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9월 19일 대구구장은 야구팬들로 넘쳐났다.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양신’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보기 위해 이틀 밤을 지새운 팬도 있었다. 아버지, 삼촌, 이모, 오빠 그리고 나와 내 아이의 기억에도 영원한 ‘맨 인 블루’로 기억될 양준혁의 두 번째 인생을 위한 축포는 그렇게 쏘아 올라졌다. (편집자 주)
김진세_ 어떤 호칭이 좋으세요? 선수라고 불리는 게 좋으세요, 아니면 요즘 강의하면서 듣는 교수님 호칭이 좋으세요?
양준혁_ (웃음) 저도 저의 정체성을 잘 모르겠습니다. 선수가 제일 좋은데, 이제 선수는 아니죠. 그렇다고 코치도 아니고.
김진세_ 영원한 양준혁 선수 아닐까요! 앞으로 또 어떤 시도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은퇴하면 운동선수는 전후 생활이 많이 달라지나요?
양준혁_ 많이 변하죠. 만날 그라운드에서 뛰다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김진세_ 지난 9월에 은퇴하셨죠?
양준혁_ 네, 9월 19일에 했습니다. 한국시리즈 마치고, 10월 26일에 정식으로 구단과 인사하고 나왔죠.
김진세_ 불과 한 달밖에 안 됐네요.
양준혁_ 네, 어떻게 보면 사회의 신인이죠.
김진세_ 힘든 건 없나요?
양준혁_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마지막으로 구단에 인사하러 갈 때는 굉장히 두렵고 서글프기도 했는데, 다행히 허전할 새도 없이 스케줄이 많아요. 바쁘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김진세_ 제2의 인생도 잘 헤쳐 나가실 거란 생각이 들어요. 아주 어렸을 때 어떠셨는지, 얘기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양준혁_ 저는 야구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어떻게 보면 부모님이 저한테 손을 드셨죠. 제가 동냥을 해서라도 야구를 하겠다고 했거든요.
김진세_ 왜 그렇게 야구가 하고 싶으셨어요?
양준혁_ 우리 집안이 야구 집안입니다. 삼촌도 야구를 하셨고, 사촌 형(양일환)은 지금 삼성 투수 코치하고 계시고요. 아버지와 야구를 워낙 자주 보러 다녔어요. 당시 대구상고가 한창 야구 잘할 때였거든요. 그때는 고교 야구가 최고였잖아요. 사촌 형이 투수였는데, 그 모습이 무척 멋있어 보였죠.
김진세_ 어떻게 보면 아버님 손에 이끌려 야구를 접하고, 주변에 야구하는 분들이 많은 덕분이었네요. 야구밖에 몰랐다고 봐도 되겠죠?
양준혁_ 네, 지금도 거의 야구 얘기밖에 하지 않으니까요.
김진세_ 레전드, 준혁 학생, 위풍당당 등에 이어 요즘은 ‘양신’이라고 불리는데, 어렸을 때 별명은 뭐였어요?
김진세_ 그럼 언제부터 지금의 체격이 되신 거예요?
양준혁_ 대학교 가서요. 3학년 때부터 옆으로 가더라고요(웃음).
김진세_ 지금은 키와 몸무게가 어떻게 되나요?
양준혁_ 188cm에, 몸무게가 프로필에는 95kg으로 나오거든요.
김진세_ 그럼 95kg으로 하죠(웃음).
양준혁_ 100kg 해도 됩니다(웃음).
김진세_ 워낙 야구에 빠져서 지내셨지만, 청소년기에 성장통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양준혁_ 사춘기 때 별다르게 겪은 건 없어요. 왜냐면 저는 어릴 때부터 야구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컸기 때문에 별로 변치 않았던 거 같아요. 오히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집안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해서 크게 흔들린 건 없었어요.
김진세_ 그게 일종의 힘이 된 거네요. 꼭 해보겠다는 집념 같은 거?
양준혁_ 네,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있었어요.
야구에 대한 집념, 소년의 잡념을 묻다
김진세_ 양 선수의 야구에 대한 애정도 깊었지만, 아버님께서도 아들이 야구선수가 되길 많이 바라셨던 거죠?
양준혁_ 아버지는 (삼촌을 포함해서 저까지) 선수 뒷바라지를 50여 년간 하셨어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야구장을 제일 많이 가신 분이라는 기록도 갖고 계실걸요.
김진세_ 아버님과 특별하시겠네요. 양준혁에게 아버지란?
양준혁_ 아버지는 밖에서는 매니저 역할을 참 잘하셨는데, 집에서는 굉장히 무뚝뚝하셨어요. 가장으로서는 빵점이에요. 무엇보다 생활을 책임져야 할 분이 그런 거에 대한 책임감이 거의 없으셨죠. 그래서 어머니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파출부, 단무지 장사에 공장에도 다니시고. 저희를 먹여 살린 건 어머니죠.
김진세_ 어머님에 대해서 애틋하시겠어요?
양준혁_ 그렇죠.
김진세_ 어떤 야구 전문 블로거가 쓴 글을 보니 어머님을 여장부라고 표현했더라고요.
양준혁_ 네. 어머니 성격이 시원시원하세요.
김진세_ 야구 덕분에 청소년기를 무난하게 보내셨다고 하지만 그 시기가 보통은 이성에 눈을 뜬다거나, 여러 가지에 호기심을 가질 시기잖아요. 유혹이라고 표현해도 되려나. 그런 건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양준혁_ 전 목표의식이 강했고, 다행히 저희 집안이 술을 잘 못 마시거든요. 그런데다가 제가 영남대에 진학했어요. 만약 대학교를 서울로 갔더라면 아마 호기심이 발동해서 많이 놀러 다녔을 거 같아요. 내심 지방대라 가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참 잘한 결정이었어요.
김진세_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양준혁_ 저는 어떤 결정을 할 때는 항상 최선책보다는 차선책을 택했어요. 고등학교 갈 때도 경북고가 아닌 대구상고를 갔어요. 왜냐면 경북고에는 잘하는 애들이 다 모여 있었기 때문에 아마 제가 갔으면 1, 2년은 허송세월을 보냈을 거예요. 저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대구상고에 가서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를 했거든요. 대학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김진세_ 그때는 의도적이셨던 거예요?
양준혁_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찌감치 대학을 결정했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다가 누님도 시집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실은 제가 영남대로부터 얼마간 장학금을 받았어요. 또 그 당시 영남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이셨어요. 저는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서 영남대로 결정을 내렸는데, 그 감독님이 프로리그로 가버리시더라고요. 제가 의도했던 게 어긋나버렸죠. 대학에 가서도 그다지 행복한 시절을 보내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고생을 많이 하고, 많이 얻어맞고 했던 게 지금은 보약이 된 거 같아요. 저는 진짜 대한민국 야구선수 중에서 제일 많이 맞았어요. 엄청 맞았습니다.
김진세_ 특별히 다른 선수보다 더 많이 맞은 이유가 있었나요?
양준혁_ 고등학교 때 감독님이 저보고 영남대에 가라고 푸시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도장을 찍었는데, 며칠 뒤에 그 감독님이 영남대로 가더라고요. 제가 그분 밑에서 고1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아주 대한민국에서 악독한 감독, 독종 감독으로 유명하셨거든요. 그분 방법이 한마디로 두들겨 패고 보는 스타일이라 엄청 맞았죠. 저는 그래도 웃으면서 맞고 “감사합니다” 했거든요. 그런 게 감독님 눈에는 예뻐 보이고 ‘될 놈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겠죠. 그래서 저를 키워주셨어요.
김진세_ 양 선수를 믿는 감독님이셨네요.
양준혁_ 그렇죠. 대학 가서도 머리 빡빡 깎여가지고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기 힘들었거든요. 돌이켜보면 그런 것들이 기본기를 착실히 쌓을 수 있게 해준 거예요. 근성도 많이 생겼고. 두들겨 패면 진짜 안 되는 게 없어요(웃음).
양준혁_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어서 그렇지만, 그게 벌써 20년도 훨씬 전 일인데요. 그때는 정말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거죠(웃음).
명품은 계속 신상품을 내서 명품이다
김진세_ 지금 아시안게임이 한창인데, 양 선수께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던 거 같아요.
양준혁_ 대학 때 잠깐 했었지, 국가대표로 활약한 적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미완의 대기 같은 상태였죠. 저는 프로리그 가면서 꽃을 피웠죠.
김진세_ 데뷔 첫해 신인왕에 이어, 여러 가지 타이틀이 많잖아요. 그걸 ‘레전드’라고 부르는데, 결코 한두 해 동안 생긴 게 아니잖아요.
양준혁_ 아유, 그럼요.
김진세_ 저는 양준혁 선수의 긍정의 힘은 거기서 나온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양준혁_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명품이라는 게, 저는 역사가 오래되어서 명품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항상 신상품을 내더라는 거죠. 그렇듯이 저는 타격 폼도 항상 변화를 추구했어요. 매년 신상품을 내듯이. 제가 한창 야구하던 1990년대만 해도 직구, 슬라이드, 커브 이 세 가지가 전부였거든요. 지금은 투수들이 열 몇 가지씩 던집니다. 발전을 하거든요. 과거에 잘했다는 타성에 젖어들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인드나 타격 기술을 자꾸 업그레이드시켜야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었죠. 보통은 옛날에 ‘잘했다, 잘했다’ 하면서 자꾸 옛날 생각만 하거든요.
김진세_ 과거에만 안주한다는 말씀이군요?
양준혁_ 네. ‘옛날에 내가 어떻게 했는데!’ 이런 거 아무 소용 없습니다. 진짜 필요 없는 거예요. 오로지 현재와 미래가 중요한 거지. 전 야구 할 때도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어요. 저는 한 게임에 올인하는 스타일입니다. 다음 게임 생각 안 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고. 하여튼 전 다른 사람들보다는 그런 면에 일찍 깨어 있었어요.
김진세_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생겼나요?
양준혁_ 2002년에 슬럼프를 크게 겪으면서 처음으로 (타율) 3할에 실패했어요. 하던 대로 해서는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 같아서 그때까지 치던 타격 폼을 다 버리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타격 기술을 다시 쌓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만세 타법입니다.
김진세_ 그게 정말 어려운 건데요. 대부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동 패턴을 바꾸기가 힘들거든요. 대단하세요.
양준혁_ 버린다는 게 참 힘들죠. 지금 마흔둘이 됐습니다만, 보통 어느 정도 스타급 선수들은 과거 전성기 때 잘 쳤을 때의 기분이나 마인드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자신도 모르게 한 살씩 먹어가고 있고, 몸이 변한다는 걸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은 거죠. 나는 나를 정확하게 진단했거든요.
김진세_ 그러셨군요.
양준혁_ 물론 저도 생각은 한창 때와 똑같았어요. 나가기만 하면 홈런 칠 거 같고!
김진세_ 맞아요, 맞아요.
양준혁_ 그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스타일수록, 어느 정도 맛을 본 사람들은 그걸 버리기가 쉽지가 않죠. 제 나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본다는 거예요. 저는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습니다. 인정할 건 빨리빨리 인정하죠. 냉정하게 보고 바꿔야 해요. 버리는 과정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그 전까지는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김진세_ 최고셨죠.
양준혁_ 나름 누리던 영광을 버리려면 일단 두렵죠. 아스팔트를 걷다가 밀림에 들어서야 하는 거잖아요. 당연히 어려웠죠.
김진세_ 남들과 다르게, 어려운 것을 버리고 새로 만들 수 있는 힘이 뭘까요?
양준혁_ 남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한테 좀 불만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만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항상 아쉬워요, 모든 게.
김진세_ 그런 마인드는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양준혁_ 저는 항상 내 자신을 꾸준하게 들여다보고 빨리 인정을 해요.
김진세_ 그게 어떻게 보면 학창 시절 엄청나게 때렸던 스승님이 체력적으로 강하게 만들긴 했겠지만, 또 스스로를 냉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준 것 같기도 하고요.
양준혁_ 네. 감독님이 저를 패면 어쨌든 밉잖아요? 근대 그걸 액면 그대로 보지 않고, 속을 자꾸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김진세_ 아, ‘왜 그랬을까’ 하고요?
양준혁_ 네. ‘이 사람이 내가 미워서 그랬을까? 아니다. 이건 오히려 나를 위한 거다.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구나.’ 주로 나한테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요. 누구나 자신의 단점을 파고들면 보이거든요. 그 단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제 자신에게 처방을 내려요.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풀어나가죠. 거의 항상 그랬어요, 저는.
김진세_ 2002년 전의 이야기를 하자면, 야구를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나요?
양준혁_ 야구를 그만둔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김진세_ 2002년 전에도, 그 후에도?
양준혁_ 2002년에 저에게 슬럼프는 왔지만, 그 다음해에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인데, 분명 해답은 있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문제죠. 보통, 사람들은 방법을 몰라서 못하는 거잖아요?
김진세_ 그렇죠.
양준혁_ 만세 타법도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제가 개발한 거니까요. 타격 코치한테 도움 받은 거 거의 없어요. 야구로서 코치를 받은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걸 끄집어내서 야구와 접목을 많이 시켰죠. 예를 들어 낚시를 통해 집중력을 키워서 공을 보는 선구안을 키워내는 거죠. 검도를 하면서도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니라 짧게….
김진세_ 스냅을 줘서?
양준혁_ 네, 파리채 때리듯이 딱! 공 때릴 때 그렇게 하거든요. 일반 사람들이랑 다르게 때리는 걸 개발한 거죠. 쿵푸를 하면서.
김진세_ 아, 쿵푸를 하셨어요?
양준혁_ 고등학교 때 배웠습니다. 당시에 제가 너무 말랐다고 코치가 쿵푸 도장에 몇 달 다니라고 하더라고요.
김진세_ 슬럼프에 빠졌을 때 굉장히 괴롭고 힘들잖아요.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김진세_ 어떻게 극복해내셨나요?
양준혁_ 이 시기만 잘 지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슬럼프가 길어질 때, 저는 야구는 그냥 놔버리고 오히려 내색을 하지 않고 팀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땅도 고르고 벤치에서 “파이팅”도 외치고.
김진세_ 안그래도 힘들었을텐데요.
양준혁_ 그러니까 오히려 팀에서 더 인정을 받았죠. 다들 제가 슬럼프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야구를 던져 놔버렸던 것도 ‘나는 다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슬럼프가 오면 저는 오히려 바닥을 쳐버립니다. 페이스를 떨어뜨려버립니다. 그래야 바닥을 쳐서 올라오지, 물에 빠졌는데 허우적거리면 용만 쓰고 안 되거든요.
지독한 슬럼프,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로
김진세_ 지독한 슬럼프가 있었던 2002년 이후, 다른 양준혁 선수가 된 건가요?
양준혁_ 네. 만세 타법을 만들어내서 2003년에는 제가 최고 속력을 냈어요.
김진세_ 정말 바닥을 치고 올라온 거네요.
양준혁_ 네. 땅을 완전히 쳐버렸죠. 그러면서 만세 타법으로 마흔두 살까지 야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에게 있어 터닝 포인트가 됐죠.
김진세_ 슬럼프로 인해서 재기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선수들도 많은데, 대단하세요. 양준혁 선수가 들려준 말씀 중에 좋았던 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을 만만하게 봐주지 않는다’라는 것인데요, 은퇴를 한 지금 시점에 또 필요한 생각이잖아요.
양준혁_ 그렇기 때문에 변화된 삶에서도 정말 잘 적응하려고 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김진세_ 이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나요?
양준혁_ 지도자도 생각하고 있고요. 유소년 청소년 야구에 관심이 많아서 그 쪽으로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김진세_ 프로선수가 선망의 직업이잖아요. 자녀를 그렇게 키우고 싶은 부모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양준혁_ 보통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는 게 많거든요. 그러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게 해주세요. 자아가 형성되면서 본인이 느끼게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요. 마음껏 뛰어놀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진세_ 양준혁 선수야 워낙 본인의 의지로 지금까지 오신 분이지만, 부모들 입장에서는 아이를 마냥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양준혁_ 아버지께서 삼촌부터, 사촌 형까지 야구 뒷바라지를 하셨지만 저에게 “야구를 해라”, “이렇게 저렇게 해봐라”라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보통 자기 아들이 게임을 뛰면 얼마나 애가 닳으시겠어요? 안타를 치면 벌떡 일어나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관중석에서 그냥 보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십니다. 뭐, 박수 정도는 치십니다. 그냥 조~용히 오셨다가 경기하는 거 보고 조~용히 집에 가십니다. 저도 그냥 아버지가 ‘와계시겠지’ 할 뿐이지요.
김진세_ 이제 좀 이해가 되는 것 같네요. 보통의 부모처럼 야구장을 찾아서 맹렬하게 응원하시는 분일 거라 짐작했는데, 아니셨군요. 아버님께서 야구를 선택하는 데 도움은 주셨지만, 야구를 꼭 해야겠다는 집념은 양 선수 스스로 키운 거네요.
양준혁_ 모든 결정은 저 혼자 다 했어요.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도 그렇고 프로리그 가는 것, 이번에 은퇴하는 것까지 아버지와 상의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부모님과 상의해서 되겠어요? 마음 약해져서 안 된다고요. 나는 은퇴를 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번에 해야겠는데, 부모님은 당연히 말리시겠죠. 제 마음이 흔들릴까봐 그냥 “은퇴합니다, 아버지” 이렇게 말씀드렸죠.
양준혁_ 힘들지만 저는 항상 차선책을 선택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번에도 (은퇴가 아닌) SK나 다른 팀으로 가서 선수생활을 2년은 더 할 수 있었지만, 더 큰 어떤 것을 본 거죠. 그런 큰 결정을 할 때는 제가 나름 잘해왔거든요.
김진세_ 지금 돌이켜보면 다 좋은 선택이었잖아요?
양준혁_ 네. 대구상고를 간 것도 잘한 결정이었고, 대학을 정한 것도 그렇고요. 다른 구단에서 백지수표를 제시했는데도 삼성을 선택할 당시, 쉬운 결정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군대 다녀와서 삼성에 들어가 그해 신인왕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저는 눈앞에 있는 것보다 항상 미래의 가치를 더 따집니다.
김진세_ 그것도 아주 중요한 긍정적인 부분이에요. 요즘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 수강 신청 하는 것조차 엄마와 상의할 정도로 자율성이 없거든요. 양 선수의 이런 모습은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합니다. 스스로 힘든 결정을 내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내시잖아요.
양준혁_ 제가 은퇴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게 양준혁청소년야구대축제라는 대회를 유치한 거예요. 야구를 가르쳐서 물론 박찬호 같은 선수를 키우는 것도 좋겠지만, 일반 학생들에게 야구를 통해서 인생을 가르치고 싶어요.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선후배 간의 예절, 친구 간의 우애, 자기희생, 때로는 홈런도 있죠. 요즘 청소년들이 점점 인터넷에 빠져서 음지로 가는데, 스포츠 특히 야구를 통해서 인생을 배우고 나아가 사회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야구를 하면 아이들이 건강하고 건전해집니다. 지난 2년간 야구를 가르친 아이들을 보면 학업 성적도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김진세_ 아, 그래요?
양준혁_ 마음껏 뛰어놀다 보니 더 공부에 집중하게 되더란 얘기예요. 와세다대와 도쿄대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갔을 때 보니, 한강 둔치 같은 곳에 만들어진 야구장에서 꼬맹이들이 바글바글 경기를 하는데 잘 돌아가더라고요. 그러면서 인사도 딱딱 잘하고, 경기 마치면 자기네들이 땅을 다 고르고.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걸 야구를 통해서 가르치더라고요.
김진세_ 앞으로 그런 계획이 양준혁 선수의 꿈 중 하나에 속하는 건가요?
양준혁_ 그러니까 제 꿈은 야구감독이 아니고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제가 표현력이 좀 없는데, 더 큰 어떤 그림을 그리는 거 같아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에 맞서는 도전
김진세_ 스트레스는 많이 받는 편이세요?
양준혁_ 네, 많이 받는 편이에요.
김진세_ 어떻게 푸세요? 양준혁만의 스트레스 푸는 법?
양준혁_ 우린 공을 때리잖아요. 미친 듯이 때려버려요(웃음).
김진세_ (웃음) 그럼 스트레스가 풀리세요?
양준혁_ 운동장 밖까지 보내버리니까(웃음). 그런데 문제는, 이제 공을 때릴 곳이 없다는….
김진세_ 매니저께서 강연으로 풀라고 하시는데요(웃음). 요즘 자주 강연을 하시던데 주제가 뭔가요?
김진세_ 아까 말씀하신 슬럼프를 이기는 방법 같은 내용이 담긴 건가요?
양준혁_ 네, 그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요. 그런 얘기를 하니까 직장인들이 크게 공감하더라고요. 분야는 다르지만 다 비슷하니까요. 그리고 저같이 운동하는 사람의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다들 좋아하대요. 사투리도 팍팍 쓰고 하니까(웃음). 저 들으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다들 아주 좋았다고 하시거든요. 전문 강사들을 보면 무슨 박사는 기본인데, 저는 좀 특이하잖아요.
김진세_ 야구에 있어서는 박사죠. 누가 따라가겠어요. 오늘 뵙고 보니 양준혁 선수께서는 한 가지를 꼽기 힘들 정도로 긍정적인 힘이 많으시네요.
양준혁_ 저는 솔직히 긍정적인 편이에요. 아메리칸 스타일 비슷해요. 스물한두 살쯤의 어린 친구들도 저를 못 따라올 때가 많아요.
김진세_ 비결이 있나요? 젊은 마인드의 비결?
양준혁_ 항상 새로운 걸 추구하는 거죠. 새로운 것은 먼 데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걸 본인이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 차이일 뿐이죠. 저는 어릴 때부터 야구장에서만 야구를 한 게 아니라 생활의 모든 걸 야구와 연관시키며 살았어요. 저에게는 모든 것이 다 야구의 도구였습니다. 밥 먹을 때는 젓가락을 야구 ‘빳다’로 생각했고요.
김진세_ 얘기를 들어보니 어린 시절 야구가 너무 좋아서 집안의 어려움도 내가 이겨 나가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야구 자체가 인생이 되었군요. 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게 계속 발전이 된 거 같아요.
양준혁_ 네. 물이 고이면 썩게 되죠. 자꾸 새 물을 가져다 넣어야죠.
김진세_ 행복하세요?
양준혁_ 아직까지는 행복합니다.
김진세_ 행복이란 무엇인 거 같나요?
양준혁_ 행복이요? 뭐 그게 크다고는 생각이 안 들고요. 어떤 일들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살아가면서 뭐랄까, 조그마한 것에서도 성취하면서 느끼는 그런 행복.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정의는 잘 못 내리겠네요.
김진세_ 충분히 와 닿아요. 참,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그런 질문 많이 받죠?
양준혁_ 내가 연애를 되게 오래했어요.
김진세_ 진짜요? 야구와 연애하셨다고 할 거 아니죠?(웃음)
양준혁_ 그건 아니고요. 야구도 정말 사랑합니다. 사랑하지만, 오래 사랑하던 연인이 있었어요.
김진세_ 대학 시절이요?
양준혁_ 아니, 서른 살 때요.
김진세_ 그럼 제일 잘나가실 때잖아요? 누구죠?
양준혁_ 여자죠(웃음).
김진세_ (웃음) 일반인인가요? 연예인인가요?
양준혁_ 일반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니고 좀 명확하지 않습니다.
김진세_ 지금은 관계가 다 정리된 거고요?
양준혁_ 그럼요(웃음).
김진세_ 요즘은 쉬면서 뭐 하세요? 아, 트위터 보니까 산에 자주 가시는 거 같던데요.
양준혁_ 어떨 때는 그냥 집에서 넋 놓고 있기도 하고요. 낚시 갈 때도 있고요.
김진세_ 트위터는 어떠세요? 재밌나요?
양준혁_ 재밌어요. 팬들과 소통하는 데는 트위터가 괜찮은 거 같아요. 어떤 때는 야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나는 답을 줘야 하니까 책도 찾고 엄청나게 공부도 합니다. 제 생각을 말했는데, 어떤 때는 틀린 답을 할 때도 있어요.
김진세_ 그럼?
양준혁_ ‘미안하다(웃음). 제대로 찾아서 다시 올려주마’라고 하고, 친한 심판 형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고 다시 글 올려주죠.
김진세_ 저도 트위터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아직까지는 재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양준혁_ 팔로워들이 따라다니면 질문하고 대화 주고받고 하면서 부지런해야 해요.
김진세_ 참 아까, 맞팔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양준혁_ 아, 네! 선팔 감사합니다(웃음).
김진세의 에필로그
양준혁의 무한 도전, 무모하지 않은 도전 정신
솔직히 말하자면, 야구를 잘 모른다. 그래도 그는 안다. 하늘로 방망이를 내던지는 듯한 ‘만세 타법’도 눈에 띄었지만, 볼을 치고 1루까지 달릴 때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마치 1루까지만 달리고 경기를 끝낼 기세로 ‘사력(死力)’을 다해 달리는 모습. 성실하다고 할까 아니면 근성이 있다고 할까,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프로 야구 사상 통산 타격 8개 부문(최다 홈런, 최다 안타, 최다 2루타, 최다 루타, 최다 타점, 통산 사사구, 통산 다수, 통산 득점)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것은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흔둘의 나이임에도, 여러 구단에서 러브콜을 보냈던 타자. 기록의 사나이 ‘양준혁 선수’는 한국 야구계의 진정한 전설이다.
그런 그가 은퇴를 했다. 어디에 있었던지, 돌아서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인다. 쓸쓸함에 격이 있기야 하겠느냐마는,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은 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높은 곳일수록 평지에 내려오기는 더 힘드니 말이다. 그는 최고였던 사람이다. 당연히 더 힘들겠거니 하는 생각은, 최근 언론을 통해 보자면 착각이었다. 오히려 은퇴 후에 더 조명을 받는 사람이 된 듯하다. 본업인 야구를 그만두고 더 바빠진 사람. 그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긍정의 힘은 무엇일까도 궁금했지만, 은퇴를 한 이후 그는 어떤 힘으로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더 컸다.
어린 시절 꿈은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 야구를 지독히 사랑해서 ‘대한민국에서 야구장을 제일 많이 찾았을 것’이라 자부하는 부친 덕에 야구를 시작했다. 양준혁의 야구에 대한 ‘무한 사랑’은 야구 집안이라는 태생적 요소와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환경적 요소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프로선수가 될 때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긍정의 파워 배팅이 가장 불을 뿜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때는 2002년 최대의 슬럼프 시점이다. 최악의 순간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은 무엇일까?
그는 슬럼프를 이겨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힘을 빼고, 일부러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둥대지 않고, 그냥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그 순간부터 노력을 하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물에 빠졌을 때와 같다. 당황하지 말고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바닥까지 내려간다. 그러고 나서 바닥을 발로 뻥 차고 올라오면 수면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 슬럼프를 겪을 때 힘들다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고 여유를 갖고 내버려두는 것. ‘현실 인정’과 ‘여유’의 긍정이 힘이 있었다.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법,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수면에 올라왔다고 치자. 근데 수영을 못한다면? 슬럼프에 빠졌다가 다시 정상적인 컨디션이 되기도 쉽지 않지만 다시 최고가 되기는 더 어렵지 않을까? 다행히 그에게는 또 다른 긍정의 힘이 있었다. 타고난 긍정적인 태도와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노력에 의한 자신감이다. 긍정의 태도와 자신감. 그래야만 어디라도 헤엄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길을 떠난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지는 그도 정확히 그릴 수는 없다고 하지만 힘차게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은퇴 후 빠져들기 쉬운 ‘퇴직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그는, 새로운 도전을 즐기고 있다. 스스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젊은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에게 만족하는 삶은 없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벤치를 지키는 후보 선수 신세와 같을 뿐이다. 젊은 마음으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양준혁 선수가, ‘만세 타법’으로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쳐내듯, 제2의 삶에서도 또 하나의 ‘레전드’가 될 날을 기다려본다.
긍정의 힘을 더하는 선물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
어려운 고비마다 혼자의 힘으로 결정을 내렸고 다행히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사는 양준혁 선수가 앞으로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라는 아주 재미있는 책을 선물합니다. ‘에카르트 폰 히르슈유젠’이라는 낯선 이름의 독일인 의사가 쓴 책입니다. 이름 때문에 주눅 들 거 없습니다. 책 내용은 무척 재미있답니다. 저자는 코미디언으로 명성을 날릴 정도로 유머러스한 사람이라니까요. 그가 인용한 ‘행복은 학습되어진다’는 대목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행복은 행복을 맛본 사람만 느낄 수 있다는 뜻도 되고요. 또 외적 조건보다는 내 자신의 인식이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조건이라는 뜻도 되지요. 양 선수! 행복하세요!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양준혁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에카르트 폰 히르슈유젠, 은행나무)를 보내드립니다.
양준혁은…
대구 남도초등학교 4학년 시절 야구를 시작해 영남대를 거쳐 1993년 삼성라이온스에 입단, 프로 데뷔 첫해 이종범과의 경쟁 끝에 신인왕에 올랐다. 후배들을 위해 나선 선수협 파동으로 트레이드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2001년 시즌 이후 친정팀으로 복귀해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타격 거의 전 부문에서 통산 최다 기록을 가진, 자타공인 기록의 사나이는 지난 9월 19일 홈구장인 대구구장에서 은퇴식 및 은퇴 경기를 치르며 레전드로 남았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삼성의 두 번째 영구 결번, 한국 프로야구 사상 아홉 번째 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아쉬움은 금물, ‘양신’은 굵직한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트위터 중계’를 통해 다시 팬들과 만나고 있다. 트위터 @slion10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 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해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으며 노숙자의 자립을 위한 잡지 「빅이슈」에 ‘김진세의 Love Myself’를 연재하고 있다.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외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을 썼다. 트위터 @yourden.
■기획&진행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경향신문 포토뱅크 ■장소 협찬 /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02-567-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