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일주일에 하루만 시간을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레이디경향」에서는 소액 투자로 성공한 사람, 부도 직전의 위기에서 성공한 사람, 잘못된 투자로 돈을 잃었다가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위기 관리 노하우를 알아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이달의 주인공은 신용불량자에서 30억원 자산을 일군 명지투자정보연구소 경매 전문가 김기환씨다. (편집자 주)
경매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재테크 수단이라 말할 만큼 대중화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방법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매를 재테크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기환씨(28) 역시 경매 예찬론가다. 젊은 나이에 신용불량자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된 후, 경매를 통해 인생을 다시 살게 됐다는 김기환씨. 그의 쉽지 않았던 경매 성공 스토리를 들어본다.
김기환씨는 힘들고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더욱 아르바이트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서빙은 물론, 백화점에서 의류, 구두, 심지어는 여자 속옷까지 팔았다. 군 제대 후에는 도매점에서 액세서리를 받아다가 0.5톤 중고 화물차에 싣고 남대문시장에서 팔기도 했고, 청계천에서 음악 테이프를 팔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 선글라스 관련 회사에 다니면서 2년 동안 2천만원을 모았어요. 그러고 나니 사업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제가 강아지를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애견 수입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사업이 안 되려고 했는지 바로 ‘사스’가 불어 닥쳤어요. 당시 중국을 왕래하며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다 철수를 했지만, 저는 사활을 건 일이었기 때문에 죽을 각오를 하고 중국을 오갔어요.”
그렇게 열심히 사업에 매달렸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빌라에서 애견 30여 마리와 뒤엉켜 살면서 잠잘 공간이 없어지기도 했고, 부모님은 수십 마리의 강아지들을 돌보느라 매일 한숨이 늘어갔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강아지들에게 예방접종을 꾸준히 맞혔는데도 자꾸 병들어 죽는 것이었다. 결국 애견 수입 사업은 그에게 손해만 남겼다.
이어 남대문시장에서 애견용품 총판을 시작했으나 이 역시 경기 불황으로 어렵기만 했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받아 돌려 막기를 하다가 결국 6개월 정도 연체가 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이자까지 포함해 총 5천여 만원이라는 빚을 떠안게 됐다.
“5천만원의 연체 금액을 보면서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파산 신청을 했고, 28세의 나이에 신용불량자 신세로 전락했죠. 파산 신청을 하면 신용회복위원회에서는 최저생계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수년에 걸쳐서 갚을 수 있게 해줘요. 저도 5년에 걸쳐서 상환을 하고 있죠.”
사실 경매로 돈을 벌고 난 후, 일시불로 갚을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초심을 잃지 말자는 생각에서 아직도 매월 일정 금액을 갚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경매 시작
신용불량 상태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경매를 시작하게 된 것은 2003년 명지투자정보연구소의 배중렬 이사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배 이사는 일반 직장에 다닐 수 없는 그에게 ‘경매’를 통해 먹고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은인이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인복은 있나 봐요.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금전적인 신용은 없었지만, 사람에 대한 신용은 있었던 것 같아요. 신용불량자인 저를 믿고 1천만원을 빌려주는 분도 계셨어요. 전 직장 상사인데, 그분은 제가 평생 모시고 함께 가야 할 분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처음 경매로 물건을 낙찰받은 것은 2004년. 그에게 경매를 권유했던 배중렬 이사와 함께 공동으로 물건 낙찰에 참여했다. 처음 낙찰받은 물건은 강북구 미아동 소재의 빌라로 7천7백만원에 낙찰을 받아 2년 후에, 1억5천만원에 팔았다. 2년 만에 2배의 수익을 낸 것이다.
“저는 배중렬 이사님이라는 경매 베테랑인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에 헤매지 않고 남들보다 쉽게 경매에 발을 들일 수 있었어요. 만약, 잘못된 투자를 했더라면 제가 주위 사람들에게 빌린 종자돈 2천만원을 순식간에 날릴 수도 있었지만, 저는 스승님을 믿었어요.”
김기환씨가 처음 경매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화곡동을 중심으로 낙찰을 받았다. 당시 서울에서 부동산 시세가 가장 ‘저렴한’ 동네였기 때문이다. 그는 종자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주위 동료들과 공동투자를 했다. 당시에는 5천만~6천만원만 있으면, 30평형 빌라를 낙찰받을 수 있었다. 경매에는 낙찰받은 물건에 한해 낙찰 금액의 8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때문에 심지어 2천만원만 있어도 빌라 한 채를 낙찰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전세까지 놓는다면,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돈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집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저는 물건을 낙찰받으면 남들처럼 오래 보유하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2, 3년 이상 두고 본 후에 수익이 생기면 집을 팔았는데, 저는 가진 돈이 없으니 경매에서 낙찰을 받으면 수익이 작아도 바로 되팔곤 했죠. 그렇게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점점 종자돈을 만들어갔어요.”
7년 동안 72건 낙찰받아
2003년 처음 경매를 시작한 이후 7년 동안 낙찰받은 물건은 72건이다. 경매를 해온 횟수와 비교하면 낙찰받은 횟수가 꽤 많다. 한 달에 한 번씩 낙찰을 받았을 정도. 낙찰 횟수가 이 정도 되려면, 낙찰을 받기 위한 입찰 횟수는 곱하기 10배, 물건 검색은 거기서 또 곱하기 10배를 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악바리처럼 발품을 팔았다.
“사실 제가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에요. 아침에 늦잠도 자요. 대신 일을 할 때는 철저히 부지런하려고 노력합니다.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고 해도, 아침 일찍 일어나 법원에 가죠. 노력하는 만큼 크게 보답이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요즘에도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이다. 일단 경매 물건을 낙찰받은 후, 바로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으면 일단 본인이 한 달 정도 들어가서 살아보기 때문이다. 직접 살면서 불편한 점을 개선한다. 그럼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이 집의 가치를 다시 판단하고 계약을 제안한다. 때문에 그는 이사 다니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됐다. 당분간은 계속 이사를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낙찰받은 모든 물건이 순조롭게 매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힘든 세입자들을 만나면, 그도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겼다. 한번은 경기도 광주의 28평짜리 빌라를 낙찰받았다. 그런데 세입자는 그에게 턱없이 많은 이사 비용을 요구했고, 오랜 기간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세입자에게 한 번도 강제집행을 하지 않았던 그도 ‘결국 강제집행을 해야 하나’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 무렵, 극적으로 이사 비용에 대해 합의를 보면서 힘들게 명도를 할 수 있었다.
“저는 경매를 통해서 만난 사람들, 특히 세입자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요. 하지만 가끔씩 그렇게 독한 사람들을 만나면, 세입자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위축되거든요. 간혹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는 나름의 보상이 생기긴 하더라고요.”
세입자의 편의를 중시하는 그가 특히 좋게 기억하는 물건이 있다. 봄이 시작되는 3월, 그는 고3 수험생과 어머니가 살고 있던 집을 낙찰받았다. 하지만 세입자였던 어머니는 김씨에게 간곡하게 아이의 시험이 끝나는 12월 이후, 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김씨는 어머니가 다른 곳에 집을 얻을 때 보탬이 될 수 있도록 꽤 많은 이사 비용을 챙겨줬다. 이사 가는 당일, 그 어머니는 그에게 ‘좋은 사람 만나서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감사하다’는 편지를 써놓았다.
“막상 그럴 경우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죠? 하지만, 이상하게 세입자들에게 이사 비용을 많이 챙겨주면, 나중에는 집값이 올라서 훨씬 더 많은 수익을 보장받게 되는 거예요. 세입자와 절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서로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더욱 보람을 느끼죠.”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커
경매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과거에는 항상 돈에 쪼들리며 살았고, 늘 스트레스가 많았다. 사람들을 만나도 돈이 없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먼저 술값을 낼 수 있게 됐고, 부모님께 용돈도 많이 챙겨 드릴 수 있게 됐다. 교회에 가서도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에게 어떤 사람이 경매를 하면 잘할 것 같은지 물었더니 ‘관심’이 첫 번째 요건이라고 말한다. “저는 이 일이 정말 재미있어요. 제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휴가를 갈 때도 컴퓨터와 프린터를 가져가서 물건을 검색해요. 직업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재미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웃음).”
또 성급하게 경매시장에 뛰어드는 것도 초보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는 요즘 경매가 급속히 대중화되면서 부쩍 준비없이 경매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고, 신중하게 물건을 따져보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처럼 경매시장에 사람들이 많을 때는 10%의 가능성을 보고 90%의 위험을 해결한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야 돼요. 특히 저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물건에 많이 접근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가 보이거든요. 저도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주위 분들의 도움이 컸어요. 물건을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 공부와 경험을 쌓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김씨의 꿈은 청소년 수련관을 짓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과거 같으면 그저 막연히 꿈에 그쳤을 그 꿈도 이제 이룰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전 항상 열심히 살지는 않아요. 일주일에 3일만 열심히 일해요. 경매를 통해 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거든요. 바쁜 직장인들에게도 일주일에 하루만 시간을 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아마 저처럼 좀 더 빨리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웃음).”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