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끝에서 바이올린으로 시작할 수 있는 새 인생을 보았어요”
세계적인 가수 노라 존스가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었다. 2년 전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바이올린을 선물한 한국인이었다. 바이올린에는 자신의 노래 ‘Sunrise’에서 영감을 받은 태양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그 바이올린을 만든 사람은 바로 부산에 살고있는 김호기씨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은 그녀가 행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아주 미약한 느낌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근래 들어 연습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기초가 부실해서 손가락이 많이 둔해진 거라고만 여겼죠. 초심으로 돌아가 바이올린 연습에 매진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옛날 교본을 꺼내 처음부터 차근차근 연습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실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손가락은 더 굳어졌다.
“오케스트라에서 실수로 제 소리가 튈까봐 긴장감과 두려움에 떨었어요. 쓰면 쓸수록 손가락의 움직임은 더욱 둔해졌죠. 학생들 레슨이 끝나고 나서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머리가 아팠어요. 4개월 동안 한방치료를 받았지만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었어요. 전에 없이 친한 친구에게 화를 내면서도 차마 털어놓지 못했어요.”
오케스트라 단원이라면 매년 치러야 하는 오디션 일정이 다가오면서 극심한 불안감으로 견딜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결국 한방에서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양방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나 병원마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다 미국에 사는 언니 집을 방문했다가 현지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결과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제 척추 뼈가 한쪽으로 완전히 휘어 있었어요. 자세 때문이 아니었죠. 제 척추 뼈는 다른 사람에 비해 무른 상태였어요. 거기에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느라 항상 한쪽으로 자세가 쏠렸기 때문에 모양이 틀어졌죠. 의사는 연주 활동을 중단하고 1년간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보자고 했지만, 그렇다고 완치를 장담할 수는 없었어요. ‘이미 신경이 죽었으니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말만 들려줬죠.”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사형과도 같은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바이올린이 없는 자신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절망 끝에서 또 다른 길을 보다
“음악을 할 수 없다니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필요했었나 봐요. 제가 좀 느림보거든요.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일단 자기 자신이 중요한 거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들여다보았죠. 그러다 어느 날 마음속에 다른 색깔이 싹 일어나더라고요.”
힘든 고민 끝에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해왔다. 뭔가 만드는 것에도 자신이 있었다. 문득 예전에 바이올린 제작 영상을 보면서 ‘내가 만약 저 일을 하게 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지만 기술적인 일이니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서 익히면 될 것 같았어요. 남들보다 조금 늦었을 뿐,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바이올린 제작 쪽으로 마음을 굳혔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유학을 떠나야 했다. 미국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학비 부담이 없는 곳이어야 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 크레모나에 유일한 국립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오케스트라를 나오면서 퇴직금으로 받은 1천만원을 유학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마음의 결정을 끝내고서야 부모님께 손가락 상태와 결심을 말씀드렸다.
“제 이야기에 아버지는 ‘네 나이에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뼈아픈 고통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네 인생이니 네 결심이 최선일 테지’ 하시며 짧고 명료한 말씀으로 찬성하셨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유학 준비가 시작됐죠.”
코피 쏟고 쓰러질 정도로 남들보다 세 배 더 노력해
이탈리아어 하나 모르고 떠난 유학이었다. 간단한 어학연수를 마치고 스트라디바리 국제 현악기 제작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호기씨는 동급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남들보다 몇 배나 열심히 해야 했다.
“저는 느리더라도 확실히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남들보다 어학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세 배 더 노력했고, 실기에 있어서도 과정 하나하나에 순간의 집중력과 열정을 쏟았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확실히 알 때까지 배웠어요.”
학교 장비를 외부로 가지고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도 실기 연습을 하기 위해 바이올린 제작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완벽하게 집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준비를 거금 500만원을 들여 갖추었다. 이렇게 장비를 준비해놓고 공부하는 학생은 드물었다. 학교 진도가 바이올린 제작의 3분의 1 정도 나갔을 때 그녀는 첫 악기를 완성했다. 악기를 완성하고 처음으로 연주한 첫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솔직히 희비가 엇갈렸어요. 연주 생활을 하면서 좋은 악기에 익숙했잖아요. 첫 악기니까 설렘과 두려움이 있었죠. ‘내가 만든 악기의 소리가 어떨까?’ 스스로 완성했다는 점은 반가웠는데 소리를 냈을 때의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어요. 무조건 기술적인 면만 감안해서 만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즐거워해야 했구나, 싶어요.”
“집에 들어와 다시 새벽까지 일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빨래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한쪽 코에서 코피가 터졌어요. 조금 놀랐지만 금방 괜찮아지겠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요. 급히 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피가 멈추지를 않았어요. 조금 지나자 변기가 피바다가 됐죠. 그렇게 한 시간쯤 되니까 하늘이 노랗고 어지럽기 시작했어요. ‘이대로 가버리면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마음이었죠.”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큰 나무로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항상 틀이 필요했다. 늦은 밤, 그 틀을 만들려고 작업대의 물기에 통나무를 꽉 끼우고 온몸을 기울여 파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 통나무가 물기에서 빠져 나오면서 엄청난 힘으로 튀어 오르며 머리를 강타했다.
“눈앞이 깜깜했죠. 제 기억은 거기까지예요.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어요. 그때까지 기절해 있었던 거예요. 안경은 완전히 찌그러진 채 내동댕이쳐 있었고요. 일어나려니 머리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이마에는 주먹만 한 혹이 만져졌죠. 거울로 보니까 엄청나게 큰 혹이 솟아올라 있었어요. ‘만약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면?’ 하는 생각에 아찔했어요.”
노라 존스와의 인연
6년간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그녀는 드디어 마에스트로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뜻밖의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믿고 의지했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이후 그녀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시절 그녀는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이 마음을 두드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2003년 그래미상을 석권한 세계적인 뮤지션 노라 존스의 노래였다. 노라 존스의 음악은 그녀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듯했다. 그 음악으로 인해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꽁꽁 닫았던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그 보답으로 그녀는 노라 존스를 위한 바이올린을 제작했다. 악기를 완성한 뒤 노라 존스의 노래 ‘Sunrise’에서 딴 태양 문양을 새겼고, 노라 존스라는 이름까지 붙여 넣었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습니다.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미 훌륭한 친구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 재즈 관련 잡지에 ‘노라 존스 선물의 주인공을 찾습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노라 존스가 김호기씨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노라 존스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가 받은 놀라운 선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럴 길이 없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이에요. 난 그 바이올린을 사랑합니다. 내가 받은 것 중 최고의 선물이에요. 한국에서 공연이 있다면 만날 수 있겠지요.’
이후 노라 존스와 김호기씨의 인연은 수많은 기사를 통해 보도됐다. 이 일이 알려지고 나서 그녀와 지인들, 또 이 사연을 접한 수많은 사람들은 음악이 주는 힘과 감동에 대해 돌아보게 됐다.
바이올린 제작자로 성공적인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김호기씨.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다.
“지금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이 참 커요. 오케스트라에서 악기를 조율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이상해요.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 운명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 해요. 거기에 대한 아쉬움은 있죠. 안 가본 길이 아니라 못 가본 길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만든 악기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이름이 붙은 악기를 저렴하게 팔기도 한다. 악기와 함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앞으로의 꿈이나 목표에 대해서 물었다.
“제 목표는 행복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행복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죠.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계속 저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그것처럼 행복하고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지금은 행복이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요.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죠.”
희망은 음악 속에서도 흐르고, 행복은 전염되기도 한다. 김호기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만큼은 기자도 행복했다.
■글 / 두경아 기자 ■사진 제공 / 김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