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50만 부나 팔린 베스트셀러 그림책 「돼지책」의 작가 앤서니 브라운. 그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기 있는 그림책 작가다. 생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그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효과적인 독서 방법에 대해 들려주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62)의 「돼지책」의 내용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 가족에게 소외받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나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제목처럼 ‘돼지’가 되어버린 아들과 아빠도 재미있고, 벽지나 벽난로 장식, 연필꼭지, 문고리 등에 나타난 돼지의 얼굴은 익살스럽다. 이런 매력이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공감하며 빠져들게 한다. 그가 한국 엄마들이 뽑은 ‘가장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1위’인 이유다.
얼마전 앤서니 브라운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직접 만난 그는 ‘그림책 작가’ 하면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백발이 섞인 약간 긴 듯한 머리, 인자한 목소리와 미소, 맑은 눈을 가졌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림 완성 놀이로 상상력 키운 어린 시절
항상 동심 속에서 살아갈 것 같은 어른 앤서니 브라운의 유년 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한 살 반 많은 형과 때론 친구처럼, 때론 경쟁자처럼 자랐다.
“1년 반이라는 나이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지요. 형은 나보다 키가 컸고, 뭐든 잘했어요.그런 형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제 책 「고릴라」를 보면 작은 침팬지 윌리가 나와요. 윌리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고릴라들의 세계에 살고 있죠. 바로 그 윌리가 유년 시절의 저를 반영하는 게 아닐까 해요. 전반적으로는 행복한 유년 시절이었지만 형과 경쟁하며 자랐으니까요.”
형과 했던 수많은 놀이 중 그를 지금의 그림책 작가로 자라게 한 게임이 있다. 바로 ‘셰이프 게임’, 즉 그림 완성 놀이다. 종이 위에 의미 없는 도형 하나를 그리고 그 도형을 바탕으로 그림을 릴레이로 이어 그리면서 의미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게임이다. 그는 즉석에서 울퉁불퉁한 원을 그렸고, 그 원을 바탕으로 고릴라를 완성해 보였다.
그는 “셰이프 게임의 핵심은 창의성”이라고 강조했다. 무의미한 형태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생각주머니가 꿈틀대고,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중심 개념을 잡고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자신만의 버전으로 만드는 과정인 거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모두 마찬가지예요. 나무 하나 그리더라도 무모한 형태부터 완성하는 것이 좋아요. 백지에 우리의 생각을 반영해 변형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도 어린 시절 그림책이나 동화를 읽으며 자랐다. 가장 좋아했던 그림책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받았죠.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림을 보면서 강렬하고 감성적인 호소를 느꼈어요. 어린 시절 이 책을 정말 여러 번 읽었고, 그 덕분에 제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이 책에서 초현실주의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운이 사랑하는 고릴라, 아버지를 닮아
그의 그림책에서 가장 자주 만날 수 있는 동물은 바로 고릴라나 침팬지다. 그가 그리는 고릴라는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고양이와 좋은 친구가 되어 놀기도 하고, 명화 속 주인공이 되어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한다.
“고릴라는 흥미로운 대상이에요. 얼굴 주름을 봐도 그렇지 않나요?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자주 그리는 편이에요. 고릴라의 눈은 사람의 눈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어떤 때는 고릴라 안에서 사람이 숨어서 밖을 내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고릴라는 그에게 꽤 흥미로운 대상이지만, 그가 고릴라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릴라와 닮았던 것.
브라운에게는 고릴라에 관한 재미있지만 꽤 위험했던 일화가 있다. 그가 실제로 방송 촬영을 위해 고릴라 우리에 들어갔다가 고릴라에게 물린 사건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억이지만, 잠시나마 고릴라들이 그를 자신과 비슷한 동족으로 여기고 킁킁 냄새를 맡고 머리카락을 헤집어 이를 잡아주는 등 친밀한 행위를 보여준 것은 매우 특별한 기억이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아직도 고릴라가 좋지만 앞으로 고릴라 우리에 들어가지는 않겠다”며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소개하곤 한다.
그는 이번 내한에 인형처럼 예쁜 딸과 동행했다. 그의 아버지가 고릴라와 같은 이미지였다면, 그는 어떤 아버지일까? 「돼지책」의 아버지와는 얼마나 비슷한지 물었다.
“「돼지책」은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을 반영해서 그린 작품이에요. 저도 그 책의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직까지 책 속의 아빠와 ‘똑같다’는 말은 못 들었네요(웃음). 아마 아버지 세대가 반영된 건 아닌가 생각해요. 저는 그림책의 아버지처럼 개인적이지는 않고, 남을 배려하기 위해서 조심하는 편이에요. 그러나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겠죠.”
그의 아이들은 그림책 작가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그림책을 많이 읽고 자랐다.
“제 아이들도 저처럼 그림을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면 스튜디오로 찾아와 제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곤 했어요.”
아이와 책을 읽을 때 대화 나누는 것이 좋아
그는 한국을 방문해서도 느끼는 점이 있다. 어느 나라 아이들이든 느끼고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감정이나 두려움, 걱정은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특별히 상대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에게는 똑같은 존재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해하지 못하겠지’라는 짐작으로 쉽게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웃게 하고 싶어요.”
특별히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지 않는 앤서니 브라운.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쓸 때 처음부터 아이들의 생각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직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담긴 스토리를 완성하고 작업하는데, 이 과정에서 어릴 때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나게 된다. 그의 작품은 친구들끼리의 우정이나 아름다운 동심의 이야기도 있지만, 어른들의 세계도 가감 없이 드러난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공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을 쓰면서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읽는 책이 되길 바랐어요. 부모님 사이의 불화나 엄마의 고통 등 여러 에피소드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각각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요. 저는 보면 볼수록 깨달을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다양한 면을 넣으려고 노력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런 깨달음이 있잖아요. 제 그림책을 통해 그런 반응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들이 더 많은 책을 읽기를 원한다. 이는 세계 어디를 가도 공통적인 고민일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책을 통해 아이와 부모가 소통하기를 바란다.
그림책 작가가 추천하는 좋은 그림책은 어떤 것일까? 그는 매우 난감해하더니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같이 있지만 개별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책이에요. 글과 그림 사이의 간격을 독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메워갈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계속 그려나가라”고 강조했다. 자신이 작가가 된 것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그림을 그리지만 어른이 되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다른 어른들과 제가 다른 점은 계속해서 그렸다는 점입니다. ‘셰이프 게임’을 계속하라고 말을 하고 싶어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거예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한 대상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유년 시절의 놀이들과 멀어지면서 사고가 경직되어간다. 오랜만에 종이와 펜을 꺼내들고 무엇이든 그려보는 것이 어떨까.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이성원, 웅진주니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