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가의 아내로 살아온 27년, 해가 갈수록 기도가 많아집니다”
‘내조의 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남편의 출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내들의 눈물겨운 스토리가 기가 막힌 한편, 그 마음과 정성만은 모든 아내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행정가의 아내로 27년을 살아온 박성효 대전광역시장의 부인 백기영씨의 내조에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들어 있다. 봄볕 가득한 4월 어느 날 대전에서 만났다.
시장 남편만큼 지역사회 잘 아는 대전 토박이
“지난 용산 참사를 계기로 ‘무지개 프로젝트’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가 너무 극단적인 개발논리에 매몰돼 왔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사업이에요. 오래되고 낡은 것은 모두 없애버리고 크고 높은 새 건물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웃들과 좀 더 조화로운 삶을 살자는 거죠. 기존에 살고 계셨던 분들의 생활터전을 최대한 유지한 채 골목길 벽을 밝게 색칠하고 알코올 상담센터, 청소년 방과후 교실, 복지관, 공부방, 보육시설 등도 운영하고 있는데 주민 분들도 지역사회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시는가 봐요. 자발적으로 참여해주세요.”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무지개 프로젝트를 벤치마킹 중이라고 설명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행정가의 아내로 27년을 살다 보니 행정가가 다 됐다. 이제 웬만한 대전시 정책사업에 대해서는 전문가에 버금갈 정도니 ‘시장 부인답다’는 말이 아깝지 않다.
대전에서 나고 자란 박성효 시장은 30년 전 대전시 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딘 후 단 한 번도 대전시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정통 지방관료 출신이다. 두 차례의 경제국장과 역대 최장수 기획관리실장, 정무부시장을 역임하며 경제·기획 행정가로 활동하다 지난 2006년 민선 4기 대전시장에 선출됐다. ‘대덕밸리 전도사’, ‘서비스행정의 달인’, ‘대전 경제 전문가’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전 행정에 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대전 전문가인 그는 가장 역동적인 대전 시정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무관 시절부터 워낙 일에 열정적인 남편이었기에 시장 선출 후 더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쁘게 일하는 남편이 그저 안쓰러운 게 아내의 마음이다. 가족만큼이나 지역사회를 돌봐야 하는 것이 남편의 일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마음을 비웠다.
그녀도 이전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많아졌다. 매일 아침 신문과 뉴스를 꼼꼼히 챙기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 행사나 봉사활동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숫기가 없어서 주변 분들이 많이 걱정하셨는데 조용히 힘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 같아요. 남편에게도 직설적이기보다는 돌려 말하는 편이에요. 뭐든지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부드럽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게 내조라면 내조예요.”
두 번의 인연, 결혼 통해 배운 조화로운 삶
남편 박성효 시장과 네 살 차이인 백기영씨는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던 시절 충남대학교 축제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남편은 제 친구 파트너로 왔고 전 다른 사람의 파트너였어요. 서로 인사만 하고 헤어졌는데 대학교 3학년 때 제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한 자리에 나가보니 축제 때 만났던 그 사람이더라고요. 솔직히 제 이상형은 아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한두 번 만나다 보니 굉장히 부드럽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한번은 시외버스를 타고 부여로 데이트를 갔어요. 돌아오는 차에서 제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남편이 버스 커튼을 쳐주더라고요. 그 세심함에 마음이 흔들렸죠. 가끔 남편이 그 버스에 커튼이 없었으면 자기는 장가를 못 갔을 거라고 해요(웃음).”
두 번의 인연으로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이지만 마냥 기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당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내무부에서 수습 중이었던 박 시장은 공군장교로 입대했고 결혼 후 교사생활을 그만둔 그녀는 교사 봉급의 3분의 1정도였던 남편 봉급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어요. 그때는 학교에 들어갈 때 결혼하면 그만둔다는 각서를 썼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남녀차별이죠. 3월에 들어가서 10월에 결혼을 했으니 채 1년도 있지 못했던 거예요. 어릴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도 좋았는데 무척 아쉬웠죠.”
결혼 후에도 사회생활을 하고 싶었던 그녀이기에 교직을 그만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신혼 초 시댁에서 산 3년 동안 “시집살이는 안 했냐”고 묻자 “시집살이라는 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시집살이”라며 웃는다.
“사실 종교적 갈등이 있었어요. 시댁은 불교였고 저희 집은 기독교였거든요. 결혼할 때도 반대가 있으셨는데 서로 이해했죠. 그런 갈등이 우리 두 사람이 살아갈 인생에 놓여 있다면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극복했고 조화를 이루게 되더라고요.”
사람은 괜히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고, 결혼은 괜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자기중심이었던 개인에서 벗어나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며 비로소 성숙해지는 것을 느꼈던 경험이다.
공직자의 아내, 자폐아의 엄마…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
“처음에는 아이가 기억력이 좋아서 머리가 굉장히 좋은 줄 알았어요. 단순 기억력은 굉장히 좋은데 말이 늦어서 병원에 가보니 자폐라고 하더군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기분을 아세요?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원망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원망만 하며 절망 속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반 초·중·고등학교로 보냈지만 늘 가슴이 조마조마해 편안하게 잠들어본 적이 없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특수교육 시설이 없는 일반 학교에 가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에요. 얻는 것도 있고 잃는 것도 있죠. 또래 아이들과 같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교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반 교육에서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 아이의 경우 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 고용단지에서 일을 했는데 그동안 일반 사람들과 지내왔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환경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간의 가슴앓이를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세 가족은 영화 ‘말아톤’도 함께 보지 못했다. 같이 보면 너무 많이 울 것 같아서 따로따로 봤다고 한다.
“남편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꼭 목욕탕에 데리고 다녔어요. 지금도 주말이면 둘이 유성으로 목욕하러 가요. 일 때문에 항상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안쓰러운가 봐요. 한번은 목욕을 다녀와서 ‘용현이가 나보다 키가 더 크다’며 뿌듯해하더라고요. 지금은 보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사무실까지 버스를 두 번 타고 가야 하거든요. 처음엔 버스를 어떻게 탈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젠 제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해요. 용현이는 하늘이 저희에게 준 시련이자 축복이에요. 지금은 무척 감사해요.”
장애아를 가진 엄마이기 때문인지 대전시에서 진행하는 장애복지 관련 정책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최근 짓고 있는 장애아재활지원센터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다.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요. 솔직히 말해 제 아들도 마음에 드는 작업장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성인이 된 장애인 분들을 위한 시설이 더 많이 생겨야 해요. 지역적으로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장애우 복지센터가 네트워크화되면 전국의 많은 장애우 가족들이 정보와 어려움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국가적으로 예산을 편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시장 부인이 아니라 장애아를 가진 부모로서 대전시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항상 눈여겨보고 있어요.”
힘들었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에 간간이 미소가 어린다. 공직자의 아내, 자폐아의 엄마,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이었기 때문이란다. 처음 아이를 위해 했던 기도에 지금은 남편과 대전 시민들을 위한 기도가 더해졌다. 날이 갈수록 기도할 것들이 많아진다.
“올가을에 대전에서 큼직큼직한 행사가 많이 개최돼요. 10월 전국체전과 같은 달 열리는 국제우주대회, 첨단 의료복합단지 유치까지 남편이 바빠진 만큼 저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요. 시민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고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있는 일을 성실히 치러서 남은 1년 임기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훈, 대전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