할 수 없었던 호화로운 생활을 상상하고 막연히 떠나는 경우는 현저히 줄었다. ‘귀족처럼 살고 싶어서’ 선택한 은퇴 이민은 이제 ‘제2의 도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됐다. 은퇴 후에도 삶은 이어진다.
“실제로 저희는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일단 설명회에 참여하고, 흥미가 생기고 재미를 느끼면 현지답사를 갑니다. 일주일 정도를 돌아보죠. 전문가의 안내를 받습니다. 현지를 느껴보고 재미가 없으면 안 가면 됩니다. 하지만 어느 지역이 마음에 든다면, 그다음은 보름 정도 하숙을 하면서 직접 겪어봅니다.”
집을 사기 전에, 하숙을 경험한다.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도 만나보고, 골프와 현지 음식을 즐기면서 ‘놀아보기도’ 한다. 체험이 중요하다. 필리핀의 경우, 한 달 하숙 비용이 70만~80만원 정도다. 비용에는 세 끼 식사와 청소, 빨래가 포함된다. 느낌이 좋으면 하숙을 연장할 수도, 익숙해지면 월세로 전환할 수도 있다. 확신이 생기면, 그때 집을 구입하고 ‘은퇴 이민’을 결정하면 된다.
“단계적인 접근이 중요합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예요. 막연히 경치가 좋고 레저를 즐길 수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들을 구체화해서 풍요롭게 삶을 이끌어가는 차원이죠. 사실 그런 삶은 한국에서도 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도전하는 자세’입니다. 돈을 많이 쓴다고 행복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웃음).”
한국보다 물가가 싼 동남아 지역에서는, 있는 만큼 쓸 수 있는 게 사실이다. 필리핀의 경우 대졸 초임 월 급여가 한국 돈으로 23만원 정도다. 한 달에 20만원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동남아 특유의 낙천적인 국민성과 영어를 쓴다는 장점은 한국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한국인에 비해 작은 동남아 지역 사람들의 체구도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무래도 어르신들이 편하게 접근하기 쉬운 지역입니다. 동남아인들은 감사하고 순종하는 것에 익숙해요. 하지만 영어를 배우는 과정이나 현지 커뮤니티에 적응하는 과정, 사회생활 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게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돼야 합니다.”
생활비는 얼마나 들어요?
“필리핀으로 가시는 경우의 실질적인 수치를 말씀드릴게요. 필리핀에서는 전세가 거의 없어요. 거주 비용을 제외한 부부 평균 한 달 생활비로 백만원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정부 한 명, 운전기사 한 명을 고용할 수 있어요. 한국 식당에 자주 가시면 비용이 좀 초과되겠죠(웃음). 현지 한국 식당의 식대는 한국과 같거든요.”
백만원짜리 월세에 살면 한 달 생활비로 2백만원이 든다. 지역별로 차이가 크지만, 지방으로 가면 백 평이 넘는 집에서 살 수도 있다. 서울의 강남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자 한다면 비용이 조금 올라간다. 월세 1백40만~1백50만원이면 약 1백 평에 1, 2층을 합쳐 실 평수 70평 정도의 집에서 살 수 있다. 방은 여섯 칸 정도다.
“만약 은퇴 이민 비용으로 5억 정도가 있다면 월 2백만원을 쓴다고 했을 때 20년을 아무 경제활동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투자’를 추천하진 않지만, 집을 구입하신다면 월세로 2백50만~3백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어요. 연 7% 정도의 수익이 나는 거죠. 5억에 7%면 3천5백만원 정도니까, 그걸 생활비로 삼아 원하는 지역에 살 수 있습니다. 아주 심한 거품이 아닌 이상 가격이 내려가지는 않으니까요. 보수적인 접근으로 부동산을 권하는 경우도 있죠.”
세금과 생활비 등의 현실적인 사항들,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문제를 충실하게 고려해야 안정적인 현지 생활을 할 수 있다. 믿을 만한 에이전트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가 생겼을 때 효과적인 조언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퇴 이민을 실행한 후에는 현지에서의 인적 네트워크도 중요하다. 교민사회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현지인과 관계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조심해야 할 것은 ‘돈 자랑’이에요. 많은 분들이 은연중에 재력을 과시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친구도 늘고 관심을 많이 받지만, 현지에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분쟁이나 시기의 대상이 되기 쉬워요. 현지인을 존중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겠죠.”
은퇴 이민은 일종의 로망이다. 지친 노년을 평화롭게, 때론 호사롭게 보낼 수 있다는 희망과 외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매력이 계획 없는 은퇴 이민을 부추겼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사례는 이제 타산지석이 된다. 신중한 접근과 철저한 준비가 성공적인 노후를 보장한다.
■글 / 정우성 기자 ■사진 / 필리핀 은퇴청 공식 마케터 (주)락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