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식당’에 대한 열정 때문이죠”
「레이디경향」에서는 부도 직전의 위기를 이겨낸 잘못된 투자로 돈을 잃었다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공한 사람들의 실제 경험을 통해 위기 관리 노하우를 알아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달의 주인공은 외식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주)이야기 있는 외식 공간의 오진권 대표다. (편집자 주)
손님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오 대표를 만난 건 그가 경영하고 있는 씨푸드 뷔페 마리스꼬 한 매장에서다. 점심시간에 맞춰 손님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채우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넓은 실내가 북적거렸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하루에도 망해 쓰러지는 식당이 한두 개가 아니라던데, 도대체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뭘까 궁금해졌다. 그 이유는 호텔 뷔페를 연상시키는 음식들 때문이다. 게다가 가격 할인까지 더해져 1만3천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표가 붙어 있으니, 밥값에 인색한 주부들까지 몰려 점심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
오 대표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 장사를 해야 한다”면서 “이익은 최소한으로, 음식 재료는 최고급을 고집한다면 손님들도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현재 오 대표는 ‘사월에 보리밥’, ‘오리와 참게’, ‘노랑 저고리’, ‘마리스꼬’, ‘이찌멘’, ‘웃기는 짬뽕’ 6개 브랜드를 갖고 있으며 총 14곳의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과거 ‘놀부 부대찌개’를 만들고 경영했던 인물로 주위에서는 그에게 외식업계의 ‘미다스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하지만 오 대표의 성공은 수십 번의 ‘실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5평짜리 ‘골목집’이 ‘놀부보쌈’이 되기까지
1951년 서울에서 출생한 오 대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산동네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중학교 때까지 아침 식사는 꿈도 못 꾸었고 점심시간에는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곤 했다. 그러다 결국 가난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가출을 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여관 직원, 식당 종업원, 구두닦이, 좀약 장사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혈혈단신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오 대표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온 후 안양에서 사병 식당을 책임지게 됐다. 당시 군대에서는 음식 재료들을 뒤로 빼돌리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오 대표는 군에서 제공하는 모든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자 사병들의 식사는 하루아침에 풍요롭게(?) 변했다. 급기야 사병들이 ‘짬밥이 이렇게 변하다니! 앞으로도 계속 오진권 상사가 사병들의 식사를 맡았으면 좋겠다’는 탄원서까지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문 덕분에 그는 간부 식당의 책임을 맡게 됐고, 까다로운 간부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정성을 쏟았다.
“제가 워낙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만들 때 정성과 맛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군에서 쌓은 경험으로 제가 음식에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죠.”
직접 자신만의 가게를 차려보고 싶었던 그는 안양 근처에 4평짜리 라면 전문점을 차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라면 전문점은 칼국수 전문점으로 바뀌었고 다시 양식 레스토랑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1982년 군 생활을 한 지 11년 만에 전역을 했다. 그 후 안양에서 술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업으로 시작한 가게는 그에게 쓰라린 상처만 남긴 채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모아두었던 돈과 군대 전역할 때 받은 퇴직금까지 쏟아 부었는데 가게가 망하자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됐죠. 정말 사람 일은 한순간이더군요. 자본, 기술,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1987년 그동안 조금씩 모아왔던 돈으로 신림동 근처 신림극장 뒤 후미진 골목에 ‘골목집’이라는 5평짜리 보쌈집을 개업했다. 갓 담근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를 함께 내놓는 보쌈은 가격도 부담 없고, 양도 푸짐해서 서민층에게 딱 맞는 메뉴였다. 오 대표는 장사가 잘되는 보쌈집을 돌아다니면서 보쌈 고기에 대해 연구를 거듭했다.
첫 손님이 들어오던 날 그는 잔뜩 긴장하면서 보쌈 접시를 내놓았고, 손님의 입에서 “정말 맛있어요. 또 올게요”라는 말이 나오고서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고. 테이블이 4개뿐인 작은 식당은 입소문이 났다. 바쁜 날에는 가게 밖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보쌈을 먹을 정도로 손님들이 넘쳐났다.
결국 보쌈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옆 가게를 인수해 확장했고, 상호를 ‘놀부’로 바꾸었다. 현재 전국 방방곡곡에 자리 잡고 있는 체인점 ‘놀부보쌈과 부대찌개’는 이렇게 탄생됐다. 절인 배추와 속, 고기를 올린 것을 ‘놀부보쌈’이라 하고, 버무린 김치와 고기를 올린 것은 ‘흥부보쌈’이라고 이름 지었다. 또 장사가 잘되면 성의 없어진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재료와 양념을 아끼지 않았다.
놀부보쌈이 ‘대박’이 나자 체인점 문의가 쇄도했다. 1호점, 2호점 등 ‘놀부’라는 이름을 단 가게는 오픈하자마자 성공을 거두었고, 2003년 2월에는 20여 개의 직영점과 360여 개의 체인점을 거느리는 거대한 기업이 됐다. 그동안 놀부보쌈은 1996년 외식산업 부문 경영 대상, 한국프랜차이즈 종합대상을 받으면서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프랜차이즈 회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혼, 그리고 놀부와의 이별
2003년 2월, 그는 부인과 이혼을 하면서 놀부보쌈의 대표직과 경영권을 전 부인인 김순진 대표에게 넘겼다. 오 대표는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아팠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유명 컨설팅 업체가 제안한 이혼 재산분리안은 놀부 주식 75%와 직영점 5개, 그리고 놀부 주식 25%와 직영점 14개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오 대표는 전 부인에게 선택 우선권을 주었고, 그는 25%의 주식과 직영점 14개를 갖게 됐다. 16년 전 신림동 5평짜리 보쌈집을 시작으로 함께 일궈온 ‘놀부 보쌈’이 이혼으로 인해 ‘결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놀부 주식 25%를 역시 전 부인인 김순진 대표에게 매각했고, 놀부 직영점 14개도 3년에 걸쳐 모두 정리했다.
2003년 8월 오 대표는 ‘순애보(순대와 보쌈의 사랑)’라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는데, ‘영업정지 가처분 신고장’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이혼 당시 맺었던 ‘같은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소송에서 패한 그는 ‘순애보’ 체인점들에 50억원의 손해배상을 해주면서 새로운 프랜차이즈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정말 힘들었죠. 제가 구두닦이를 할 때도 자살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부부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화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자살을 결심하고 있던 그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설교였다. “여기 지금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일시적으로 힘들다고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하용조 목사의 설교 때문에 어렵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
한동안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그가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은 바로 ‘식당’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오 대표는 다시 한번 식당에 미쳐보고 싶었다. ‘놀부’ 창업자라는 과거의 영예를 벗어던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8월 ‘이야기 있는 외식 공간’을 창립하고, 압구정동에 ‘사월에 보리밥’에 이어 다양한 브랜드를 론칭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불우이웃을 위해 ‘밥 퍼’주는 사람이 되다
오 대표는 매출의 1%를 노숙자와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 또 골프장과 술집 출입 등을 모두 끊고, 불우이웃을 위해 3년 동안 매일 아침 사당역 14번 출구에서 ‘밥 퍼’ 봉사를 하고 있다.
“제가 배고픈 게 뭔지 아니까 ‘배가 고프다’면서 ‘밥 좀 많이 달라’고 하는 분께는 신나서 퍼주게 돼요. 하루에 150명 정도가 식사를 하는데 보통 노숙자, 장애인 그리고 노인들이 많죠. 저희 직원들과 함께하는데 처음에는 사장이 시키니까 별 생각 없이 따르던 직원들도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지 이제는 자원해서 아침 일찍부터 준비합니다.”
현재 그를 믿고 따르는 직원은 4백여 명. 그의 꿈은 전 직원이 모두 ‘사장’이 되는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을 아는 직원들은 오 대표를 어렵고 멀기만 한 사장으로 보지 않는다. 가깝게 생각하고 경영에 대해 배우면서 자신들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줄 ‘고마운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직원들과는 벤치마킹을 위해 고급 호텔 뷔페는 물론, 해외 레스토랑까지 다닌다. 벤치마킹을 위해 그가 먹어본 요리 중 가장 비싼 식사는 1백47만원짜리.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지금의 아내와 함께 스테이크 등 메인 요리와 고급 와인 한 병을 먹었는데 1백47만원이 나왔던 것. 국내의 최고급 호텔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이었는데, 그날은 크리스마스라 평소보다 약간 더 가격이 비쌌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비싼 음식이라도 ‘외식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먹어봐야 한다는 주의다.
두 달 전 그는 오진권의 「맛있는 성공」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그의 인생사와 식당 창업의 노하우가 낱낱이 적혀 있다. 오 대표는 불황 속에서 희망을 안고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공개했다.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1천 개의 식당이 창업을 하며 그 중 6개의 식당만이 성공을 한다고 한다. 그는 초보 창업자들에게 “상근 직원 1명당 30만원 이상 매출이 나야 하고, 월세가 매출액의 8%를 넘지 않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오진권 대표는 지난 1994년, 외식업계도 체계적인 공부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외식산업 최고위자 과정을 신설해달라고 연세대학교에 요청했다. 그리고 이듬해 연세대학교 생활환경대학원에 외식산업 최고위자 과정이 정식으로 개설됐다. 이 덕분에 외식업계 종사자들이 서로 도와주고 끌어주는 가족 같은 관계로 바뀔 수 있었다고 한다.
가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외식업계의 정상에 오른 그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한식의 세계화’다.
“이번에 정부가 한식의 세계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해외 벤치마킹 등을 통해 제대로 된 한식의 세계화 모델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미 불고기와 비빔밥 등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거든요. 다른 아이템들도 상품으로 만들어서 외국의 귀빈들에게 스테이크가 아닌 우리 한식을 선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곧 그렇게 되겠죠.”
멈추지 않는 에너지와 열정으로 오직 한 길을 달려온 오진권 대표. 그는 오늘도 꿈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