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를 울린 남자, 전 시청자를 사로잡다
하지만 정작 김국환씨는 이효리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전국에서 총 72만 명이 참여한 오디션에서 시각장애라는 어려움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40여 명 안에 들면서 서게 된 자리였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심사에서 좋은 노래를 들려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댄스곡을 포기하고, 악보를 볼 수 없는 그를 위해 박수를 쳐가며 박자와 가사를 알려준 팀원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나중에 이효리씨가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심이 조금은 통한 것 같아서요. 긴장을 좀 하긴 했지만 저도 팀원들과 노래하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팀원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걸요? 저 때문에 손해 보는 부분이 많았을 텐데도 모두 저를 진심으로 챙겨줬어요.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노래로 감동을 받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효리의 말처럼 김국환씨와 팀원들의 애절한 하모니는 많은 이들에게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경험을 하게 해줬다. 정식 가수도 아닌, 그저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연습한 것임에도 충분히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어낸 것. 중요한 것은 역시 기교나 완벽함이 아니라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김국환씨 본인은 물론 많은 이들이 깨닫게 된 자리였다.
일부러 안 보이는 척하는 것 아니냐고요? 맞아요
“설정이다 뭐다, 욕을 참 많이 먹었죠(웃음).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속상했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의외로 대범하고 굉장히 남자다운 성격이거든요. 하나하나에 연연해하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사실 그런 비난 중에는 맞는 이야기도 있어요. 일부러 안 보이는 척한다는 말, 맞는 말이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가 일부러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니. 툭 던지는 그의 고백에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덧붙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세상이 까맣게 보이는 줄 아시죠? 그런데 제가 아까 약속 장소 앞에서 기자님이 서 계신 걸 알아봤잖아요. 다행히 얼굴이 예쁘신지, 못생기셨는지는 모르겠지만(웃음), 형체나 색깔 같은 것은 어슴푸레 보여요. 시각장애는 아예 안 보이는 사람과 저시력 장애로 나뉘는데 저는 저시력 장애인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겪어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김국환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원래 세상이 ‘그렇게’ 생긴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매우 흐릿하게 사물의 형체가 보이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 다니거나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글자를 읽거나 사람 얼굴을 보고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대신 비교적 또렷하게 보이는 색깔로 세상을 읽어나간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보이는’ 노하우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완전히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들보다는 수월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분명 할 수 없는 것들도 많고 누군가의 혹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많은데 아직까지 ‘저시력 장애’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든 점도 많아요. 일반인에도, 완전한 장애인에도 끼지 못하거든요. 그냥 아예 안 보이는 척하는 게 나을 때가 많지요.”
그는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에 길에서 김국환을 봤는데, 멀쩡히 혼자 잘 걸어 다니더라고요. 지팡이도 없이. 방송에서 지팡이 들고 무대에 올라가는 건 설정인 것 같아요”라는 사람들의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로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고 할 때 입구가 어디인지, 기계가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보이지만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으려고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한 적도 많다. 그는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도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정말 운이 좋아서 ‘슈퍼스타 K’ 본선에 올라가서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애인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고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저에 대한 비난이나 오해 중 상당 부분 잘 몰랐기 때문에 생기는 게 많잖아요? 조금만 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슈퍼스타 K’에 출연한 덕에 얼마 전 김국환씨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바로 가수로 첫 공식 무대에 오른 것. 그것도 그가 ‘슈퍼스타 K’에서 불러 화제가 됐던 노래인 ‘심장이 없어’를 부른 그룹 ‘에이트’의 콘서트 무대였다. 김국환씨는 ‘에이트’의 특별 게스트 요청을 받아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가수로서 이들과 호흡을 맞췄다.
“무척 영광이었죠. 제가 그분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수많은 관객들 앞에 서다니요. 정말 가슴 벅차고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김국환씨는 한 번도 노래 없는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꾸준히 노래 연습을 하고 노래를 할 수 있는 곳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다. 학교 후배와 함께 나간 장애인가요제에서는 금상을 수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어교육과에 진학했지만 집안 사정과 학업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2학년 때 그만두고 안마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노래의 끈은 놓지 않으려고 했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안마센터에 다닐 때는 일이 끝난 후 늘 노래를 하러 다녔다. 그러다 지금은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공연 팀에 지원,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다니고 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매일 오전 내내 모여서 연습하고 공연이 없는 날은 오후에도 가급적 함께 연습해요. 장애인 행사라든지 공연 등을 쉽게 접하기 힘든 소외 계층이 원할 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음악에 빠져 있는 김국환씨를 보고 부모님은 아직까지도 걱정이 많으시다.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시각장애인인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몸이 불편한 사람이 특별한 일을 하는 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잘 알기에 그를 많이 염려하신다. 처음 ‘슈퍼스타 K’에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를 많이 하셨다. 그래도 방송이 나가고 그가 4차 예선까지 통과하는 등 성과를 거두자 특별한 말씀은 안 하지만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시는 눈치다.
“방송에서 잠깐 저희 가족이 생활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부모님께서는 좀 부담스러워하셨어요. 저희 가족 전체가 장애가 있잖아요. ‘어렵겠다, 삶이 참 힘들겠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물론 세상과 부딪히면서 힘든 점도 많아요. 하지만 그건 세상 사는 사람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도, 어려운 일을 겪는 가정도 많고요. 저는 사는 데 있어서 별 특별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장애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더 크게 느껴지나 봐요.”
하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들거나 자신을 숨기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른 것은 다르다’, ‘어려운 점은 어렵다’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줄 때 다른 사람들도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저는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매스컴도 그렇고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질 때면 약한 부분만을 부각해 ‘돕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편인데 사실 좀 안타까운 마음이 들거든요. 일반인과 장애인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함께 ‘사귀면서’ 살아가야 하는 건데 말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노래’의 힘이 참 큰 것 같아요. 제 자신도 무대에 서면 장애인-비장애인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 노래에 빠져드는 걸 보면서 행복을 느껴요.”
김국환씨는 ‘슈퍼스타 K’ 출연을 통해 노래와 음악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고 한다. 노래를 사랑하고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고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로부터, 다른 도전자들로부터 정말 많이 배웠어요. 또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도 생겼고요. 그리고 제가 아직 ‘너무 작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부족한 재능이지만 더 열심히 해서 노력으로 메울 거예요. 처음에는 운이 좋으면 예선 2차 정도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4차까지 갔잖아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소중한 경험도 했어요. 만약 제가 결선에 올랐다면 정말 ‘실력이 아닌 장애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 거예요. 그만큼 제가 아직 부족하니까요. 어느 누가 봐도 ‘장애’가 아닌 ‘실력’이 먼저 보일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김국환씨가 배운 것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나 그가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이 세상 어떤 것보다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음도 실감했다. 이제는 좀 더 자신감을 갖고, 좀 더 열심히 노력해보려 한다. 사랑하는 음악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글 / 이연우 기자 ■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