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함경북도까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길’을 만들어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시사저널」 편집장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그녀는 사람들이 쉽게 보고 지나칠 수 있던 곳에 ‘길’을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주인공이다. 제주의 올레길을 통해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는 그녀를 만났다.
제주도의 관광문화가 바뀌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전용 관광버스를 타고 다니며, 일부 유명한 곳만 구경한 뒤 다시 우르르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제주 관광’의 시대는 지나갔다. 더 이상 사람들은 감귤이나 돌하르방을 구경하기 위해 제주를 찾지 않는다. 대신, 관광객들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며 해안가를 따라서 천천히 걷는다. 이렇게 제주의 관광문화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제주 올레’ 때문이다.
올레란, 제주도 말로 자신의 집에서 마을까지 나가는 골목길을 뜻한다. 이 올레길이 조성된 지는 이제 막 2년 정도가 지났고, 15개의 전 코스를 걸으려면 열흘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제주 올레는 ‘빨리 빨리’를 외치던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걷는 여유’의 의미를 알게 해줬고, 덕분에 패키지 여행상품이 많이 출시되며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다.
이 길을 발굴한 사람은 바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다. 「시사저널」과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했던 그녀. 삶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제주도에서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과 활력을 찾았다. 지난 9월 말에는 제주 올레 덕분에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남들이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단순했던 ‘길’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 숨쉬는 길’로 만들기까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서명숙 이사장은 언론에 23년 동안 몸담고 있던 언론인 생활에 서서히 염증을 느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중학교 때부터 그토록 꿈꾸던 기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반복된 뉴스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다는 것. “정치부 기자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뉴스를 봐도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았어요. 매일 똑같은 정치 뉴스에 질린 것 같았죠. 매너리즘에 빠졌어요. 특히 체력 하나는 자신 있던 제가 40대가 되면서 몸이 굉장히 나빠졌어요.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온몸의 배터리가 모두 방전된 느낌이었죠. 아, 쉴 때가 됐구나 생각했어요.”
걸으면서 나 자신을 수없이 반성했다
“미운 사람, 화가 나는 일, 스트레스 등 답답한 마음이 걸으면서 서서히 풀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잘못도 반성할 수 있게 됐죠. 그래서 걷기 여행을 많이 다니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대한민국엔 마음 편히 걸을 만한 길이 별로 없었다. 수직으로 된 등산로는 있지만, 걷기 좋은 평평한 길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중 ‘산티아고’에 대한 책이 눈에 띄었다. 서 이사장은 그 책을 보면서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오마이뉴스」에서 편집국장 제의가 들어왔고 인터넷 매체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이 있던 그녀는 산티아고행을 뒤로 미룬 채 다시 언론계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년여가 지나자,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져버려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산티아고로 떠났다.
“친정엄마가 저보고 미쳤다고 했죠. 콩나물 팔아가면서 대학 보내놨더니,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고요. 산티아고를 가기 위해 매일 한강변을 20km씩 걸어요. 하지만 떠난 사람만이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법이죠. 주위 사람들의 말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죠. 전 그냥 떠나야만 했어요.”
산티아고의 길은 총 800km였고, 서 이사장이 이 길을 걸었던 기간은 2006년 9월 10일부터 2006년 10월 15일까지 총 36일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과거 잘못했던 일, 부족했던 부분,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 끊임없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걸으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게 바로 그녀가 꼽는 걷기의 매력이었다.
산티아고를 걷는 동안 「순례자」의 저자 파울로 코엘류도 만났다. 그러나 가장 뜻 깊은 인연은 바로 NGO에서 일하는 영국 여자 헤니와의 만남이다. 우연한 길동무 헤니. 그녀는 밝고, 긍정적이며 진취적이고 마음 따뜻한 여자였다.
“저는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5년마다 한 번씩 돈을 모아서 산티아고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헤니는 이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러면서 ‘나는 나의 길을 만들 테니까, 너는 너희 나라에 가서 너의 길을 만들라’고 했죠. 헤니의 말에 큰 감명을 받고 나도 제주도에 가서 한번 길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제주도가 고향인 그녀, 산티아고를 36일 동안 걸으면서 제주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걷는 내내 산티아고보다 고향인 제주도의 자연 풍광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뒤, 「중앙일보」에 산티아고에 관한 기사를 10회 연재하면서 ‘고향인 제주에 길을 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랬더니, 주위에서 ‘언제 제주도에 내려가서 길을 낼 거냐’며 재촉을 해왔다.
좀 더 나이가 든 후에, 천천히 생각해볼 요량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재촉에 결국 계획보다 빨리 제주도로 내려왔다. 우선, 그녀와 친분이 돈독한 한비야, 양희은, 허영선 시인 등과 함께 먼저 제주도의 해안길을 걸어봤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인들의 격려로 한껏 고무된 서 이사장은 드디어 제주에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7년 9월, 사단법인 제주올레 발족식을 갖고, 서귀포시 말미오름-섭지코지에 이르는 제1코스를 개방하면서 세상에 올레의 탄생을 알렸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 올레는 2년 만에 15코스로 늘어났고 길의 총거리도 270km에 달한다.
“길이라는 게 사람이 다닐 때 진짜 길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주에는 오랫동안 다니지 않아서 없어진 길들이 많았어요. 없어져가는 길들을 복원해놓고 사람들이 다니면서 완벽하게 재생된 모습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고 뿌듯한지 몰라요.”
제주 올레를 만들어가면서 서 이사장이 지킨 원칙은 딱 하나다. ‘자연 그대로’ 길을 만드는 것. 끝까지 최신 장비와 자재 사용을 경계했다. 길을 안내해주는 것은 파란색 화살표와 리본이 전부. 화장실과 편의점도 일부러 두지 않았다. 대신 인근 마을에 ‘열린 화장실’로 총 92개를 준비해두었다.
“길을 만들 때 돈을 들이면, 자연의 색깔이 없어져요. 도시처럼 회색이 되는 거죠. 길에 이상한 시설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고 애썼죠.”
“처음에는 제가 제주도에 걷는 길을 만든다고 했을 때 고향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어요. 특히 택시 기사 분들이 매우 싫어했죠. 하지만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니까 이제는 무척 좋아하세요. 이제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집 앞에도 올레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예요(웃음).”
반대하던 주민들이 올레길 홍보 역할
사람들은 올레길을 걸으면서 끊임없는 자아 성찰을 한다. 덕분에 길을 걷다 보면 ‘우울증’과 ‘스트레스’가 저절로 해소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 이사장에게 한결같이 “이런 길을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길을 걷는 동안 진심으로 행복했다”고 말한다.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자연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의 천 마디 위로의 말보다, 말없이 묵묵히 받아주는 자연이 훨씬 큰 위안이 되거든요. 사람들이 올레길을 걸으면서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서 돌아가면 그것보다 뿌듯한 건 없어요.”
때론 이 엄청난 일을 왜 벌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올레길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길을 만들기 위해 힘들었던 기억들도 눈 녹듯 사라진다.
앞으로도 그녀는 수많은 일을 할 예정이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올레길을 개척할 예정이고 간혹 아스팔트로 된 길을 자연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도 할 예정이다.
또 서 이사장은 다른 지역에서 길을 만들 때 ‘올레’라는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가해주고 있다. 꼭 제주도를 찾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라도 온 국민이 길을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이름 붙여진 강화의 올레길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렇게 그녀는 고향인 제주도에서 시작한 올레길이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북도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또 다른 올레 코스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걷고 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사진 제공 / 제주올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