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여전히 숨어 사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요”
여름이 깊어가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서울고등법원의 한 법정, 선고가 끝났지만 송기복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27년 동안 자신과 가족을 옥죄여 온 간첩 누명을 벗는 순간, 그저 눈물도 나오지 않고 가슴이 뻥 뚫렸을 뿐이다. 27년 전 멈춰진 시간, 그녀는 2009년 서른아홉의 가을을 맞고 있다.
1982년 월북자를 가족으로 둔 송씨 일가 친·인척 28명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28일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국가가 27년 만에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사건의 조작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판결이 내려지고 두 달 후, 사건의 피해자 송기복씨(67)를 서울 신림동 자택에서 만났다. 하얀 얼굴에 또렷한 음성, 밝게 웃으며 기자를 맞이하는 그녀에게서 억울하게 죄인으로 살았던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고운 피부 탓일까. 겉모습은 고생 없이 산 여느 60대 여성이지만 가슴속은 누명을 쓰고 산 천년 같은 세월에 까맣게 타들어간 지 이미 오래다. 신광여중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그녀에게 안기부 직원들이 찾아온 건 1982년 봄이었다.
“새학기 첫날 3교시 수업 중이었어요. 교장실에 손님이 왔다는 호출을 받고 갔더니 검은색 점퍼를 입은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어요. 친정아버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색이 되어 계신 교장선생님의 표정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죠.”
당시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 중령으로 공군본부작전상황실에 근무 중이었다. 상황을 남편에게 알렸고 남편이 안기부 직원들에게 영장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물어보고 오늘 내로 돌려보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116일 동안 안기부 조사실에 불법 구금된 채 온갖 고문과 협박을 당해야 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그녀는 “북한에 다녀온 것을 불라”며 시작된 모진 매질에 결국 “다녀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6·25때 월북한 아버지 ‘송창섭’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은 매질을 견디던 어느 날이었다. 그해 9월, 안기부는 그녀를 포함한 송씨 일가 28명이, 북한에 체류 중인 ‘송창섭’을 정점으로 간첩 활동에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송충건’이라는 가명을 쓰는 이가 남파되었다는 한 전향 간첩의 진술에, 국가가 이들 가족을 전대미문의 가족 간첩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간첩이라면 전염병 환자 보듯 했던 시절, 그녀는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와 간첩이라는 멍에를 쓴 채 사반세기를 견뎌야 했다.
고통의 순간 그녀를 지탱해준 남편의 사랑
“제가 고생한 거에 비해 곱게 나이 들었다고 하셨죠? 안기부에 끌려가 1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했어요. 그 후 누명 쓰고 살아야 했던 세월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고요. 어떻게 곱게 늙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건 다 남편 덕분이에요.”
그녀의 남편 송영섭씨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대통령 전용기를 몰던 전도유망한 공군 중령이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남편이 되어 강제로 예편당하고 안기부에 끌려가야 했지만 단 한 번도 원망이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며 그녀와 가족을 위로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애국자였어요.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를 와서 저에게 큰절을 하더라고요. 국민을 대표해서 당신에게 사과를 한다고. 자기는 내가 죄 없는 거 안다면서요. 제가 교도소에 있었던 116일 동안 딱 하루 빼고 매일 면회를 왔어요. 오죽했으면 교도관들이 제 사건을 ‘춘향이 사건’이라고 불렀겠어요. 그렇게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이에요. 그런 남편이 있었기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그녀가 고문 후유증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보다 더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남편은 꿋꿋이 그녀 옆을 지켰다.
“제가 안기부라는 지옥을 나와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가족들이 지옥이었어요.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죠. 주변에서 다 이혼하라고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 저조차도 남편한테 이혼하자고 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남편은 끝까지 제 곁을 지켜줬어요. 간첩 누명까지 썼던 제가 ‘복 많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남편 덕분이에요.”
안기부에서는 그녀가 엘리트 장교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접근했다고 모함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이다. 충북 음성에서 함께 학교를 다닌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성인이 된 뒤 다시 만났고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월북자를 아버지로 뒀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부터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던 그녀를 지켜준 것이 남편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국시(國是)가 반공이던 시절이었어요. 학교에서도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죠. 항상 혼자 담벼락에 숨어 울고 있으면 남편이 저를 데리고 가 놀아줬어요. 그때가 일고여덟 살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때 남편이 저를 보고 ‘이 사람은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그러더군요.”
지난 7월, 그녀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적셨다.
“눈감는 날까지 저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진실을 밝히라고 격려했던 남편, 이 자리를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남편의 무덤에 무죄라고 적힌 판결문을 바치고 싶습니다.”
생명의 은인 황인철 변호사
그녀는 지난 1993년 세상을 떠난 고(故) 황인철 변호사와도 인연이 깊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사건, 박종철 손해배상 청구 등 남들이 꺼려하는 시국사건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던 황인철 변호사는 그녀를 누명의 굴레를 벗겨준 은인이다. 그녀가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난 건 1982년 1심에서 간첩죄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간첩방조죄로 2년으로 형량이 낮춰져 수감 중이었던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수감자 운동시간이 돼서 하얀 담벼락에 기대선 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여수인(女囚人)들이 제 이름을, 세례명을 부르고 뛰어가더라고요. 데모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잡혀온 학생들인 것 같았는데 교도관 몰래 한 명씩 와서 저에게 암호 같은 말을 하고 가는 거예요.”
한 명이 와서 “아줌마가 율리아(송기복씨의 본명)씨예요?”라고 묻고 가면 또 한 명이 와서 “아줌마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어요”라고 했다. 다음 학생이 와서 “그분이 황인철 변호사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과 함께 어렴풋이 빛이 보이는 걸 느꼈다. 혹시나 그 이름을 잊을까 방으로 돌아와 수없이 되뇌이고 또 되뇌었다.
“어떤 변호사이기에 문둥병 환자보다 못하다는 간첩단 사건의 피의자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할까 싶었죠. 안기부만 나오면 법정에서 나의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깨져버린 지 오래였고 나는 이렇게 간첩이 되는가 보다 하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어요. 우리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누명을 벗겨줄 변호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갖 상념이 교차되던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학생들로부터 황 변호사의 뜻을 전해 듣고 이번에는 남편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007 작전’이 펼쳐졌다. 남편이 면회를 오면 입회 교도관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틈을 타 한마디, 한마디씩 남편에게 말을 전했다. 남편이 황인철 변호사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렸다. 후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이 여자가 죽도록 고문을 받았다더니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구나” 하고 기막혀했다고 한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전 간첩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조차 몰랐던 평범한 교사였어요. 간첩 피의자가 되고 나서 변호사 선임을 위해 간첩 같은 짓을 하는 걸 보고 쓴웃음이 나왔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맨 처음 황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율리아씨는 정말 행복한 분입니다”였다. 보통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간첩죄의 피의자가 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다른 한쪽도 간첩 피의자가 되는데 그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지극정성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며 아내의 구명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상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것이고 누명을 벗을 것이라는 것이 세 번째 이유였다.
1984년 이들 사건이 재재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유죄판결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7차례나 재판이 진행될 정도로 사법 사상 유례 없는 ‘핑퐁재판’을 벌이긴 했지만 그때 황 변호사의 말대로 이제 국가가 그녀의 무죄를 인정하고 세상이 그녀의 결백을 알았다. 누명을 벗은 이 순간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한이 되지만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밝혀준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녀는 요즘 민주화 관련 NGO단체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요청으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저는 그래도 행복한 피해자예요.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그나마 글이라도 배워서 억울함을 외칠 수 있었지만 아직도 사회의 시선 속에 숨죽여 사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았던 만큼 저도 그분들께 힘을 보태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글 / 노정연 기자 ■ 사진&사진 제공 / 원상희, 송기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