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분야보다 아줌마의 불모지로 통하는 스포츠계에 대한민국 주부들의 매운맛을 보여줬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실제 모델 임오경. 지난 2008년 14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고 실업핸드볼팀 사상 첫 여성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받아들었을 때, 그녀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뛰었다. 또 한 번의 도전을 위한 설렘 그리고 여자 임오경으로서 시작할 제2의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편집자 주)
‘인터뷰는 원래 바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지만, 김진세 박사와 임오경 서울시청 여자 핸드볼팀 감독의 인터뷰 일정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가족 모임이 있는 날, 임오경 감독의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다. 덕분에 카메라에 찍힌 엄마의 모습을 보고 “예쁘다”를 연발한 딸 세민이와 서글서글한 인상의 여동생이 ‘인터뷰 현장’에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김진세_ 가족 모임이 있으신데, 인터뷰 때문에 폐를 끼치는 거 같네요.
임오경_ 마침 오늘이 형부 환갑이라서 가족이 다 모였어요. 그래서 모임 마치고 바로 뵈려고 저희 집으로 오시라고 했는데, 인터뷰하시기에 괜찮으시겠어요?
김진세_ 저는 괜찮아요. 주변 경관이 참 좋은데요. 석촌호수와 롯데월드도 보이고요. 롯데월드에는 자주 가세요?
임오경_ 일본에서 지낼 때 한국 방문 때마다 아이와 함께 갔어요. 요즘도 자주 가죠. 그런데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놀이기구는 못 타요.
김진세_ 세상에! 천하의 임오경 감독이 고소공포증이 있다고요?
임오경_ (웃음) 처음 이 집에 이사 와서는 무서워서 베란다에 나가지도 못했는걸요. 오죽하면 한강 다리도 못 건넜겠어요.
김진세_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세요. 핸드볼은 몸싸움이 심한 운동이잖아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임오경_ 이상하게도 핸드볼은 두렵지 않아요. 그런데 다리는 정말 무서워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웃음).
김진세_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어느 날 야구부가 없어지고 핸드볼부가 생겼어요. 그 덕택에 체육시간에 핸드볼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임 감독님이 쓴 「인생기출문제집」을 보니까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하면 공에 맞는다. 그러니 똑바로 쳐다보고 피하지 말고 잡아라’고 쓰셨던데요. 핸드볼 공에 맞으면 무지 아프잖아요. 그 공에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해지더군요.
임오경_ 타고난 거 같아요. 저는 코트에 들어가면 달라져요. 신발 끈을 묶는 순간 180도 달라지거든요. 아프다가도 그 순간에는 힘이 나요. 온몸의 근육이 늘어져 있다가도, 딱 자리를 잡고 팽팽하게 긴장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몸도 날쌔지고 힘도 세지는 거 같아요.
김진세_ 핸드볼이 여자가 하기에 절대 만만한 경기는 아니잖아요. 체력 소모도 많고요. 임 감독님은 원래 체력적으로 강한가요?
임오경_ 아주 강한 편은 아니에요. 경기를 하다 보면 움직여야 할 때와 그러지 않아야 할 때를 알게 돼요. 그러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는 아주 빨리 움직일 수 있지요. 그걸 두뇌 플레이라고 하죠? 선수 시절에는 두뇌 플레이에 능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상대 선수들의 심리도 잘 읽어요. 그래서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판단하고 반응하는 것 같아요. 감독을 하면서도 선수들의 심리를 다 꿰뚫어요. 사람을 조정하는 일이 가능하거든요. 그걸 나쁜 데다 쓰면….
김진세_ 네에? 그러지 마세요(웃음).
임오경_ 농담이죠(웃음). 그런 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선수들의 심리를 알고 있으면 그들을 이해하고 또 지시를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돼요.
김진세_ 서울시청 여자 핸드볼팀 사령탑 역할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대학원 수업까지 듣는다면서요?
임오경_ 네. 실은 몸이 아파서 어제는 결석을 했어요. 여간해서는 절대 빠지지 않는데….
김진세_ 봐줄 사람이 없을 때는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갈 정도로 수업에 철저하시다고 들었어요.
임오경_ 그런 편인데, 어제는 너무 아파서 주사를 맞고 좀 쉬었어요.
김진세_ 아이고, 그럼 인터뷰가 힘들겠어요?
임오경_ 아니에요. 이제 힘이 나요. 제 천성이 그런가 봐요(웃음).
끼 많고 잔정 많은 스포츠계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진세_ 듣자 하니, 장학금도 받으셨다면서요?
김진세_ 너무 바쁘신 거 아니에요? 내일 아침에는 생방송 출연도 하신다면서요.
임오경_ 그것도 체질인가 봐요. 제게 그런 끼가 있는지 몰랐어요.
김진세_ 끼라니요?
임오경_ 뭐랄까, 만능 엔터테인…스포츠우먼(웃음)? 핸드볼 발전을 위해서 방송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제 체질에 맞아요.
김진세_ 아, 예전에 탁구대표팀 현정화 감독 인터뷰 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바쁘고 힘들지만 탁구 발전을 위해서 방송 출연도 하고 인터뷰도 나서는 거라고.
임오경_ 네, 저도 그래서…. 그런데 사람들이 참 웃겨요. 제가 큰돈이나 인기를 바라고 방송에 나가는 줄 안다니까요. 한 푼 건진 거 없어요(웃음). 예전에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났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어요. 한 수 배운 거지요. 또 웃긴 일이 있어요. 사람들이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고 극중 김정은씨와 저 임오경을 헷갈려하는 거 아세요?
김진세_ 그럴 수 있겠네요.
임오경_ 영화 속 캐릭터를 현실의 존재와 혼동하는 거죠. 물론 ‘우생순’으로 여자 핸드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저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점도 있지만 오해하시는 부분도 많아요. 극중 김정은씨 남편이 자살하는 설정으로 나오잖아요? 제 처지가 진짜로 그런 줄 아는 분들도 있고요. 그래서 이번에 대학원 논문 주제를 현실과 픽션의 경계에 대한 것으로 삼아보려고 구상 중이에요.
김진세_ 재미있겠어요. 임 감독님이야 영화 이전에도 워낙 핸드볼계에서 대단한 분이셨잖아요. 일본에서 지도자 생활 오래 하셨지요?
임오경_ 대학 졸업 후에 갔으니까, 스물세 살 때부터 일본에서 지냈어요.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많이 어렸거든요.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운동을 해야 했어요. 거기다 감독까지 하려니 보통 일이 아니었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 덕에 일본어 실력도 늘고,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더라고요. 일본 사람들과는 좀체 친해지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제가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이라서 먼저 마음을 열어 보이니 잘 지낼 수 있었어요.
김진세_ 임 감독님이 워낙 퍼주는 스타일이시라면서요? 평소 성격은 어떠세요?
임오경_ 코트에서는 악마지요(웃음). 하지만 코트만 벗어나면 천생 여자예요. 제가 일본팀으로 이적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혼자서 뭘 해먹고 살겠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일본에 오셔서 제가 밥하고 빨래하고 사는 거 보더니 깜짝 놀라시더라고요(웃음).
김진세_ 어머니조차 딸의 그런 여성적인 면을 모르셨군요(웃음).
임오경_ 제가 또 나쁜 일은 금방 잊어요. 긍정적이지요. 한번은 일본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누가 봐도 꼭 이겼어야 할 시합인데 그만 지고 만 거예요. 그래서 양아버지께서 혼을 내실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으신 거예요. 그저 “수고했다”고만 하시고요. 다음날 저녁식사를 함께하다가 제가 여쭤봤어요. “따끔하게 야단을 맞고 나면 훌훌 털고 잘 해낼 텐데, 왜 혼을 내지 않았느냐”고요. 그랬더니 “어차피 마음 아픈 것도 임 감독이 더할 것이고, 또 패배하면 이후에 더 열심히 하는 성격을 아는데 뭐 하러 혼을 내느냐”고 하셨어요. 그때 어른들께 한 수 배웠어요. 혼을 내기보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요.
김진세_ 정말 좋은 교훈이네요. 그런데 양아버지가 있으세요?
임오경_ 일본에 두 분의 양아버지가 계세요. 제가 몸담았던 소속팀 회장님과 부회장님이요. 저를 친딸만큼이나 아껴주셔서 그렇게 불러요.
김진세_ 어딜 가나 사랑받으시네요(웃음). 임 감독님은 형제도 많으시죠?
임오경_ 저희가 2남 6녀예요. 제가 다섯째 딸이고요.
김진세_ 그래서 이름이 오경이라면서요?
임오경_ 네(웃음).
낯선 이국 생활에서 비로소 깨달은 가족애
김진세_ 어릴 때는 어떤 아이였어요?
김진세_ 그런 성격이 언제쯤 변했나요?
임오경_ 고등학교 시절인 거 같아요. 핸드볼 선수로 리드하는 역할을 많이 하게 되면서 성격이 변했어요. 동료들에게 먼저 지시해야 하는 일을 맡다 보니 내성적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늦으면, “왜 늦게 들어오시느냐”고 막 나서기도 했어요(웃음).
김진세_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임오경_ 가족애가 강하세요. 2남 1녀의 둘째 아들이셨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큰아버지의 역할까지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하셨어요. 그런데 저와는 별로 정이 없어요. 굉장히 엄하셨거든요. 고3 때인가, 크게 한 번 혼이 난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소원해졌어요. 오히려 요즘 더 친하게 지내요.
김진세_ 어머니는요?
임오경_ 무척이나 희생적이시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한때 아버지가 외도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다 참고 지내셨어요. 제가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갖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에요. 아이를 낳고 나서 느끼게 된 감정이죠. 솔직히 그 전에는 가족에 대해 잘 몰랐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핸드볼을 시작해서 중학교 때부터는 합숙생활을 하느라 집에 거의 없었거든요. 또 대학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거의 가족과 지내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일본에서 혼자 어렵게 키우는 동안 가족이 참 많이 그립더라고요. 그때 절실함을 느꼈어요. 오늘 같은 날도 다른 형제들 집 다 놔두고 저희 집에 모이잖아요(웃음).
김진세_ 어릴 때 별명이 있었나요?
임오경_ 짱구! 앞뒤 짱구잖아요(웃음). 집에서는 ‘때국인’이라고 불렀어요.
김진세_ 때국인이요?
임오경_ 저는 눈에 쌍꺼풀이 있잖아요. 그런데 언니들은 하나같이 쌍꺼풀이 없어요. 게다가 머리카락 색깔도 약간 노란데다가 파마까지 해놔서 꼭 외국 아이 같다고 때국인이라고 불렀어요. 어릴 적에는 정말 제가 주워온 아이인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들 하잖아요? 전 정말 그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가족과 더 소원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어요(웃음).
김진세_ 핸드볼 중계를 보면 코트 안에서는 참 무서우시던데, 오늘 뵈니까 쌍꺼풀도 그렇고 보조개도 예쁘고 정말 여성적이시네요.
임오경_ 아유, 무슨 말씀을요(웃음). 사람들은 제가 보조개 수술을 한 줄 알아요. 저도 여자니까 예뻐지고 싶기는 하지만, 무서워서 얼굴에 칼은 못 대요.
김진세_ 운동선수도 여자인데, 왜 예뻐 보이고 싶지 않겠어요?
여 전사에게도 찾아온 우울의 그림자
김진세_ 이렇게 자기관리 철저하고 강한 분이라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 같네요. 언제가 가장 힘드셨어요?
임오경_ 아마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끝나고 나서일 거예요. 그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어요.
김진세_ 우울증이라니?
임오경_ 가정 문제라서…. 두 번이나 죽으려고 시도를 했는데, 딸 세민이가 저를 살려주었어요.
김진세_ 많이 힘드셨나 봐요.
임오경_ 혼자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일본에서 팀 지도하랴, 아이 키우랴 정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어요. 너무 힘이 드니까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더라고요. 지금은 후회하고 또 후회하지만, 그때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진세_ 당시 일본에 남편분이 계시지 않았나요?
임오경_ 저는 가정을 이뤄본 적이 없어요. 아이 아빠를 만나 결혼하는 과정 자체가 남다르거든요. 아이 아빠가 프러포즈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때 갑자기 그 사람이 복통을 호소해서 병원에 갔더니 복막염이라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수술하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밖에 없으니 어떡해요. 제가 보호자가 되었죠. 수술비도 다 대고, 또 입원해 있는 동안 돌봐줬어야 했고요. 그러는 동안 회사 사람들이 문병을 오고… 누구냐고 물으면 “결혼할 사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거예요. 그래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수술을 못 받았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김진세_ 생명의 은인인 셈이네요.
임오경_ 생명의 은인이죠. 결혼 후 남편도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제 소속팀이 있는 히로시마와 무려 800km나 떨어진 곳이었어요. 1, 2주에 한 번씩 봤지요. 그런 상황에서 아이가 생긴 것도 신기하죠.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운동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갓난쟁이를 데리고 훈련장에 나갈 정도였으니 제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김진세_ 주변의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이 못 되었군요.
임오경_ 게다가 제 성격이 워낙 남에게 뭘 맡기지를 못해요. 집안일이며, 세민이 양육이며 다 제 손으로 하다 보니 많이 아프기도 했어요. 제발 남편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시기에, 남편이 없었어요. 도저히 이렇게 해서는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힘으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서 자살이라는 몹쓸 결심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살다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우리 부부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가족 이야기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제가 알렸어요.
김진세_ 떨어져 지내신다는 기사는 저도 읽었습니다만.
임오경_ 실은… 남이 되었어요. 아이 아빠 상황 때문에 미루다 1년 반 전쯤 서류 정리를 마쳤어요. 이야기를 하자면 복잡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있었고, 상처를 많이 받았죠.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해요.
김진세_ 아이 걱정이 많으셨겠어요.
임오경_ 딸아이도 알아요. 잘 받아들이고 의젓하게 적응하고 있어요. 요즘은 우리 사이가 더 가까워져서 아이가 신이 났어요. 전에는 근처에 사는 이모가 세민이를 돌봐줬거든요. 이렇게 얘기하면 세민이 이모가 서운해할지 모르지만, 제가 공부를 봐주고 나서부터 성적도 많이 올랐어요.
비로소 돌아보게 된 여자 임오경의 삶
김진세_ 세민이가 운동하겠다는 얘기는 안 해요?
임오경_ 엄마 같은 사람 되겠다는 얘기를 자주 해요.
세민_ 언제? 나 선생님 할 거야! 유치원 선생님 될 거란 말이야!
임오경_ 너, 엄마처럼 된다고 했잖아(웃음)!
김진세_ 세민아! 엄마도 선생님만큼 훌륭한 사람이야!
세민_ 저도 알아요. 우리 엄마 훌륭해요. 그래도 선생님 할 거란 말이야.
임오경_ 늘 장래희망이 이랬다저랬다 해요(웃음). 제겐 세민이가 정말 소중해요. 저 아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김진세_ 그러게 말이에요. 감독님, 요즘은 아이가 스포츠 스타로 자랐으면 하는 부모들이 많잖아요. 그런 엄마들을 위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임오경_ 영재 체육 교육을 하는 곳에서 강의를 하는데, 우리 때와는 정말 다르더군요. 소위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장난이 아니에요. 아이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사소한 것부터 챙기는 열성이 대단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부모 욕심으로 휘두르면 아이들은 금방 지쳐요. 오히려 운동에 대한 흥미를 잃고 지겨워하게 되죠. 그 점을 유의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진세_ ‘만약 운동선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운동선수가 아닌 임오경의 삶에 대해서요.
임오경_ 예전에는 운동에만 빠져 있어서 그럴 겨를이 없었고요. 2년 전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평범한 여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동안 못 해본 것 좀 해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죠. 그래서 무도장에도 가고 사우나에도 가봤는데 재밌더라고요(웃음). 실은 제가 숫기가 없어서 누군가 제 얼굴을 알아보고 말 걸지 않으면 제가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그런데 여자 사우나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여자들끼리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웃음).
김진세_ 어떤 이야기요? 재미있는 거 하나만 들려주세요.
임오경_ 아유,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인데…. 60대 할머니가 수술을 하고 막 자랑을 하시는 거예요.
김진세_ 성형수술이요?
김진세_ 저희 독자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임오경_ 저는 한국에 와서 놀란 게 남자는 너무 소심해지고, 여자는 강해졌더라고요. 제 동생만 해도 남편이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면 항상 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동생 남편은 저를 참 좋아해요.
김진세_ 편을 들어주시니까?
임오경_ 그런 것만은 아니고요. 제가 동생에게 “남편이 바깥일을 하다 보면 늦을 때도 있고, 술을 한잔 하고 올 때도 있다.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지 마라”고 하거든요.
동생_ 언니! 내 이야기하는 거야? 이런!
임오경_ 그래서 너, 내 얘기가 플러스가 됐어, 안 됐어?
동생_ 몰러!(웃음)
임오경_ 제 동생이지만, 제 얘기를 듣고 삶이 달라졌다고 해요. 취미도 만들고 운동도 하고 뭔가를 하려고 하니까 스스로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트러블도 적어졌다고 해요. 그런 얘기를 왜 하느냐면, 매일 눈 빠지게 남편 퇴근하기만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뜻이거든요.
김진세_ 감독님께서는 아주 힘든 상황까지 가셨었잖아요. 무엇이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이 됐을까요?
임오경_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기고 나서 이렇게 살게 된 뒤, 가족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했어요. 그동안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언젠가 방송에서 제가 약을 먹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걸 보고 부모님을 비롯해서 가족 모두가 눈물을 흘렸어요. 부부 문제로 제 마음고생이 그렇게 심했다는 걸 가족은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거든요.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드린 적이 없었으니까요. 비로소 “내가 죽을 만큼 힘들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게 낫겠느냐, 헤어지는 게 낫겠느냐”라고 하자, 그렇게 완고하던 아버지도 “헤어져라”고 하셨죠.
김진세_ 어려운 고비를 정말 잘 이겨내셨어요.
임오경_ 딸이 저를 살렸다고 생각했는데, 저를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을 떠올리니 아마도 제가 평생 죄인으로 살 거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때만 해도 가족은 모두 내 마음을 알겠거니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던 거죠. 이후로 마음을 고쳐먹었고 지난 3, 4년 동안은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됐어요.
김진세_ 가족의 진한 사랑을 그때 느끼신 거네요.
임오경_ 네.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헤아리게 된 것도 큰 힘이 돼요. 요즘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단 밖에 나가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왜 나쁜 생각을 했었나,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곤 해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힘, 가족
김진세_ 좋은 일도 많이 하시더라고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전·현직 스포츠 스타들의 모임인 ‘함사모’ 활동도 하고 계시죠?
김진세_ 딸 교육에 대해서도 나름의 원칙이 있으시겠어요?
임오경_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라”는 얘기를 자주 해요. 딸아이가 친구랑 싸웠는데 자기가 먼저 맞았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아이 편을 들기보다는 “네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상대방이 그럴 리가 없다. 원인 제공을 했겠지”라고 이야기해요. 세민이가 워낙 그런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집에 아이들이나 동생들이 놀러오면 씻기고 먹이고 잘 챙겨요. 사촌동생들이 잘 따르죠. 제가 부모님께 배운 것처럼 제 성격을 배운 거죠. 그런데 저도 가끔은 자기 것 잘 챙기는 ‘꼼생이’가 부럽긴 해요.
김진세_ 꼼생이라고요?(웃음)
임오경_ 자기 돈 관리 꼼꼼하게 잘하고, 실속 차리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되지는 못할 거예요.
김진세_ 그렇게 살지 마세요. 임 감독님과 어울리지 않아요(웃음)
임오경_ 그런가요(웃음)?
김진세_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세요?
임오경_ 운동하느라 못 했던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그건 나이를 먹더라도 변하지 않더라고요. 일본어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영어 강습을 받고 있어요.
김진세_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임오경_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이지, 목적을 두고 산 적은 없어요. 다만 할 수 있다면 핸드볼을 뛰어넘어 스포츠 전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그러려면 일단 제가 그만 한 능력을 갖춰야겠죠. 지금은 준비를 하는 단계인 거죠.
김진세_ 원대한 포부로 들리는데요.
임오경_ 제가 박사 과정 앞두고 있다고 하니까, “교수 되려고 그러느냐”는 분들도 있는데, 절대 그런 계획으로 공부하는 건 아니에요. 또 저희 팀 성적이 점점 좋아지니까 “이젠 대표팀 감독을 해먹으려고 그러느냐”며 저를 경계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절대 그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거든요. 태릉선수촌에서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서(웃음).
김진세_ 그래도 맡으면 잘하실 거 같아요.
임오경_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언젠가 제가 맡게 된다면 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표팀 감독을 하기 위해서 제가 한국에 들어온 건 아니라는 거예요. 저는 다만 제가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 또 때가 되면 원치 않아도 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욕심을 내지 않는 거예요. 그럼에도 욕심이 많다, 악바리다, 억척 아줌마다, 라는 얘기들이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김진세_ 그런 반응에는 어떻게 대응하세요?
임오경_ 처음에는 저도 그런 거에 민감했는데, 제가 좀 긍정적인 마인드가 있어요. 해답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아, 그 사람 입에서 쌍시옷이 나올 만하겠다’며 수긍이 되기도 하죠. 그래도 “일본에서 부귀영화 다 누리고 먹고살 만한데 왜 한국에 와서 남의 자리를 빼앗느냐”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참 많이 아프더라고요.
김진세_ 상대의 입장이 되어본다는 게 정말 중요한 해법이거든요. 임 감독님은 워낙 능하실 거예요. 상대가 있는 경기를 하다 보면 상대를 읽지 않을 수 없잖아요. 타고나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수많은 경기 속에서 깨달으셨을 거 같아요.
임오경_ 말씀을 들으니 그러네요.
김진세_ 이제 임 감독님의 여자로서의 꿈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임오경_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면서 그동안 모든 힘든 일을 제 손으로 해왔잖아요. 생각해보면 화가 나요. 저도 좀 연약한 여자 입장에서 ‘나 이거 못해’ 하고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하고.
김진세_ 사랑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
임오경_ 네. 진짜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고 싶죠. 전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인 저 자신에 대한 애정이 더 생겼어요.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남편에게 밥을 잘해주는 그런 여자이고 싶고, 남편에게 사랑도 받고 싶고…. 또 디자이너 같은, 여성스러운 직업을 가지고 살고 싶어요. 과격한 게 아니라(웃음).
김진세의 에필로그
임오경의 오기(傲氣), 따뜻한 심장을 가진 철의 여인
‘철의 여인’을 상상했다. 임오경 선수가 키 큰 서양 선수들을 비집고 인상을 쓰며 슛을 내리 꽂는 장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이를 악문 강한 여 전사를 상상했을 것이다.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뽀얀 피부의 아리따운 30대 여성을 만났다. 한껏 멋을 부린 검정색 반지와 함께, 왼쪽 귓불에는 두 개의 피어싱이 있었다. 쌍꺼풀이 멋지게 자리 잡은 두 눈은 부드러운 미소로, 여 전사와의 대면을 앞두고 주눅 들어 있던 필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입가의 보조개는 오랜만에 보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그것이었다. 여성스러움은 딸 세민이 이야기를 할 때,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낼 때,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인한 상처를 돌아볼 때, 더욱 도드라졌다. ‘따뜻한 심장’이 느껴졌다.
핸드볼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거꾸로 혼란스러웠다. 핸드볼은 몸싸움이 심하고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투쟁적인 스포츠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가 말했다. 신발 끈을 묶으면 온몸의 근육이 싸울 준비를 한다고.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검투사가 떠올랐다. 헷갈렸다.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당대 최고의 스포츠 우먼이다. 세계대회를 석권하며 수년간 MVP를 독식했고, 전 세계 유수의 핸드볼 클럽들의 스카우트 대상 0순위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그녀는 현실 속에서도 최고임에 틀림이 없다. 무엇이 그녀를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을까? 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 아줌마들을 무서워하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오기(傲氣)’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전적 의미로 오기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지만, 결코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고 했다. 왜?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으니까.
혼나기 싫어서, 책상 밑에 숨기 싫어서, 남이 시키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해 지적받을 일을 만들지 않았던 어린 오경이는 물론이고, 말도 제대로 못하던 내성적인 아이가 동료들을 리드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한 것도 그녀의 ‘오기’ 때문이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것도 2부 리그에 머물렀던 팀을 3년 만에 1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도 그녀의 지치지 않는 오기 때문이었다. 절대 안 된다던 아줌마 부대의 힘으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것도 역시 그녀의 승부사다운 오기였다.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남들의 질투와 시기를 뒤로하고, 한국 핸드볼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역시 핸드볼을 사랑하는 그녀의 오기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워나가야 하는 녹록지 않은 상황을 이겨나가는 엄마의 오기가 필요하다.
그녀는 소원했다. ‘다시 태어나면 아주 여성스러운 여인으로 태어나 사랑받고 싶다’고. 안타깝게도, 그녀는 모르고 있나 보다. 이미 그녀는 무척이나 여성스럽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뜨거운 심장을 가진 그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만 한다면, 강한 여 전사는 물론이고 끈질긴 오기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임을.
긍정의 힘을 보태는 선물 임오경이 권하는 한 권의 책「인생기출문제집」 ‘인생기출문제집’이라… 독특하고 재미있는 제목이지요.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멘토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두 21인의 유명 인사들이 그들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임오경 감독님도 그 중 1인으로 ‘당신은 두려움과 눈을 마주칠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글을 쓰셨습니다. 시속 100km로 날아오는 공을 마주본다? 타이틀은 섬뜩하지만 읽어보면 용기가 생기는 글입니다. 참, 작년 12월호 긍정의 힘 인터뷰의 주인공 ‘에드워드 권’의 글도 있네요.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임오경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인생기출문제집」(북하우스)을 보내드립니다. |
임오경은…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2004 아테네 올림픽 한국 여자 핸드볼 결승전 현장에 그녀가 있었다. 1971년생. 정읍 동신초등학교 4학년 시절 키가 크다는 이유로 핸드볼 공을 잡은 이래, 한국 여자 핸드볼의 전성기를 이끈 우리 시대 대표 여성 스포츠 스타다. 강인한 체력, 여우 같은 패스, 절묘한 슛으로 코트를 장악한 ‘악바리’ 임오경의 이면에는 아이 낳기 이틀 전까지 경기에 나가고 출산 2주 만에 다시 운동화 끈을 묶어야 했던 인고의 시간이 있었다. 1994년부터 일본 메이플 레즈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몸담으며 14년간 일곱 번의 우승을 안겼던 그녀는 2년 전 서울시청 여자 핸드볼팀 감독직을 수락하며, 또 한 번의 신화에 도전하고 있다.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잘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다. 「마흔의 심리학」(공저)을 쓰고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를 번역했으며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에 이어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을 더했다.
■기획&정리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강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