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g 카메라 메고 세계곳곳 누비는 카메라 기자들의 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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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뉴스 현장을 누비는 SBS-TV 카메라 기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세상을 비추는 ‘카메라’의 이야기, 그리고 그 카메라를 어깨에 짊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인치 프레임 안에 세상의 슬픔과 고통, 행복과 희망을 담아내는 그들의 카메라를 기록한다.


12kg 카메라 메고 세계곳곳 누비는 카메라 기자들의 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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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뜨겁게 달려간다
만약 사람이 살아가며 보고 듣고 겪는 순간들을 색으로 구성한다면 카메라 기자들은 무지개보다 훨씬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졌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도 마주하기 힘들 극적인 순간들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먼저 듣고, 먼저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비고, 불길이 치솟는 화재 현장에 뛰어들고,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나 오열하는 감동을 함께하고, 결승골이 골네트를 가르는 찰나의 환호를 맛보는 ‘특별한’ 경험이 이들에게는 일상이 된다. 세상의 온갖 극적인 순간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카메라 기자들의 ‘리얼’한 일상은, 펄떡이는 한 편의 드라마다.

“카메라 기자는 반드시 현장을 담아야 하니까 어떤 위험한 상황이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저도 아찔했던 순간을 여러 번 겪었어요. 한번은 이라크전 보도를 위해 파키스탄 국경 근처에서 아프간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하던 중 무장한 군벌 세력에게 위협을 당했어요. 가까스로 도망쳤는데, 무사한 뒤에도 같이 있던 취재 기자는 며칠째 악몽 때문에 잠을 못 이루더군요. 요르단에서 바그다드로 넘어갈 때는 외신을 비롯해서 전 취재진이 차를 타고 가는데 제 앞 차가 총알을 맞았어요. 그 총알이 충분히 저한테 날아올 수도 있었겠죠. 어쩌면 저는 그 때부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도 몰라요. 요즘도 그 때를 떠올리면서 항상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했던 조정영 기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카메라 앞뒤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쏟아졌다. 우쭐하는 마음에서 늘어놓는 허풍 섞인 무용담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살 떨리는 취재 현장을 비롯한 각종 사건사고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12kg의 카메라를 어깨에 멘 채로.

“여기 있는 사람뿐 아니라 카메라 기자라면 시체라든가 참혹한 사고 현장 한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겠죠. 보도가 되든, 안 되든 사고가 나면 우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야 하니까요.”

간혹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해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상황이 눈앞에 닥치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저 찍어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기에 허리만 남은 시체 옆에서 김밥을 먹으며 하루 종일 버티고, 장갑도 끼지 못한 채 몇 시간씩 남극 촬영을 하고,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흔들리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지진이 계속되는 도시에 남아 카메라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들이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기도 한다.

“끔찍한 장면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를 써요. 시체 수습 장면을 찍을 때 봤던 하얗게 서 있던 10여 구의 시체가 그 뒤에도 계속 꿈에 나타나고 그랬어요. 다른 방송국 선배는 후유증 때문에 병원도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당장은 괜찮더라도 한창 일할 때 겪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거나 몸이 약해졌을 때면 불쑥 겉으로 나오기도 해요. 정신적으로 괴롭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요. 동료 중에는 어느 순간부터 비행기만 타면 사고 현장이 떠올라 못 타게 된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그 어떤 참담하고 위태로운 현장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은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카메라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취재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정확한 사실만 보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 대신 사람의 주검을 낚아 올리는 우간다 어부들을 보면서, 무너진 건물 밑 아이의 시신을 보고 울부짖는 엄마의 뒷모습을 쫓으며, 돈 대신 공부할 수 있는 연필을 달라는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그렁그렁한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그들은 냉철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12kg 카메라 메고 세계곳곳 누비는 카메라 기자들의 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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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취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태어나서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려본 건 처음이었어요. 워낙 안타깝고 불쌍한 장면을 많이 봐서 담담할 줄 알았는데, 가족들이 만나서 부둥켜안고 울 때만 해도 괜찮더니 마지막 날 헤어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참기 힘들더라고요. 촬영은 해야겠고, 렌즈가 부옇게 되도록 울면서 따라 뛰었지요.”

“정말 피하고 싶은 건 장례식장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위로는커녕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할 때,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모든 언론이 취재하지 않기로 정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누군가의 슬픔을 전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버겁고 괴로운 일이다. 때로는 그 잔인함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카메라가 울고 있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고, 그렇게 믿기에 뭉클해진 카메라를 다독인다.


세상의 중심에서, 더듬이를 세우고
세상사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건이란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이기에 카메라 기자들은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항상 현장으로 달려갈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저녁 때 걸려온 전화에 다음날 아침 떠나야 하는 해외 출장 소식을 듣는 것 정도는 무난한 수준에 해당한다.

“퇴근 후라 해도, 쉬는 날이어도 큰 일이 터졌다 하면 모두 반납이에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있다가도 갑자기 전화가 와서 일하러 가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집이 회사와 가까워서 자주 불려 나갔죠(웃음).”

“사실 개인 생활을 하기가 좀 힘든 부분이 있어요. 올해로 6년째 일하고 있는데 아직도 개인적인 저녁 약속은 쉽게 못 잡아요. 일찍 퇴근하라고 하는 날에도 괜히 ‘혹시’라는 생각에 남아 있게 된다니까요.”

따지고 보면 늘 바쁘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근무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고 주말에 일을 하면 평일에 쉴 수도 있다. 또, 그렇게 힘들고 중요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므로 보통 때는 여느 직장인들처럼 생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유롭고 규칙적인 생활은 포기하게 된다.

“입사 초기에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바쁘기도 하고 짬이 나도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 보니까요. 상대방 입장에서는 마냥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서운할 때도 많을 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힘들어요.”

결혼을 한 기자들의 경우에도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불평없이 일의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가족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다.

“아내나 아이들이 포기하고 사는 부분이 많죠. 연애할 때는 서운해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어떻게 일하는지 확실히 아니까 아내가 잘 맞춰주더라고요. 작년이 결혼 10주년이었는데 하필 기념일에 해외 출장을 갔거든요. 그런 것들도 당연하게 여겨주는 아내가 정말 고맙죠. 평소에 잘 못해주니까 그런 부족한 부분들을 다른 데서 채우려고 저도 많이 노력해요.”

특히 남들이 다 노는 공휴일이나 명절에는 반대로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제대로 시간을 갖는 경우가 드물다. 입사 후 10여 년 동안 한 번도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카메라 기자로 살아가는 지금이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입을 모은다. 조금의 꾸밈이나 거짓 없이 2인치의 프레임 안에 정직한 세상을 담고 누군가의 삶을 투영하는 카메라의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12kg 카메라 메고 세계곳곳 누비는 카메라 기자들의 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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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젊을 때로 돌아가더라도 이 일을 선택할 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이를테면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점심을 먹고 또 저녁에는 깊은 산골 탄광촌에서 일하는 분들과 숟가락을 들 수도 있겠죠.”

한 군데 갇혀 있지 않고 드넓은 시야와 안목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일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카메라 기자만의 매력이다. 주변에서도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언제나 더듬이를 세워야 한다는 어려움도 있지만, 반대로 예측할 수 없어서 항상 현재에 열정을 바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머무르지 않고 매일 새로운 삶을 사는 즐거움도 그들을 다시 뛰게 하는 큰 힘이 된다.

“무엇보다 항상 현장의 중심에 있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그것이 흘러가는 한 개인의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고, 세상이 뒤집히는 역사의 현장일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카메라는 그 순간을 담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현장에 서 있을 수밖에 없고, 차가운 카메라로 뜨거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을 할 때면 가슴이 뜁니다.”

진실 되고 정확한 취재를 위해 냉철한 이성을 견지해야 하는 기자와 차디찬 무생물인 카메라. 하지만 그 기자와 카메라가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은 우리를 웃음과 눈물로, 그리고 한 걸음의 행동으로 이끈다. 순간을 가둬 영원을 만드는 그 작업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에 카메라 기자들은 오늘도 망설임 없이 현장으로 뛰어든다.


카메라 기자들이 소개하는 카메라 속 이야기 1

눈물로 담은 사할린

1992년 9월 29일 오전 6시, 김포공항을 떠나 40여 분이 지나니 은빛 날개 아래로 푸른 동해가 펼쳐진다. 50여 년 전에 저 뱃길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눈물을 뿌리며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으리라. 이렇게 두세 시간이면 되는 거리를 50여 년 만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1944년 강제징용으로 동토의 땅 사할린까지 끌려와 눈이 짓무르도록 고향을 그리워하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오는 그들. 취재는 그들의 귀국길을 동행하는 것이었다. (중략)

영구 귀국을 신청한 노인들이 하나 둘 청사 옆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옆 공항 철조망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가족들과 친지들이 철조망 위까지 올라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거의 절규에 가까운 통곡 소리로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반세기를 살며 그곳에서 낳은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만 하는 노인들의 흉리와, 같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자손들의 두 마음이 공항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영원한 안녕을 고하고 있는, 또 다른 이별을 낳는 현장에서 나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파인더 안과 밖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포커스를 맞출 수가 없었다.

수많은 사건사고 현장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시신들도 수없이 보아왔지만 결코 울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생이별을 해야 하는 새로운 이산의 현장에서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며 한동안 소리 없이 울어야만 했다. 촬영을 하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파인더 안에 습기가 차 렌즈가 뿌옇게 돼 수시로 닦아줘야만 했다. 철조망에 매달려 절규하는 이들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등 뒤로 내게 부탁하는 한마디 말이 전율을 느끼게 한다. “울 아버지 잘 모시소. 알았지요? 알았소?”

12kg 카메라 메고 세계곳곳 누비는 카메라 기자들의 진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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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이 성성하고 제대로 걸음도 떼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휠체어에 링거 병을 달고 트랩을 오르는 할머니, 그리고 그들의 남은 가족들은 생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왜 이들을 다시 갈라놓는가? 이산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가 하는 이 일은 과연 옳은 것인가? 또 다른 이산의 현장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왔는가? 기자라고 현장에 충실한 역사의 기록자이기만 하면 되는가?

출장 취재는 톱뉴스로 정리가 되어 잘 나갔으나 내 마음은 지금껏 정리가 되어 있질 않다. 그때 모시고 온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셨는데 지금은 몇 분이나 살아 계시는지. 혹 후회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 여생 행복하셔야 할 텐데….


카메라 기자들이 소개하는 카메라 속 이야기 2

세상에서 가장 슬픈 특종
기자에게 특종은 마약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실을 내가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리는 특종! 그것을 위해 카메라 기자들은 12kg이나 되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오늘도 뛰는지 모른다. 기자들에겐, 특종은 3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상이 업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실력 못지않게 운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내게도 그런 특종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특종은 슬프디슬픈 것이었다.

2008년 설 명절 끝자락 편안한 마음으로 뉴스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략)

크레인이 좌우로 움직이며 곧 우당탕 소리와 함께 숭례문 현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레코딩 불빛이 들어온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보면서도 “아…”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숭례문’이라고 쓰여진 국보 1호의 현판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 내 카메라에 선명하게 잡혔다. 그때는 그 장면이 특종인지도 몰랐다. (중략)

악몽 같은 밤을 보내고 전소된 모습으로 비참한 아침을 맞는 숭례문을 보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지난밤 내내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내 마음은 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기록하고자 하는 카메라 기자의 의무감으로 꽉 차 있었지만 너무나 소중한, 그래서 당연히 여겼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과 같은 아쉬움과 허무함은 무척 컸다. 게다가 현장에 있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길이 숭례문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안타까움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회사에 들어가니 숭례문 현판이 떨어지는 순간을 찍은 나의 촬영 화면이 특종이란다. 기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목숨 거는 바로 그 특종 말이다. 다들 우왕좌왕하다 보니 다른 언론사에서는 아무도 찍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을까.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은 이 슬픔은 무엇일까.

우리가 하는 일, 즉 카메라 기자라는 직업은 마음이 굳센 사람이어야 잘 해낼 수 있다. 대형 화재나 교통사고와 같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현장에서도 또 유가족 취재와 같은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슬픈 현장에서도 카메라 기자는 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재난 지역에선 구조보다 촬영이 먼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손수건을 건네주기보다 카메라를 들이대야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일이다. 그래서 마음이 굳세야 하고, 때론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의 한가운데서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에 나는 내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비록 숭례문은 아쉽게 떠나보냈지만 그 마지막 모습이라도 곁에서 기록할 수 있어서 국보 1호를 잃은 슬픔이 조금은 위로가 됐던 것처럼 말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SBS 카메라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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