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춘천과 서울에서 태어나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남으로 살아온 엄혜숙씨와 김안남씨. 두 사람은 6년 전 신장 기증자와 수혜자로 만나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면 생명을 나눈 마음 역시 그만큼 특별할 것이다.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다정한 오누이 같다.
이번 겨울 들어 최저 기온을 기록했던 12월의 어느날 밤, 스튜디오에서 만난 엄혜숙씨와 김안남씨가 서로를 얼싸안는다. “잘 지내셨죠? 건강해지셨네”, “혜숙씨도 얼굴 좋아지셨어요.” 반갑게 서로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서로의 건강을 묻는 안부 인사다. 보통 사람들이 지나가며 하는 이 말이 두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인사다. 2003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신장을 주고받은 이들은 그 후 특별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김안남씨는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만성신부전증으로 2년 가까이 혈액 투석을 받던 중 엄혜숙씨를 만났다.
“원래 고혈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다니던 동네 병원에서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신부전증 판정을 받고 종합병원에서 혈액 투석을 시작했어요. 고통의 시작이었죠.”
신장은 우리 몸의 노폐물을 걸러주는 정화조 역할을 하는 장기다. 이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몸속에 노폐물이 쌓이고 여러 기능의 균형이 깨지게 될 뿐 아니라 다른 장기에도 영향을 미쳐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다. 한 번 망가진 신장은 기능을 회복할 수 없다. 만성신부전증 환자는 새 신장을 기증받지 않는 한 평생 혈액 투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종합병원에서 1년간 이틀에 한 번, 4~5시간에 걸쳐 혈액 투석을 받은 김안남씨는 투석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해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인공신장실’을 알게 됐다. 혈액 투석은 물론 필요한 검사와 약까지 모두 무료로 제공하는 곳으로 현재 서울재단본부와 대구, 부산본부 산하 3개의 병원에서 연간 9만여 회의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엄혜숙씨와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투석을 받은 지 1년쯤 지나서 기증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기분은 말로 다 못하죠. 가족 중에 신장이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순수 기증자로부터 신장을 이식받게 됐다는 건 새 생명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당사자가 기증을 결정해도 배우자 혹은 부모가 반대하면 장기기증을 할 수 없는 절차상의 어려움이 있고 기증을 결심했다 하더라도 맞는 신장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엄혜숙씨를 만난 건 기적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일이었다.
2003년 10월 23일 오전 7시, 다시 태어난 쌍둥이
엄혜숙씨가 장기기증을 결심한 건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7년 전쯤 지인 한 분이 간암 선고를 받으셨어요. 병원에서 이식을 하면 산다고 했는데 기증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죠.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평소 기증을 하고 싶다고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생각만 하는 동안 어디선가 생명이 죽어가고 있구나 싶었어요. 장기기증운동본부에 간과 신장 기증 등록을 하고 2주 만에 연락을 받아 김안남씨를 만났어요. 알고 보니 사랑의 인공신장실에서 혈액 투석을 받으면서도 그곳의 다른 환자들을 보살펴주는 봉사활동을 하셨더라고요.”
기증자와 수혜자가 결정됐다 하더라고 수술 전에 당사자들은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그녀가 김안남씨를 처음 본 건 수술이 끝나고 퇴원하는 날이었다.
“퇴원하면서 무균실에 누워 계시는 모습을 봤어요. 그땐 굉장히 편찮으셔서 그저 건강하게 살아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죠. 혼자 조용히 ‘아저씨, 오래 사세요’ 하고 인사만 하고 나왔죠.”
그로부터 1년 후 두 사람의 ‘상봉’은 전화로 이루어졌다. 행여나 수혜자나 가족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망설이던 마음에 미루고 미룬 전화였는데 이심전심이었나 보다. 신장을 이식받고 건강을 되찾은 김안남씨는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을 어찌 전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고. 다리가 불편해 외출이 쉽지 않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틈틈이 전화로 안부를 묻고 서로의 소식을 전하다 보니 어느덧 7년이 훌쩍 지났다. 두 사람은 앞으로는 더 자주 더 많은 활동을 함께하고 싶다고 한다.
30년 넘게 보험회사 영업 일을 해온 엄혜숙씨는 그 일을 계기로 장기기증운동본부 내 ‘새생명나눔회’에서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증자와 수혜자들이 모여 봉사활동도 하고 친목을 다지는 모임이다. 손자를 둔 할머니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며 여전히 일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보험계약서류뿐 아니라 장기기증신청서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각은 있지만 바쁜 직장생활 때문에 장기기증을 신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보험뿐 아니라 장기기증 홍보도 함께한다.
“지금은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기기증’ 하면 장기매매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병원에서 이식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환자들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 심지어 의사와 간호사까지도 ‘얼마 받고 기증하느냐’고 저에게 물어봤을 정도니까요. 가족도 동의한 이식수술을 주변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고요.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기증자와 수혜자들을 만날 때마다 정말 감사하고 보람을 느껴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로 장기기증이 크게 늘었지만 아직도 수만 명의 대기자들이 이식을 기다리고 있어요. 장기기증이라는 씨앗으로 앞으로 더 많은 생명이 꽃을 피웠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에게는 새로운 생일이 생겼다. 바로 수술을 받은 10월 23일이다.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앞으로 50년은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며 웃는 두 사람의 미소가 무척이나 닮았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이성원 ■취재 협조 /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02-363-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