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녹음이 더해가던 7월의 어느 날, 「지선아 사랑해」의 주인공 이지선씨가 보건복지가족부에서 행정인턴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9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에 화상을 입었지만 절망을 딛고 일어나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기적을 보여준 그녀. 그녀와의 만남은 한여름의 푸르름만큼이나 상쾌했다.
한 달간의 인턴생활, 한국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관심
“한두 번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다음에 가면 돼요.” 걱정 말라며 환하게 웃는 그녀는 영락없이 성격 좋은 옆집 아가씨다.
사고가 난 지 벌써 9년이 지났다. 200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한 그녀는 2008년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방학 동안 한국의 장애인정책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운 좋게 보건복지가족부와 연이 닿았다.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항상 한국에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국의 장애인정책이 궁금했는데 그걸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이 보건복지가족부잖아요. 방학 동안만이라도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편지를 썼는데 감사하게도 받아주셨어요.”
7월 한 달간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권익지원과에서 일하며 국내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미국의 장애인 탈시설 정책, 장애인 차별 금지법 등을 찾아내는 게 그녀의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 시설의 30%가 100명 이상의 장애인을 수용하고 있어요. 미국에 비하면 장애인들의 거주 시설이 너무 대형화되고 지역사회에서 떨어져 있는 편이에요. 마치 격리 수용된 것 같은 느낌이죠. 그렇게 되면 장애인들의 자기 결정권이 약해지고 개개인의 복지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현재 정부가 장애인 4명당 1명의 교사가 붙는 그룹 형태의 시스템을 계획 중인데 제가 하는 일은 그 시스템이 잘 도입될 수 있도록 준비 과정을 돕는 일이에요.”
미국의 장애인 시설은 지역사회에 완벽하게 융화되어 있다. 그녀는 동네에서 자신에게 상담을 받던 장애인 학생을 만났는데 바로 옆 아파트에 살고 있어 놀란 적도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아이들 교육상 안 좋다느니, 집값 떨어진다느니 하는 문제로 반대할 일이다.
“장애인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선진국 역시 그러한 진통을 겪었어요. 우리나라는 그런 문제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아직 많이 부족해요. 장애인 문제에 있어 미국이 어떻게 국민을 교육하고 사회 인식 변화를 이루었는지 역시 제가 연구해야 할 과제예요.”
딸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으신 어머니, 가족은 기적의 자양분
그녀에게 인터뷰는 낯설지 않다. 2000년 사고 이후 2003년 KBS-2TV ‘인간극장’을 통해 전국에 알려져 그동안 수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해왔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꼭 받는 질문이 그 커다란 절망을 어떻게 극복했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4학년이던 2000년 7월,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친오빠와 함께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낸 6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중화상을 입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화마는 얼굴을 포함한 전신에 흔적을 남겼고 엄지를 제외한 여덟 개의 손가락은 한 마디 이상 짧아졌다.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한 여대생의 인생이 급커브를 트는 순간이었다. 힘들었던 기억을 묻는 것 같아 미안해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이내 “그렇다고 전 국민이 모두 제 이야기를 아는 건 아니잖아요” 하며 웃어 보인다.
가족과 친지들의 응원으로 힘든 병원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섰을 때는 마음을 다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맞서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얼굴이 없어진 상태로 내가 나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 거잖아요. 예전에 내가 사람들에게 받았던 평범한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들을 느끼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미웠죠. 어른들도 애들이랑 똑같아요. 길에서 한 번 지나친 사람이 다시 와서 보고 가요. 노골적인 시선이나 듣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감정 표현은 불편하죠. 얼마 전에도 가게에서 계산하시던 분이 저를 보고 한참이나 안쓰러워하시더라고요. 안타까워해주시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순간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저는 그나마 알려졌으니까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정말 힘드시겠구나, 생각했어요.”
이제는 웬만해선 흘깃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들에게는 “신기하니? 이리 와서 만져봐” 하고 먼저 손을 내밀 정도다. 10년 가까운 시간, 40번이 넘는 수술을 받는 동안 매끄럽게 다듬어진 건 그녀의 외모뿐 아니라 마음이었다.
“지금도 사고 당시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아요. 당시에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리둥절했고 나중에는 기억이 너무 생생해 무서웠고, 되도록이면 떠올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방송에 나가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 얘기를 많이 했던 게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저의 사고에 대해 얘기하면서 부정적이고 피하고 싶은 마음을 해소했다고 생각해요. 저에겐 상담이었던 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한 발짝 떨어져서 보게 된다. 고난의 계곡이 깊으면 축복의 산이 높다고 했던가, 그때는 너무 깊은 계곡에 있었기에 산이 높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고난이 없었으면 지금의 기쁨이 있었을까 싶다.
“그 모든 게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를 덜 사랑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저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책을 내고 많은 사람들을 알 수 있었겠어요. 지금은 그 기쁨의 산이 뭔지 알아요.”
5년간의 유학생활, 한국은 언젠가 돌아올 곳
인터넷에서 그녀의 직함은 작가다. 2003년 「지선아, 사랑해」와 2005년 「오늘도 행복합니다」 두 권의 책을 낸 그녀에게 작가라는 직함이 마음에 드는지 물었더니 부끄럽다는 반응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병원에 있을 때부터였다.
“손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손에 대해서는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는데 누가 병원에서 심심할 때 보라고 노트북을 주셨어요. 그때부터 엄지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저를 걱정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전해드리고 싶었거든요. 이런 상황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고요. 그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이 나오게 된 거예요.”
그녀는 병상에서 글을 통해 마음을 정리하며 ‘여기서 살아 나가면 나와 같은 사고를 겪은 사람들이 일상에 돌아올 때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공부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퇴원 후 일본으로, 미국으로 그녀는 공부를 위해 바다를 건넜다.
“맨 처음 일본에 갈 때는 치료 목적이었어요. 일본에서는 유학생이 한 달에 70만원 이상 치료비를 부담하지 않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거든요. 치료를 받으면서 일본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우연히 미국 여행을 갔는데 그게 계기가 됐어요. 일본에서는 치료 때문에 아픈 기억이 너무 많았거든요. 일본 말만 들어도 병원 냄새가 나는 것 같았어요.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미국에 가게 됐죠.”
“그전까지 한국에서는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었잖아요. 사고를 당한 후에도 방송에 나오면서 많은 분들이 박수 쳐주시고 응원해주시는 환경이었는데 한순간에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 떨어진 거예요. 미국에선 공부에 있어서 장애인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아요. 거기에다 영어도 못했으니 언어장애까지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하루 종일 긴장해 있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올 때는 발이 안 떨어질 정도로 녹초가 됐죠. 지금도 완벽하게 적응한 건 아니지만 처음 유학 왔을 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어요.”
2004년 보스턴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작년에 전공을 바꾸며 뉴욕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겼다. 재활상담학에서 사회복지학으로 전공을 바꾼 건 한국에 돌아올 일을 생각해서였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좀 더 큰 틀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재활상담은 1:1로 이루어지잖아요. 상담이라는 것이 굉장한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에요. 이미 그쪽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전문가들이 계셔서 장애인들을 위한 환경 기반을 닦으려면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재활상담과 사회복지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전혀 달라요.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를 하고 일은 한국에서 하고 싶어요.”
가장 중요한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미국에서의 학비와 생활비는 책을 통해 들어오는 인세와 장학금으로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 홈페이지에 올라온 ‘지선씨는 부르주아인가 봐요’라는 글을 볼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이다.
“저희 집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유학을 생각할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자동차보험이 아니었다면 치료받기 힘들었을 거예요. 화상 치료가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요. 불을 만지는 직업이 보험 가입이 까다롭고 특히 어린이 화상 치료비는 정말 비싸요. 아이들은 화상으로 피부가 굳어버리면 성장에도 악영향을 주거든요. 미국의 경우 16세 이하의 어린이는 무료로 화상 치료를 받는데 우리나라는 전체 화상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범위가 수술 여섯 회뿐이에요. 제도 마련이 시급한 부분이죠. 정말 중요한 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든 것보다 그것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는 것,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거예요.”
언젠가 한국에 들어와 자신이 할 일을 위해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를 잘 보내는 일이다. 여름방학 동안 인턴직을 잘 수행한 후 미국에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그리고 ‘올해 안에는 좋은 사람을 만나야 서른 중반에는 시집을 갈 수 있지 않겠냐’며 연애까지 올해 계획에 덧붙인다.
“겉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말, 정말 맞는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안 예쁜 사람을 위로하는 말이 되어버렸어요. 외모를 중시하고 마치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 믿는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외모만큼이나 마음의 모양을 가꾸라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한국의 장애인정책을 지켜보고 싶었어요. 언젠가 한국에서 할 일을 위해 열심히 오늘을 살고 있어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제가 사고를 당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우신 적인 없어요. 보통 “너 이제 어떻게 사니, 큰일이다” 이런 말을 할 것 같은데 항상 “괜찮아, 할 수 있어” 이러셨어요. 당시에 저는 제 상황을 잘 몰랐거든요. 아파서 누워 있기만 했으니까요. ‘엄마가 괜찮다고 하니까 정말 괜찮은가 보다. 오늘은 아프지만 내일이면 좋아지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제 병실에 들어와서 울지 않으셨어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