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희망의 본보기가 되고 싶습니다”
일요일 오전 선유도 공원, 약간은 알싸하게 차가운 날씨인데도 곳곳에서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온몸에 이불을 둘둘 말아 감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픈 주말 아침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가쁜 호흡이 주는 행복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 그 속에서 즐거운 표정의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다부진 체격의 ‘몸짱’ 청년 김제헌씨. 한눈에 봐도 보기 좋은 몸을 가진 건강한 모습의 청년이지만,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며 ‘견뎌내던’ 환자였다.
어쩌면 김제헌씨(26) 본인조차 오늘의 자신을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복막염, 후두염에 이은 급성백혈병 진단까지. 병원에서의 기억밖에 없는 20대 초반을 보낸 그로서는 당연히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을 터. 하지만 지금 그는 누구보다 완벽하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여기에 서 있다.
“스물두 살 때부터는 내내 병원에서 지낸 기억밖에 없어요. 몸 여기저기가 아팠거든요. 일하다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간 적도 여러 번이에요. 거기에 백혈병 선고까지 받게 되니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인데 이렇게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김제헌씨는 스무 살 무렵까지만 해도 특별히 아픈 곳 하나 없이 비교적 건강한 편에 속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하는 것을 즐기고 스킨스쿠버 자격증까지 있을 정도로 못하는 운동이 없는 활동적인 청년이었다. 다만, 살이 많이 찌면서 한때 140kg 가까이 나가는 거구였다는 것 정도가 남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것도 군 입대를 위해 받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때문에 공익요원 복무 판정을 받게 되자 ‘살을 빼야겠다’는 결심을 세우고 1년여에 걸쳐 결국 70kg을 감량했다. 그러던 그가 처음 병원 신세를 졌던 것은 복막염 때문이었다. 맹장이 터진 것을 모르고 며칠째 방치하다 보니 복막염으로까지 번진 것이었다.
“그때는 몸 어디가 아프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죠. 젊으니까 건강에 대해 과신했던 것 같아요. ‘배가 좀 아픈데?’ 하다가도 친구들이랑 술 마시면서 아픈 걸 잊고 그랬어요.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다니까요.”
건강에 대한 무모한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시절,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임파선 파열과 후두염으로 크게 아파 90일 가까이 중환자실 신세를 지던 중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게 3년전 일이다.
그 때부터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2년여 동안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체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는데 몸무게는 계속 불어났다. 자꾸만 우울한 생각이 들고 매사에 자신감도, 의욕도 떨어지기만 했다.
“그때의 기억은 솔직히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항암치료로 몸이 힘든 것도 문제였지만 굉장히 의기소침해지고 세상과 담을 쌓게 되더라고요. 병실에 TV가 있어도 안 보게 되고, 면회시간 외에는 사람들도 못 만나게 되니까 멀어지고요. 마치 철창 없는 교도소에 갇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환자들이 그렇게 돼요.”
그럼에도 힘들었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순간 불쑥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든 ‘오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인생을 끝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어느 순간 그를 확 바꿔놓았다.
“제가 운전을 참 좋아했거든요. 죽더라도 독일 아우토반에 가서 시속 300km 이상 밟아보고 죽겠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그리고 백혈병도 감기와 비슷한 것 정도로 생각하려고 애썼어요. 계속 죽느니 사느니 생각하는 것이 저를 더 망치는 것 같더라고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말고, 억지로 좋게 생각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넘기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러던 중 하늘이 도왔는지 지난해 7월, 그에게 꼭 맞는 골수 기증자가 어렵게 나타났다. 감사하게도 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경과 또한 좋아 바로 다음달 퇴원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자 하는 또 한 번의 도전
투병생활 동안 약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김제헌씨가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 운동이었다. 우연히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트레이닝 전문가가 함께 진행하는 ‘백일간의 약속’이라는 몸만들기 프로젝트를 보고 ‘아, 이거다!’ 싶은 마음에 즉시 지원서를 냈다. 몸이 아프면서 의기소침해진 자신을 새롭게 충전하고 뭔가 성취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처럼 많이 아팠던 사람들도 다시 일어서고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하고 비슷한 시기에 골수이식을 받고도 계속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당시만 해도 아직 약을 먹는 중이었고 체력도 약한 상태이긴 했지만, 어떤 일반인들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요.”
오히려 걱정을 한 쪽은 주최 측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의 강한 의지를 믿어보기로 한 트레이너들은 김제헌씨를 위한 세심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체중 감량 자체보다는 건강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를 도왔다.
무엇보다 김제헌씨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6시 30분에 일어나 공복에 30~40분 동안 유산소운동을 한 뒤 오전과 오후로 나눠 개인 트레이닝을 하고 트레이너들과 근력운동에 매진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식이요법도 병행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세균 접촉을 피해야 하는 항암치료의 특성상 2년여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집과 병실에만 있었던 탓인지 하체에 너무 힘이 없어 운동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또, 투병생활 동안 생긴 불면증 때문에 잠을 잘 못 자다 보니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데 어려움도 따랐다. 생활리듬 자체가 깨진 상태였기 때문에 소화도 잘 안 될뿐더러 대상포진이나 급격한 당 수치 변화 등으로 어려운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보다 김제헌씨의 강한 의지의 힘이 더 컸다. 정해진 운동 프로그램이 다 끝난 후에도 스스로 ‘나머지 운동’까지 자처하는 노력이 계속되자 몸은 점차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고 체중도 20kg 정도 줄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얼굴이 밝고 좋아졌다며 칭찬하는 것은 물론, 백혈병 완치라는 커다란 선물도 얻었다.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세심하게 신경 써주는 트레이너 선생님들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친구들 덕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 특히 제가 아플 때부터 돌봐주신 부모님이 가장 큰 공헌자세요. 제가 외아들이라 아팠을 때 많이 놀라고 힘드셨을 거예요. 이제 건강해졌으니 정말 잘 해드려야죠.”
‘백일간의 약속’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김제헌씨는 스스로에 대한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물론 균형 잡힌 식사와 영양을 섭취하는 데도 신경 쓰고 있다. 운동과 건강관리는 이제 ‘반짝’ 집중해야 하는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 몸이 아팠거나 혹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이 진정으로 ‘건강한 삶’을 찾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예전에는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제가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고 나니 이제는 이 기쁨과 성취를 남들도 맛보게 해주고 싶네요. 우리나라에는 아직 트레이너 중에 난치병을 극복하고 일어선 사람이 없는데, 제가 그걸 이뤄보려고요. 아픈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일어날 수 있었으면 해요. 자신감과 희망도 얻고요.”
요즘 김제헌씨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기쁨에 푹 빠져 있다. 꾸준히 체계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물론, 관련된 공부도 시작했다. 곧 자격증 시험이나 교육 과정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침대에 누워 지내던 1년 전과 비교하면 신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얼마 못 살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들었던 그가 ‘몸짱’이 되기까지, 누군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 김제헌씨가 만들어낼 진짜 ‘기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