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아름다운 얼굴을 담아드리고 싶습니다”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가장 멋지고 고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생각해보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대신할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머리를 만진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따뜻한 마음과 배려로 셔터를 눌러야만 한다. 어르신들의 영정사진을 찍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LG노텔 직원들은 모두 한마음이다. 카메라 속 어르신들이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지난 8월 30일 일요일,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한적하던 복지회관 주변이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늘 조용하던 시골 마을에 찾아온 모처럼의 활기다. 한쪽에서는 마을 부녀회원들이 정성껏 준비한 떡과 과일을 접시에 다소곳하게 담아내고, 옆방에서는 조명을 연결하고 반사판을 세우는 등 촬영 준비가 한창이다. 마을 잔치라도 열리나 싶어 안을 기웃거려 본다.
분주하던 움직임이 잦아들고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갈 때쯤,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씩 복지회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이 동네 어르신들은 이날 여기 다 모인 듯하다.
“형님은 언제 여 와가 앉아 있는교? 우리가 같이 가자 할라꼬 노인정에서 여태 형님 찾다가 왔는데.”
“안 올라 했는데 통장님이 자꾸만 가자 캐서 왔다 아이가. 됐다 마. 일로 와서 옷이나 얼릉 갈아입어라. 이 저고리 색깔 봐라. 억수로 곱네. 한복은 지난 번 막내 조카며느리 볼 때 입고 오늘 처음 입는 거데이. 그때가 벌써 몇 년 전이고?”
탈의실 앞에서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할머니들의 ‘꽃단장’이 한창이다. 분첩을 든 젊은이들이 세심하게 할머니들의 얼굴을 매만진다. 또렷하게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붉은색 립스틱도 살짝 바른다.
“예쁜 처자들이 손놀림도 참 곱제. 우리 처자들은 얼굴에 뭘 발랐는데 이래 이쁘노? 내도 이렇게 만들어줄끼가?”
“아이고 형님, 이래 보니까 딴 사람 같구만. 이분들이 우리 형님을 10년을 젊게 만들어놨네.”
잔칫날같이 화기애애한 이날은 바로 ‘아름다운 사진 만들어드리기’ 활동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영정사진을 무료로 만들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LG노텔 직원들이 오늘 이곳, 서포면 어르신들의 사진을 찍어드리려 준비한 것이다.
좋아하는 일로 보람까지 맛보니 기쁨도 두 배
“어머님, 웃어야 사진이 잘 나오지요. 고개를 조금 더 드시고, 여기 카메라 동그란 거 보이시죠? 여길 보면서 활짝 웃는 겁니다. 자, 하나 둘 셋!”
이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은 바로 LG노델 이재령(56) 사장이다. 그러고 보니 오전 내내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사람도 바로 그다. 복지회관 한쪽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사진 촬영에 필요한 장비들을 설치하고, 대기석을 마련하는 등 말 붙일 틈 한 번 주지 않고 움직이던 이 사장은 촬영이 시작되자 어르신들의 ‘코치’로 나섰다. 카메라를 마주하고 굳어버린 어르신들의 긴장을 풀어드리기 위해 두런두런 말을 건네고, 자세도 바로잡아드린다. 옆에 서 있던 직원들도 함께 거든다. 이들은 모두 사내 사진 동호회 ‘찰나’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원들이다.
“제가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어느 날 친구가 자신이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께서 형편이 어려운 주변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참 좋은 일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저도 그렇게 ‘꼭 필요한 일이지만 하기 힘든 일’을 찾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마침 매달 사진 동호회 직원들과 출사를 다니는데 그때를 활용하면 되겠다 싶더라고요.”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진행을 하면 좋을지 잘 몰랐기 때문에 고향 마을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재령 사장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사천을 중심으로 작은 읍 경로당과 복지회관을 찾아 촬영을 시작했다. 함께 다니는 직원들의 고향 마을 주변도 목록에 포함시켰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에 힘을 보태준 건 이재령 사장의 고향 동창들이었다. 대가 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재령 사장과 LG노텔 직원들의 수고를 돕기 위해 삼천포초등학교 47회 동창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 고향에 남아 있던 동창들은 물론,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동창들까지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한몫을 하고 있다.
“우리가 누구보다 저 친구를 잘 아니까 시키지 않아도 다들 이렇게 뜻을 모으는 거예요. 일은 도맡아 다 하면서도 절대 생색내지 않거든요.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친구라 봉사활동 다니면서 우리 동창회를 앞에 세우고 회사는 그냥 후원하는 형식으로만 해요. 함께하는 직원들도 절대 나서는 법이 없고요.”
“좋은 일에는 좋은 기운이 있어서 점점 번져나가는 것 같아요.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힘들지 않을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한번 시작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많아지네요.”
1년째 이어온 이들의 봉사활동은 앞으로 사천을 넘어 영역을 확장해보려 한다. 회사에서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시·도나 직원들의 고향 주변 등을 중심으로 이 행보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또, 저소득층 가정의 가족사진, 농촌 국제결혼 부부의 결혼사진 등을 찍어주는 데도 관심을 갖고 실천하려 한다. 카메라와 ‘따뜻한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들이다.
얼굴사진을 찍고 찍히며 함께 보듬는 인생
촬영이 시작된 지 벌써 세 시간째, 짧은 시간 동안 50여 명의 어르신들이 다녀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서는 직접 복지회관에 오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사진을 찍어드리기로 했다. 어르신들 중에는 몸이 불편해 잘 움직이지 못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직원들이 집이나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가 잦다.
“지난달에는 한 노인병원을 방문했어요. 몸이 많이 불편한 분들, 장기간 요양하는 분들, 치매를 앓는 분들이 200명 정도 계시더라고요.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셔서 저희가 병실마다 찾아가 옷도 입혀드리고 조명도 설치해서 사진을 찍어드렸어요. 다른 때보다 힘들기는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네요. 특히, 한 할머니가 ‘내가 이 사진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며 사진 찍는 내내 우시는데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사실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잖아요. 다들 사진 찍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주말에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바람도 쐬고, 어르신들한테 좋은 말씀도 많이 듣고요.” (정지훈씨)
한때는 이들도 ‘영정사진을 찍는’ 봉사활동에 대해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적도 있다. 좋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당사자나 가족들 입장에서는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아 있는 이들이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는 생각에 ‘잘 찍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게 다가오기도 했다.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촬영에 임하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이재령 사장과 직원들은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 행복한 모습의 사진을 만들어드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 사장이 직접 사비를 털어 좋은 한복과 화장품을 마련하고, 직원들이 끊임없이 인물 사진 연습을 하는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다.
“할머니들 화장을 해드릴 때는 ‘예쁘시다’, ‘피부가 좋으시다’같이 칭찬을 많이 해드리는데, 쑥스러워하시면서도 정말 좋아하세요. 대부분 농사일, 집안일 신경 쓰느라 자신을 꾸미는 데는 소홀하셨던 분들이라 그런지 곱게 차려드리면 감격하기도 해요. 지난번엔 결혼할 때 이후로 처음 화장을 한다던 분도 계셨어요. 어르신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면서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 나이 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할 때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봉사활동을 시작한 뒤로 부모님께 더 잘하게 됐어요.” (이가영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어르신들의 얼굴을 대하다 보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배움과 함께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어르신들과 직원들은 사진을 찍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새로운 인연의 끈을 엮어나간다. 말동무가 적어 외로웠던 어르신들은 ‘우리 아들, 우리 손녀를 닮은’ 젊은이들을 통해 활력을 느끼고, 각박한 생활에 시달렸던 젊은이들은 ‘부모님을 닮은’ 어르신들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위로와 추억을 가져간다.
“사실 봉사활동 하러 간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이 시간이 저희에게 무척 즐겁고, 또 얻어가는 게 많아요. 직원들끼리 결속력도 높아지고 저도 직원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서 회사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고요. 고객의 사랑과 힘으로 성장하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더 많은 곳에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이재령 사장과 LG노텔 직원들은 봉사활동을 통해 어르신들께 또 하루의 행복을 선물하고 있다. 행복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