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그러나 일본 방송국과 끝까지 싸울 겁니다”
지난 6월의 일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함께 후계자설이 확산될 무렵, 일본 아사히TV가 김정일의 3남, 김정운의 최근 사진을 확보해 특종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사진 속 인물은 북한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 배석범씨였던 것. 황당하기만 한 이 사건은 명백한 오보이며 무자비한 인권침해였다. 배씨는 현재 일본 방송국과의 소송을 준비 중이다.
배석범씨(39)를 만난 건 사건이 벌어지고, 3개월 뒤였다. 북한이라는 민감한 사안에 비춰보면 그가 당한 일은 심각한 인권침해였다. 일본 아사히TV가 그의 사진을 두고 김정운이라고 보도한 후에, 우리나라 인터넷 언론들은 사실 확인 없이 수십 건의 관련 기사를 앞 다투어 게재했다. 포털 사이트의 인물 정보란에는 김정운의 프로필에 배씨의 사진이 발 빠르게 소개되기도 했다. 3개월이 지난 후, 어디에서도 배석범씨의 현재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가 언론과 연락을 두절하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왔던 것이다. 「레이디경향」은 배씨와 몇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설득한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 앞에 등장한 배석범씨는 김정운으로 오인했던 그 사진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통통하던 뺨은 야위었고 풍채 좋던 모습도 사라진 채였다. 몸이 좋지 않은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도무지 음식을 입에 댈 수 없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횡격막의 기능이 원활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러면 심장, 폐, 위 등 장기에도 혈액 공급이 잘 안 된다더군요. 일이 벌어진 후 급격히 살이 빠졌어요. 한의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느냐’며 놀라더군요.”
평소 한 끼 식사에 밥 세 공기는 거뜬히 먹을 정도로 식성이 좋았던 그다. 사건이 터지고 하루에 반 공기도 먹지 못하고 겨우 미숫가루만 입에 댈 수 있었다. 그의 몸무게는 3개월 만에 85kg에서 69kg으로 급격하게 빠졌다. 처음에는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나기에 감기인 줄 알았으나 폐가 원활히 움직이지 못해 자꾸 기침이 났던 것이다. 모든 것이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이후에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언론기관에서 전화가 쇄도했어요. 미국 CNN에서도 인터뷰 요청 전화가 왔으니까요.”
더 황당했던 일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일본 방송국과 큰 돈을 받고 합의했다’는 거짓 소문을 듣고 연락이 끊겼던 지인에게조차 전화가 걸려왔다.
“30억, 40억원에 합의를 했다라는 당치도 않은 소문이 나는 바람에 사람들로부터 밤낮없이 전화가 왔어요. ‘너, 돈 좀 받았다더라’며 마치 로또에 당첨된 사람으로 취급하더군요. 그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어요. 부모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만 치셨죠.”
배석범씨는 애초부터 일본 방송국과 합의할 생각이 없었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국내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수십억 원에 합의를 해주겠다며 제안서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당시만 해도 그저 황당한 사건이었고 그가 바라는 건 아사히TV의 진심 어린 사과뿐이었다.
그는 사건 당일, 자신의 사진 한 장으로 일본과 한국의 언론,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가 들썩였던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전날 야근까지 한 탓에 그저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전화가 왔는데 대뜸 방송국이래요. 그러고는 ‘사건을 아세요?’ 하는 거예요. ‘무슨 사건이요?’ 했더니 일단 인터넷을 보라고 하더군요.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온통 제 사진인 겁니다. 뒤로 넘어갈 만큼 굉장히 놀랐어요.”
인터넷에 도배된 문제의 사진은 지난여름, 그가 운영하고 있는 동호회 회원들과 친목 도모를 위해 시골로 MT를 갔을 때 찍은 것이다. MT를 다녀온 후에 원두막에서 닭볶음탕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인터넷 카페 회원방에 올렸다. 한 회원이 그의 사진을 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닮았다’고 하며 비교 사진을 함께 올려놓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평소에도 배석범씨와 회원들은 그의 닮은꼴 외모를 두고 “동지, 수령 동지”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웃었어요. 평소에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으니까요. 그게 우리끼리의 장난이었지 이렇게 크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저는 최소한 일본 방송국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알았어요. 일반 사람도 아니고 북한에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민감한 사항 아닙니까? 막말로 제가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고요.”
아사히TV 측에서는 한국지사장도 아닌, 명함도 없는 직원을 시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사과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배석범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소송 같은 큰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안일한 대처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의 태도에 굉장히 불쾌했어요. 그냥 ‘돈이나 받고 끝내라’는 식이었죠. 저는 그 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아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일본 언론이 한국을 우습게 보지 않았다면 저를 이렇게 괄시할 수는 없죠. 잘잘못을 떠나서 너무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제게 진심 어린 사과를 안 한다는 겁니다. 저는 사진 제공자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일본 방송국에서 말했듯이 한국 현역 부사관이라는 것밖에 몰라요. 그게 사실이라면 더 심각한 일 아닌가요? 국가 공무원이 저지른 일에 대해 국가에서도 입장을 밝혀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요. 일본 방송국도 제가 국가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일반 소시민이라고 생각하니까 무시하는 겁니다.”
만약 사건이 일어난 후 아사히TV가 국내 언론에 나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성의를 보여줬다면 그는 이번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거라고 말한다.
“소송을 하고 증인 출석을 요구하면 제 사진을 일본 측에 제공한 인물이 밝혀질 겁니다. 왜, 어떤 의도로 사진을 제공했는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다. 한국 법정에 아사히TV 관계자를 세워 사과를 받는 것이다.
“그저 일본 방송에서 자기들끼리 ‘오보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국에 와서 고개 숙여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금전 같은 건 생각 안 합니다.”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이 싸움이 2년, 3년으로 길어져도 끝까지 일본 방송국 측의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할 것이라고 거듭 이야기 한다.
나라를, 국민을 위한 기도, 대동제
배석범씨는 1만5천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국내 최대 무속 카페를 4년째 운영 중이다. 직접 무속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동제 같은 무속인들의 큰 행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건축업을 했는데 어릴 때부터 무속에 관심이 많았어요. 구체적으로 참여할 길이 없어 인터넷 사이트에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시고 바빠지면서 본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영리 목적으로 만든 모임이라 회원 수가 많아요. 무속인이 서로 정보 공유를 하고 있죠. 저는 음지에 있는 무속을 양지로 이끌고 발전시키고 싶어요.”
“이번에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맡은 이참씨도 ‘한국 최고의 상품은 무속이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만큼 무속은 개발하고 연구하면 좋은 관광상품이 될 수 있는 전통문화라고 생각해요.”
그는 카페 회원들과 오는 10월 25일, 대전에서 대동제를 열 계획이다. 올해 서거하신 두 전직 대통령을 위한 위령제도 열 것이다. 대동제는 참가자들이 전국에서 모인 만큼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공연으로 열린다. 그가 이번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원래 9월에 진행될 행사였다. 그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무속인들이 올가을만 넘어가면 잘될 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제가 운영하는 ‘산신각’이라는 모임도 앞으로 더욱 발전한다고 하니 그 말씀에 크게 위안받고 있습니다.”
전국 무속인의 수는 정부 추산 6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고 절차도 없이 무속 활동을 하는 사람들까지 치면 80만 명은 거뜬히 넘을 것이라는 게 배씨의 해석이다. 배석범씨는 이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협회나 장치가 마땅히 없어 안타깝다고. 이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속 특유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배석범씨의 목표는 모든 것을 터놓고 교류하는 건강한 무속인의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또 그는 이번 ‘김정운 오보 사건’에 대해 일본 방송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낼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 확인 보도에 대한 언론에 경각심을 주고 제2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훈 ■장소 협찬 / Cafe 풍금자리(031-908-4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