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당당한 삶을 살게 돼 정말 행복해요”
「레이디경향」에서는 소액투자로 성공한 사람, 부도 직전의 위기에서 성공한 사람, 잘못된 투자로 돈을 잃었다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위기관리 노하우를 알아보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이달의 주인공은 지체장애 3급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매 전문가로 성공한 고정훈씨다. (편집자 주)
초등학교 때 우연한 사고로 지체장애 3급 판정 받아
고씨가 장애를 갖게 된 건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책으로 머리를 맞은 이후 서서히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뇌출혈이 시작된 것.
“농사지으면서 소박하게 살던 부모님과 식구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죠. 결국 뇌출혈을 고치기 위해 가족 모두 서울로 올라왔어요.”
하지만 서울에 와서 치료를 받아도 그의 증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마비되는 팔다리의 불편함을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뇌출혈은 본인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기에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다행히 10년 전 뇌혈관 수술을 한 이후,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고 있지만, 여전히 왼쪽 팔과 다리는 불편한 상태다.
그는 가족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정규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만큼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은 생각보다 컸다.
법원에서 고씨의 별명은 ‘절룩이 아저씨’
그가 경매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7년 스물다섯 살 때였다. 집 앞에 있는 태인경매컨설팅이라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 당시 그가 하는 일은 등기부등본을 발급하고, 발송하는 일이었다.
“제 채용문제로 인해 내부 직원들의 반발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장애인이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죠. 하지만, 한 달 정도가 지나고 나자 열심히 일하는 제 모습을 보고는 다들 인정해줬어요.”
모르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하나하나 배워가기 시작했다. 하루에 등기부등본을 수백, 수천 건을 접하다 보니, 등기부등본은 이제 그 누구보다 잘 본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태인경매컨설팅의 이기강 이사가 “장애 때문에 직장생활 하기 힘들 테니 나를 따라다니면서 경매를 배워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기강 이사님은 지금까지도 스승으로 모시는, 제 인생을 바꿔준 분이죠. 그분을 통해 경매를 배웠거든요. 아침 9시에 경매 법원으로 출근해서 정보지를 돌리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경매 브로커들과 친분을 쌓기 시작했어요. 당시 자판기 커피가 한 잔에 2백원이었는데, 커피 값으로 하루에 만원 넘게 썼죠. 처음에는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던 사람들이 매일 법원에서 인사하는 모습을 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는 척을 하더라고요(웃음).”
경매를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장애를 가졌지만, 그의 옆에는 친절하게 경매의 기초를 가르쳐주는 이기강 이사가 있었다. 더군다나 종자돈이 없었기 때문에 성급하게 경매에 뛰어들지 않았다. 초창기에 그가 하는 일이라곤 전문 브로커가 어떤 물건을 낙찰받는지 살펴보고, 경매 결과를 체크하는 게 전부였다.
“법원은 제 놀이터였죠. 왔다 갔다 하면서 서류도 보고, 양식도 카피해오고, 법원 계장님들과 얼굴을 익히고 대화하며 노하우도 배웠죠. 제가 이론은 잘 몰라도, 법원에서 진행되는 실무는 그 누구보다 자신 있어요.”
“소외됐던 삶을 지나 사람들 앞에 당당해지니까 자신감도 생기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어깨를 펴고 다녔어요.”
경매는 장애를 가진 나에게 최선이자 최고의 일
1998년, 그가 처음으로 경매에서 낙찰받은 물건은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8평짜리 빌라였다. 종자돈이 한 푼도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3천만원을 빌려서 경매를 시작했다. 경매로 2천3백만원에 낙찰을 받고, 3천5백만원에 전세를 놨으니 남는 장사를 했다. 그가 부모님에게 빌린 돈 3천만원에 5백만원을 더 얹어서 갚을 때 너무나 기뻐하던 부모님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그는 1년에 2, 3건 꾸준히 경매를 통해 부동산을 구입했고, 지금까지 13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다. 낙찰받은 집들을 거의 팔지 않고 그대로 두는 그에게 주위에서는 바보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보통 경매 전문가들은 낙찰받은 물건을 다시 되팔면서 시세 차익을 챙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씨가 낙찰받은 집들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현재 가치로 따지면 3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밀어붙인 고씨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금도 어머니는 가끔 그를 보고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던 네가 이렇게 성공했다”며 기뻐하신다. 그가 다녔던 학교 담임선생님까지 지금의 그를 보고 대견해한다고 한다.
“제가 2남 1녀의 장남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장애 때문에 돈을 못 버니까 천덕꾸러기 신세였어요. 그런데 어엿한 직업을 갖게 되니 가족 모두 저를 믿고 의지하더라고요. 집안의 부동산과 재산 관리도 모두 제가 맡고 있어요. 가족의 재산을 제가 직접 지킬 수 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하죠.”
고씨는 지금도 자신이 경매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는 좋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뒤에서는 그의 장애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 같은 사람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고씨 자신도 다른 장애인들을 쳐다보게 되니까 말이다.
경매에 나온 집을 보러 갈 때 곤란한 상황을 겪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면서 문조차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집을 보러 갈 때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경매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일이다.
“저는 경매가 정말 재미있어요. 돈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죠. 앞으로도 경매를 꾸준히 할 생각이에요.”
경매는 부업으로 하기 좋은 재테크 수단
경매가 대중화된 요즘도 재테크 수단으로서 괜찮은 방법인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Yes”였다. 다만, 전업으로 하는 것보다는 부업으로 1년에 1, 2건의 물건만 노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또 실수요 겸 투자로 접근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초보 경매 투자자들이 성급하게 수익을 내려는 성향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경매를 배우자마자, 마치 한두 달 후에는 낙찰을 받아야 될 것처럼 조급증에 시달린다는 것. 자칫 특수 물건을 잘못 알고 낙찰받을 경우 어렵게 마련한 보증금까지 잃고, 경매를 포기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매에 나온 물건을 잘 구분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 3년까지는 정말 겁 없이 덤빌 수 있어요. 그러다가 3~5년 차쯤 되면, 경매 물건에 대해 신중해집니다. 제가 지금 경매 13년 차잖아요. 저 역시 경매에 자신 있게 들어가기 힘들어요. 그만큼 신중하고 잘 살펴야 합니다.”
고씨는 경매를 배워놓으면, 나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의 재산까지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과 친지들 중에서 혹시 ‘경매’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해도, 겁날 게 없다. 본인이 낙찰을 받기 전에 경매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든가 최악의 경우, 직접 낙찰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매는 장애인 고씨에게 세상의 편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정말 고마운 존재다.
장애인들 집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집 없는 서러움이라는 게 있어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집 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들 아파트만 집이라고 생각하죠. 원룸, 빌라, 작은 주택도 집이라는 개념에 포함시키면 집을 사는 건 정말 쉬울 겁니다.”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집 안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가족에게 어떤 식으로든 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장애를 가진 사람 스스로 더욱 움츠러들어서 집에만 있으려고 한다는 거죠. 부모님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용기를 갖고 천천히 집 밖으로 나오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따뜻한 사랑으로 그를 품어준 부모님.
고씨 역시 한때는 가족에게 ‘짐’이 됐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가족의 ‘버팀목’이다. 주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사회의 편견에 당당히 맞선 결과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