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 흰머리가 많이 늘었네~.” 녹색병원 원장실에 들어선 이혜경(57) 위원장이 남편 양길승(61) 원장을 보고 첫마디를 건넨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녀가 오랜만에 보는 남편에게 반가움 반, 미안함 반을 담아 건넨 인사다. 턱밑까지 기른 반백의 수염 때문인지 허허 웃는 양길승 원장은 도사님 같다. 대학 시절부터 연극을 통해 여성문화운동을 해온 이혜경 위원장과 산재 환자 치료 등 의료보건운동을 펼쳐온 양길승 원장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 부부다. 젊은 시절 서로의 치열했던 삶을 지탱해온 동지는 35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혜경 위원장이 여유롭고 몽상을 즐기는 타입이라면 양길승 원장은 세심하고 꼼꼼하다. 보통 가정에서 아내의 몫인 잔소리도 이 집에서는 남편의 몫이다. 아직도 가끔 전깃불 끄는 문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친구 같은 두 사람이다. 양길승 원장이 맨 처음 아내를 만났던 순간을 펼쳐놓았다.
“1975년 4월 5일, 한국일보 13층이었어요. 당시 제가 지도하던 서클에 있던 학생들이 아내의 연극반 후배들이었어요. 그 후배들의 소개로 만났는데 둘이 너무나 다른 거예요. 왜 소개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요.”
당시 만남을 주선했던 사람은 여성운동가 고은광순씨와 유인태 국회의원의 부인인 이혜경씨다. 이혜경씨는 이 위원장과 이름과 생일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 각각 이화여대 71학번, 73학번으로 ‘큰 이혜경’과 ‘작은 이혜경’으로 불리기도 했다.
“처음 만난 날 남편이 신사복을 입고 나왔는데 소매가 껑충하게 짧더라고요. 얼마나 촌스럽고 어색하던지(웃음). 그래도 눈에서는 광채가 났어요. 제가 「문학과 창조」라는 책을 가지고 나갔는데 만나자마자 토론에 불이 붙었죠. 당시 문화운동을 하며 소위 ‘깨어 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양길승씨만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가던 두 남녀는 추구하는 가치나 철학이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당시 어수선하던 시국을 걱정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열띤 대화는 무교동 유정낙지집으로 이어졌고 막걸리를 한 되씩 비운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다 신념과 취향이 확실했고 생각을 말하는 데는 거침이 없었지만 헤어진 뒤에야 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에 내려서 화장실을 갔을 정도로 쑥스럼을 타는 성격이었어요. 그렇게 만남이 시작돼 벌써 결혼 35년 차가 됐네요.”
놀이형 아내와 절제형 남편, 서로를 바라보다
자유와 낭만에 대한 열정이 컸던 여대생과, 노동과 지하운동에 투신한 남학생.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같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극과 극인 두 사람이었다.
“당시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 눈으로 봤을 때 제가 좀 이상했을 거예요. 함께 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남편처럼 민중 지향적인 투사적 삶은 살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려서부터 뒹굴뒹굴 책 읽고 상상이나 하며 살았으니까요. 전 천성적으로 여유롭고 게으른 사람이에요. 그런 저에 비해 남편의 삶의 태도는 굉장히 원칙적이고 빡빡했어요. 서로가 너무 달라서 우리는 결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이 위원장의 자유로운 성격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의 영향을 받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로 오해받을 정도로 아끼고 나누며 사셨다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6남매가 일요일 아침 날달걀 하나씩을 먹어도 왁자지껄 만찬처럼 즐기는 가정이었다. 이렇듯 물질적 풍요를 떠나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이 위원장에 비해 양 원장은 샐 틈 없이 근검절약하는 스타일이었다.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닐 때에도 가계부 쓰는 걸 빼먹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알뜰함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위원장이 그런 남편의 성격 때문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일화를 소개한다.
아내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양 원장이 ‘고기 한 덩이로 한 달 버티는 법’을 알려준다.
“다진 돼지고기 한 덩이가 우리 돈으로 천원 정도 해요. 그걸 30등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하루에 한 개씩 먹는 거예요. 어디서 고기 뼈라도 얻으면 그걸 고아서 또 한 달을 먹고요. 그때 같이 살던 룸메이트들의 하루 생활비가 저한텐 한 달 생활비였어요.”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양 원장은 장학금을 받으면 독일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돈을 부쳤다. 알뜰한 남편의 세심한 마음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 위원장이지만 결혼 초, 너무나 다른 생활방식에 신혼생활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단다.
“둘이 정말 많이 싸웠어요. 어렸을 때도 늦잠 잔다고 야단 한번 안 맞아봤는데 결혼하고 남편한테 잔소리를 들으니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죠. 제가 누가 시켜서 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에요. 내복 입어라, 전깃불 아껴라 하는 남편 잔소리에 결혼 초에는 ‘비슷한 사람이랑 결혼할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같아도 싸우는 게 부부인데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니 부딪힐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사람은 결혼 초반 10년 중 절반은 떨어져 지냈다. 사회변혁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양 원장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이었다. 맨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도 양 원장은 학생운동으로 수배 중이었다. 1975년 4월에 만나 1978년 2월 결혼할 때까지 수감과 도망을 반복하던 그의 상황은 결혼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힘든 상황이었기에 서로에게 더욱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82년 각각 아일랜드와 독일로 유학을 떠나 떨어져 지낸 기간은 한 발짝 떨어져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전에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인생의 반려자로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듣고 있던 양 원장이 “30년 같이 산 게 아까워서”라며 허허 웃는다. 그 웃음 속에 숱한 암초를 헤치고 35년 세월을 함께해온 부부의 여유가 느껴진다.
사랑은 각자의 세계를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것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이 위원장은 여성문화운동에, 양 원장은 노동자 직업병 연구 등 의료운동에 애정을 쏟았다. 녹색병원도 그 산물이다. 환자를 수용해 가두는 병원이 아닌 환자의 삶의 여유를 넓히는 개념을 바탕으로 지어진 녹색병원은 임옥상의 그림 44점을 비롯한 100점이 넘는 조형물, 환자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과 옥상정원까지 갖춘 ‘병원 같지 않은 병원’이다. 병원 하면 떠오르는 약 냄새도 나지 않는다. 원래 이곳은 1970년대 ‘YH무역’이라는 가발 공장이었다. 공장이 문을 닫고 이런저런 풍파를 거쳐 은행 관리를 받고 있던 것을 인수해 2003년 9월 문을 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일 수도 있어요. 리노베이션하기 전에는 미로도 많고 음침했던 곳을 빛이 들고 자연 환기가 잘 되도록 고쳤어요. 환자와 직원들을 위해 기존의 병원 이미지를 깨고 싶었어요. 병원 안에 문화 수용을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그런 걸 보면 제가 이혜경씨랑 살며 교양을 많이 쌓았죠(웃음).”
양 원장이 이 위원장을 통해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알았듯 이 위원장도 양 원장에 게 받은 것이 많다. 그가 하는 일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격려도 그 중 하나다. ‘일 벌이기 좋아하는’ 아내가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건 남편의 외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로 12회를 맞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는 이 위원장의 열정과 땀, 그리고 양 원장의 소리 없는 후원이 녹아 있는 셈이다.
“영화를 통해 여러 다양한 인생을 간접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잖아요. 영화제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삶을 만날 수 있는 소통과 우정의 공간이에요. 그 즐거운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죠. 제가 일 벌이는 걸 참 좋아해요. 그만큼 힘든 순간도 많고요.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남편이 든든한 힘이 되죠. 각자 사는 줄 알았는데 함께 사는 거구나 느끼고 참 고마워요. 사람이 자기 세계를 가지고 산다는 게 중요하고 또 그 세계를 위해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게 사랑인 것 같아요. 한 개인이 열정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영역에서 더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게 사랑 아닐까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가슴 아파 하는 아내에게 양 원장은 “퀴리 부인도 자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그 자식들은 항상 그녀를 자랑스러운 엄마로 기억하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엄마의 인생을 생각했을 때 행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겠소”라고 위안했다. 다른 부부들처럼 서로에게 작은 일상 하나하나 정성을 쏟아주진 못했지만 위기의 순간엔 틀림없이 힘이 돼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줬다. 이혼 사유 중 절반 이상이 ‘성격 차이’이라지만 두 사람은 “안 맞아서 못 사는 거 아니다”라고 말한다.
치열하게 싸우고 치열하게 사랑한 베테랑 부부가 몸소 겪고 깨달은 천금 같은 조언이다. 이 부부의 10년 후 모습이 궁금해졌다.
“글쎄요. ‘그래도 우리 잘 살아온 편이야, 잘 살았어’ 이러면서 손잡고 같이 걸어가고 있겠지요.”
너무도 달랐던 두 사람은 서로의 모난 모습을 깎아 둥글게 만들기보다 그 모습 자체를 인정하고 아껴주며 살았다. 그렇게 지낸 35년의 세월이 어느새 닮아 있는 두 사람의 미소에 묻어났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