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심은경입니다.”
그녀와 한국의 인연은 특별하다. 1975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을 처음 찾았고 충청남도 예산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1978년부터 여러 나라를 돌며 외교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4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1987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 정무팀장으로 근무했다.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순간으로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을 때를 꼽는다. 당시 동료 교사가 지어준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다. 이제 중년이 된 학생들은 여전히 그녀를 따뜻한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한국 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한글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임기가 시작된 2008년부터는 ‘cafe USA’와 ‘심은경의 한국 이야기’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며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1월 중순, 그녀는 그동안 보고 느낀 한국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담은 에세이 좥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좦를 출간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가 궁금하다.
SayⅠ 외교관 엄마의 교육법, 함께 터득하며 살기
나는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심과 개척정신을 몸으로 익히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어릴 적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고 그 과정에서 배운 도전에 대한 열정은 내가 조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살아갈 때마다 나를 굳건히 지탱해주었습니다.
1986년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나 또한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들을 기르는 데 전념했습니다. 나의 직업상, 아들이 어떤 학교에 갈 수 있는지, 언제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지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일을 하는가도 아들의 진로를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또 내 아들은 나를 따라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는 데 융통성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점을 교육시키려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가령 우리가 유고슬라비아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그곳에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와 아들은 항상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나는 가급적 틈날 때마다 집중적으로 아들과 많은 추억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등산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등 외부 활동으로 아들과의 연대감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어릴 적 아들은 바쁜 외교관 엄마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이 돼 자기의 삶을 잘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아들은 지금 보스턴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자신의 일과 삶에 매우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SayⅡ 삽살개 두 마리가 가르쳐준 한국
한 마리만 가져오기에는 강아지들이 너무 예뻐서 결국 암컷 두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돌아오면서 강아지들한테 지어줄 이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침 강아지 분양자가 나에게 준 명상에 관한 책 두 권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한 권은 「여유」라는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무심」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여유’와 ‘무심’이란 단어가 강아지를 키우기에 좋은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아주 멋진 단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들에게 각각 ‘여유’와 ‘무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여유와 무심이라는 단어를 영어 단어 하나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관해 한국 친구들에게도 조언을 구하고 미국 친구들에게도 이 단어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번역이 안 되는 개념들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철학이나 사고방식 같은 더 큰 주제를 얘기하게 됐고, 나에게 한국 문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언어를 잘 모른다고 해도 배움은 그만 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여유와 무심이는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번역하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SayⅢ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물 주세요”
많은 분들이 내게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는지 물어봅니다. 나는 아직도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1975년 7월 서울에 왔을 때는 날씨가 매우 더웠습니다. 에어컨은 어디에도 없었고 나는 목이 너무 말라 거의 탈수 상태였습니다.
“물 주세요.”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배운 한국어 문장입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예산으로 발령이 나 이동하기 전까지 청주에서 10주 동안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예산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어가 갖고 있는 음악적인 부분들도 익혔고, 그때의 경험은 내가 외교관이 된 이후에 보다 공식적인 언어 교육을 받을 때 도움이 됐습니다.
모국어와 너무도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오페라와 같은 고차원적 음악을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페라가 지닌 아름다움과 풍부함에 더욱 매료되듯, 나는 한국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킵니다. 한국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대한 나의 존경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갑니다. 한글 홍보대사로서 내가 한글에 대해 꼭 알아야 하는 사항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Say Ⅳ워싱턴에서도 한식 예찬, 평생 먹고 싶은 맛
한국에 다시 돌아와 느꼈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언제나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근무한 곳에서 항상 한국 음식을 찾았습니다. 나는 워싱턴DC에서도 한국을 전혀 방문해본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한식을 대접하는 것을 즐겼으며, 내 친구들은 한식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놀라움을 표현했습니다.
1970, 80년대 한국에 살 때 나는 집에서 먹든 외식을 하든 전체 식사에 어울리는 반찬을 정하는 데 고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찬과 금방 지은 밥, 맛있는 국, 그리고 마지막에 내오는 뜨끈한 숭늉이 있는 정통 한정식 식당을 찾아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 같은 식사의 핵심에는 늘 신선한 나물이 있었습니다. 내게 한식이란 항상 신선한 채소였습니다. 예컨대 나는 백반과 제철 반찬들을 좋아합니다.
맛, 건강, 음식의 수준 유지에서 한국은 최고 중 하나입니다. 만약 누군가 내게 평생 한 종류의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하니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한식일 것입니다. 다만 좋아하는 한국 요리를 딱 한 가지만 고르라고는 하지 마세요.
■ 정리 / 윤현진 기자 ■사진제공 / 중앙북스 ■참고 서적 / 「내 이름은 심은경입니다」(캐슬린 스티븐스 저, 중앙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