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재능을 적극 키워준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의 어머니

아들의 재능을 적극 키워준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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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여사 “넉넉지 않은 형편 탓에 더 뒷바라지 못해줘 미안할 뿐
늘 최고의 연주 들려주는 아들이 자랑스러워요”


독주와 실내악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성신여대 기악과 교수인 피호영. 그에게는 평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은인이 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희생과 인내로 지금의 그를 만든 어머니, 김소희 여사다.


아들의 재능을 적극 키워준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의 어머니

아들의 재능을 적극 키워준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의 어머니

2009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인 김소희 여사(70). 그녀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성신여대 기악과 교수인 피호영(49)의 어머니다. 여덟 명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 중 최연소였던 김소희 여사는 7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센스 있는 패션 감각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는데, 그 모습에서 남다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 공부는 부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김소희 여사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소감을 묻자 “아들이 어려서부터 착실했고, 시키는 대로 잘 따라준 덕분에 지금까지 온 것 같다”며 아들에게 공을 돌렸다. 어머니의 말에 아들이 웃으며 말한다.

“어머니가 지금은 연세 드셔서 조용히 살고 계시지만, 제가 한창 공부할 때는 전국에서 내로라할 만큼 열성적으로 뒷바라지해주신 분이었어요.”

아들 곁에는 늘 어머니가
피호영 교수는 성악에 재능이 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KBS 부산어린이합창단에서 활동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자신의 희망에 따라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촌 형들이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를 켜는 모습을 보고 자란 그에게 바이올린은 지극히 익숙한 악기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이 나타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케스트라 지도 교사는 그에게 남다른 소질이 있다며 본격적으로 바이올린 배우기를 권했고, 바로 부산시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김 여사의 에너지는 아들에게 집중되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 전 꼭 스케일 연습을 시켰어요. 아침에 제때 일어나 학교 가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거의 매일 레슨이 있었으니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연습을 시켰죠.”

한창 뛰어놀 나이인 초등학생 때였다. 이 때문에 모자 사이에는 종종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레슨 갈 시간이 되어서도 아이가 오지 않으면, 학교로 쫓아가곤 했어요. 가다 보면 친구들하고 축구나 야구를 하며 놀고 있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젊었으니까 화가 나서 혼을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린 아들이 참 안됐죠. 얼마나 놀고 싶었겠어요. 그렇지만 제 말을 잘 따라준 착한 아들이었어요.”

어머니의 이야기에 피 교수는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장난꾸러기같이 웃으며 말한다.
“저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학교 다녀와서 저녁 먹기 전까지 연습을 했는데, 연습하는 시간이 TV에서 만화영화를 방영하는 시간과 딱 겹쳐서 곤란했던 기억이 나요. 만화영화가 정말 보고 싶었죠.”
어린 아들에게는 또래 친구들처럼 놀지 못해 늘 아쉬웠던 시간이었지만, 곁에서 연습을 도왔던 어머니도 그만큼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아들 곁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아들이 연습할 때는 꼭 옆에 있었어요. 레슨을 갈 때도 함께 다녔죠. 교수님이 레슨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면 옆에서 받아 적었다가 집에 돌아와서 연습할 때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르쳤어요. 아들 때문에 부산에 있는 친정 한 번 못갈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없으면 연습을 열심히 못할까봐, 불안했어요.”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지금의 피호영 교수를 길러낸 김소희 여사는 2009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지금의 피호영 교수를 길러낸 김소희 여사는 2009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유학을 위해 양자로 보낼 뻔해
당시에도 음악을 공부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피호영 교수의 집안은 바이올린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어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러나 아들의 재능을 그대로 썩히기에 아까웠던 어머니는, 그만두면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공부를 강행했다. 다행히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좋은 스승들도 만났지만, 어머니의 마음에는 맘껏 뒷바라지 못한 지난 세월이 한으로 남는다.

“레슨 다니는 것이 일이었어요. 일주일에 레슨이 다섯 번이었으니까요. 제가 악보가 든 가방을 들고, 호영이는 악기를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호영이가 차에 타기만 하면 졸았거든요. 선 채로 꾸벅꾸벅 조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웠던지….”

피호영은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콩쿠르에 나가면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국내에서 가장 큰 상이었던 5·16 민족상 음악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어머니는 재능 있는 아들이 가정 형편 때문에 더 일찍 유학을 가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릿하다. 한번은 유학을 위해 입양을 보낼 뻔한 위기도 있었다.

“중학교 때 스승이던 양해엽 교수님이 제게 파리고등음악원 교수를 소개시켜주셨어요. 제 연주를 들은 그 분이 저를 프랑스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죠. 그런데 당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을 때라, 양자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어요.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을 때여서 그런 경우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저를 차마 보내지 못하셨죠.”
아들의 말을 듣는 어머니가 당시 생각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호영이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재능을 더 키워줄 수 있었는데….”
어머니의 말에 아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전혀 아쉬운 부분이 없어요.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일찍 유학 갔더라면 삐뚤어질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괜찮아요. 나름대로 제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만족해요.”

피호영 교수는 뒤늦게 파리로 유학을 가 파리고등음악원과 에콜노르말 국립음악원 등을 졸업하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파리국립음악원 수석 주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악장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으로는 5·16 민족상 수상과 서울시교향악단과의 협연을 꼽는다. 그 중에서도 서울시향과의 협연은 어머니와 당시 청중에게 잊지 못할 무대로 남아 있다.

“감격스러웠을 때는 여러 번 있었죠. 서울시향과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는 무대 뒤에서 많이 울었어요. 감정이 복받쳤고, 가슴이 벅찼죠. 당시 파가니니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가 몇 안 됐는데, 호영이가 훌륭히 잘해내서 그 무대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분이 많아요.”

피 교수는 사춘기 시절,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에 바이올린을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어머니는 묵묵히 아들 곁에 있었다. 늘 어머니께 고마운 마음이지만, 어머니의 헌신에 대해서 깨닫게 된 건 자신의 아이들을 기르면서다.

“딸 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두 딸이 음악을 해요. 바이올린을 하는 큰애를 초등학교 때 가르쳤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아빠로서는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했던 그대로 큰애한테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웃음). 어머니는 그야말로저에게 헌신하셨죠.”

김소희 여사는 지금도 아들의 연주회에 꼭 참석한다. 이제는 아들이 자신의 희생과 채찍질이 필요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어머니 마음은 똑같지 않을까. 까까머리로 파가니니를 연주하던 그날처럼 가슴 벅차고 대견스러운 심정은 늘 그대로일 것이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 원상희,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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