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진단으로 유방암 발견, 그 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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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진단으로 유방암 발견, 그 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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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투병 회고록 쓰는 캐서린 김“유방암은 아는 것이 힘이고
ㆍ조기 발견만이 최선, 저 역시 자가검진으로 암을 찾아냈어요”

2003년 갑작스러운 유방암 발병 이후 6년이 흘렀다. 지금 캐서린 김은 유방암 ‘환자 자매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경험을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담은 투병 회고록을 쓰고 있다. “유방암은 나와는 관계없는 병이라는 안이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언은 바로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유방암 알기]자가진단으로 유방암 발견, 그 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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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은 뒤에야, 인터뷰 주인공의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방암 발병과 두 차례의 유방 절제 수술과 복원 수술, 지독한 항암치료를 이겨낸 40대 중반의 주부라는 사전 정보로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이미지는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햇살처럼 생기 넘치는 미소는 그녀가 한인 커뮤니티 최초로 만든 유방암 환자를 위한 서포트 그룹 ‘샤인’을 떠올리게 했다.

정기검진에도, 자가진단으로 발견한 암
여덟 명의 여성 중 한 명이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미국 얘기다. 하지만 한국 여성도 평생 40명 중 한 명은 유방암에 걸리며, 환자수는 매년 증가추세에 있다. 결코 방심할 수준은 아니다. 캐서린 김(46)은 35세에 매모그램(유방 X선) 검사를 받았고 매달 유방암 자가진단을 했다. 40세에 받은 두 번째 매모그램 검사 결과 ‘이상 무’ 소식을 들은 뒤, 불과 6개월 후 자가진단을 통해 암 종양을 발견했다. 유방암 양성이었다. 유방암 가족력도 없었고, 두 아이를 정상 분만해 모유로 키웠으며 술과 담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남편은 신경내과 전문의다. 그런 그녀에게 유방암이 찾아왔다. 2003년의 일이다. 미국 LA에 살고 있는 캐서린 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40세가 되자마자 두 번째 매모그램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이 없다가 6개월 후에 자가진단을 통해 암 종양을 찾아낸 거예요. 매모그램에는 보이지도 않았고 초음파 검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죠. 만약 제가 다음 매모그램 검사 때까지 자가진단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진전될 수 있었던 암 종양이 왼쪽 가슴에 두 개나 있었어요. 그래서 평소에 유방암을 남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꾸준히 집에서 자가진단을 해왔던 덕을 크게 본 거죠.”

흔히들 알고 있는 유방암의 원인은 과로, 술, 담배 등과 연관이 있다. 출산 경험이 없으며 야근이 잦고 회식 등의 술자리가 익숙한 직장 여성의 경우 유방암 발병 위험이 높다고 지레짐작하곤 한다.

“사실 유방암이나 다른 암들의 정확한 원인은 밝히기가 어렵다고 들었어요. 저만 해도 유방암에 걸릴 사유가 없었지요. 그런데 요즘 저와 같은 환자가 많아졌어요. 연령대도 점점 낮아지고 있고요. 그러니 누가 유방암에 걸릴지 모르는 거죠.”

어떤 질환에 걸리면 사람들은 보통 둘 중 하나가 된다. 관련 정보를 샅샅이 섭렵하는 ‘아는 게 힘’ 유형과 안 그래도 힘든데 미리 고통을 학습할 이유가 없다는 ‘모르는 게 약’ 유형. 캐서린 김은 전자였다.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은 뒤 의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궁금하고 의지했던 대상은 바로 그녀와 같이 40세에 유방암 2기에 걸렸다가 생존한 ‘선배’ 환자들이었다.

너무 아플 때는 경황이 없어 사진 찍을 엄두를 못 내다가 항암치료 후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면서 용기를 내어 카메라를 마주한 2004년.

너무 아플 때는 경황이 없어 사진 찍을 엄두를 못 내다가 항암치료 후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면서 용기를 내어 카메라를 마주한 2004년.

“그들의 투병사가 가장 절실하게 듣고 싶어서 회고록을 열어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재미나서 읽었어요. 참 씩씩하게, 희망적으로, 웃음을 잃지 않고 투병한 환자들의 회고록은 그 내용이 무척이나 다양했어요. 그야말로 유방암이 무색할 정도로 밝게 투병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읽다 보면 웃음이 나와요. 그러고 나니 유방암이 좀 만만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마냥 장미꽃길인 건 아니고 눈물의 대목도 많았죠. 그런데 그런 슬픔을 승화하는 긍정과 웃음의 저력이 상당한 깊이가 있었어요.”

부분 절개 수술 후 한 달 만에 완전 절제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려서부터 약골이어서 병치레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다는 그녀는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유방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거의 없었다.

“이젠 나이도 있고, 아이들도 다 모유 수유로 키워 유방의 의무도 다했고, 누드모델도 아니고, 유달리 섹슈얼리티에 민감한 성격도 아니어서 크게 마음을 다치진 않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한 차례 부분 절제 수술 후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완전 절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의사와 충분한 대화를 나누고, 유방암 환자들의 기록을 꼼꼼히 읽었음에도, 또 병에 대한 두려움이 지독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는 게 제3자의 입장에서도 어이없고 놀라울 따름이다.

“정말 아쉬움이 많은 경험이었어요. 수술 방법을 결정할 때까지 제겐 아직 충분한 정보가 없었어요. 그래서 수술 부위가 적은 부분 절제 수술을 받고 나면 암세포가 전부 제거되고 치료만 받으면 되는 것으로 짐작했지요. 그런데 수술을 받고 나서 한 달 후에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처음 수술 때 암 종양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다는 검사 결과 때문이었어요.”

[유방암 알기]자가진단으로 유방암 발견, 그 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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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수술이라는 게 전문의가 유방을 열었을 때 까만 콩 같은 암 종양이 눈에 선명하게 보여서 그 부분만 제거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종양도 그냥 다른 부위처럼 보이는 것을 의사의 경험과 염색약의 착색 에 따라 제거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한 차례 수술로 완전히 암 종양을 제거하긴 힘들겠죠. 이 사실을 미리 알았으면 처음부터 전체 절개를 선택했을 거예요. 수술 방법을 결정하는 일이 유방암 환자가 처음으로 부딪히는 딜레마예요. 정보는 없고 결정은 온전히 환자 몫이니까요. 수술 방법은 환자 자신의 여건에 따라 의사와 충분히 의논한 후 환자가 결정하는 거예요. 누구나 부분 절개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필요하게 전체 절개를 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좀 복잡한 문제예요.”

암 환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과정은 항암치료라고들 한다. 그녀 역시 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했다. 하지만 고통의 정도는 개개인마다 다르다는 게 정답이란다. 실제로 그녀는 유방암 말기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식당 웨이트리스 일을 계속 하는 여성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머리에 스카프를 쓰거나 민머리 상태로 외출하지 않았다면, 암 환자인 줄 몰라볼 정도로 ‘멀쩡한’ 얼굴의 환자들도 많다.

“힘들지만 견딜 만하니까 그 많은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를 받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 힘들었냐고 물으시면, 3톤 트럭에 치인 후 아스팔트 위에 혼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평생 약골이었고 유난히 통증에 예민했던 저만의 케이스였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가족이 아니었다면 몇십 배는 힘들었을 것
캐서린 김은 열아홉 살 때인 198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UCLA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한국으로 역유학을 와 연세대에서 한국현대문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뉴욕에서 온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고 대학생 아들과 11학년 딸을 두고 있다. “암 투병 중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느냐”는 물음만큼 바보스러운 질문이 또 있었을까. 캐서린 김은 가족의 사랑과 인내, 지원이 없었다면 몇십 배 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가장 먼저 유방암 진단 소식을 들은 사람은 남편이었어요. 의사인 남편은 검사 결과를 전해 듣고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검사 결과가 별로 좋진 않다’고 말해주더군요.”

남편과는 ‘터부가 없는 사이’라고 했다. 평소 무슨 이슈든지 불편함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의논을 하는 사이라, 여성 암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칫 아내의 마음이 다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내가 어느 날 한쪽 유방을 잃고 인위적으로 복원된 유방을 갖게 되고, 또 몸에 많은 수술 흉터가 남은데다가 항암치료 중 체모를 모두 잃게 되어 부부관계에 지장이 있으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지를 터놓고 물어봤어요. 남편은 솔직하게 대답해줬어요. 그 대답이 아주 합리적이고도 배려가 깊었어요. 그래서 저도 남편을 믿고 예전과 다름없이 당당하게 제 여성성을 지키고 심리적으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어요.”

유방암 환자가 고생하는 만큼 배우자도 어려움이 크다는 걸 환자 자신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의식으로 인해 공연히 서러워지고 결국에는 남편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암 환자라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면 본인도 남편을 보듬어 안아주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자신의 병에만 몰두하다 보니 남편의 속내를 오해하기 쉽다고 말이다.

[유방암 알기]자가진단으로 유방암 발견, 그 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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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지키면서 남편과 허물없이 대화를 해나가다 보면 서로 의지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회복을 즐길 수 있게 돼요. 저희 부부 역시 어려움을 몰랐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유머와 웃음으로 상처를 그때그때 달래면서 함께 견뎌냈어요. 남편이 재미난 사람이라 그렇게 실없이 웃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암 진단을 받은 직후, 부부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당시 아들이 열두 살, 딸이 열 살. 아주 어린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이 들었다고 할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어떻게 엄마의 병을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암 환자 자녀들에 대한 책자와 인터넷 정보를 찾아봤다. 아이들이 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없다 해도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막연한 공포와 혼란으로 인해 부모의 병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거나 우울증, 분노 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그녀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병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다 알아들었다는 듯 눈물이 글썽거리는 두 녀석이 저를 안아주는데 참 미안했죠. 후에 제가 점점 아파갈수록 아이들은 힘들어했어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로 인한 위기의 순간들도 있었고…. 하지만 서포트 그룹으로부터 얻은 끊임없는 정보와 가족간의 솔직한 대화로 무사히 폭풍을 지나왔어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대학생이 된 아들에겐 ‘그 때의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나 봐요.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요.”

항암치료 후 5년을 기다려 회고록 쓰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한다. 내가 준비한 그 말 한마디가 적절한 위로인지, 과잉 감정의 표현인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캐서린 김에게 솔직하게 물어봤다.

“글쎄요, 전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요. 특히 눈물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정화제 역할을 하잖아요. 그래서 카타르시스 효과를 간과할 수 없는데 이는 환자들에게도 유효한 치료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미국 여성들이 덜 울기는 해요. 한인 여성 환자들은 보통 암 진단을 받고 절 찾아와서는 흐느끼거나 통곡하는 분들이 꽤 있죠. 그럼 전 ‘실컷 울라’고 조언해요. 어디서 그렇게 울어보겠어요. 남편 앞에서, 애들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울긴 힘들잖아요. 그렇게 울고 나면 나중엔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책, 음악, 드라마, 영화 등 항암치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울고 웃을 수 있는 자료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책은 소용이 없었다. 눈이 아프고 두통이 와서 오래 읽기가 힘들었다. 미국의 인기 TV 시리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전편과 한국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시원하게 박장대소와 통곡을 번갈아 하다 보면 아픈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고통이 씻겨져 내려가는 것 같았다.

미국은 많은 기금이 유방암 연구와 홍보에 쓰이고 유방암 환자를 서포트하기 위한 환우회, 정보 책자, 웹 사이트가 상당히 많다. 유방암 관련 책이 2천 권이 넘고 생존자의 회고록도 5백여 권이 넘는다. 자신이 받은 만큼 도움을 주고 싶었던 그녀는 항암치료를 마치고 좀 여유가 생기자 LA 한인 커뮤니티의 유방암 환자 서포트 그룹을 물색했다. 그러나 암 환자 환우회는 있지만 유방암 환자 전용 환우회가 없는 것은 물론 한글로 된 웹 사이트, 생존자 회고록도 없었다.

1·2 몸을 추스르자 떠난 가족 여행 중 옐로스톤에서 남편, 아이들과 함께했다. 3 완쾌된 후의 건강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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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 개인적으로나마 서포트 그룹인 ‘샤인’을 시작했어요. 그게 2005년 5월이었어요. 지금까지 60여 명의 교포 유방암 환자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왔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환자들이 울면서 저를 찾아오지만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고 나면 웃으면서 헤어집니다. 제가 겪었던 투병의 경험이 그분들에게 큰 유대감과 유용한 정보를 안겨준 거죠.”

현재 캐서린 김은 본인의 투병 기록을 담은 회고록을 쓰고 있다. 생각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으나 한동안 미뤄두었던 일이다. 계기는 이렇다.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존 에드워드 상원의원의 아내 엘리자베스 에드워드가 유방암 발병 2년 후 출간한 회고록이 많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뒤 재발과 함께 완치가 어렵다는 발표를 해 많은 유방암 환자들이 낙담했던 사례를 지켜본 캐서린 김은 적어도 5년 동안 자신의 상태를 지켜본 후에 투병담을 나눠야겠다고 결심했다. 회고록을 쓰는 데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제 얘기를 접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편견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뭐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느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고요. 그러나 그건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자신의 투병 과정을 설명하려면, 예전의 치료 과정을 다시 떠올려야만 한다. 가족들에게도 그 고통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유방암 환자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면 사생활 노출도 불사하겠다는 스스로의 의지를 캐서린 김은 “유방암 생존자로서 갖게 되는, 피할 수 없는 다른 환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라고 했다.

■정리 / 장회정 기자 ■ 사진 / 허봉희(스튜디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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