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보내는 편지 (이수향, 34세, 미혼)
“엄마가 내 엄마여서 정말 행복했어. 우리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엄마는 없는데 올해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었고, 뜨거운 태양이 작렬했고, 어느덧 찬바람이 파고드는 겨울이 왔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어.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살려고 하는데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힘이 들어. 여전히 난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못하고, 엄마의 사진을 찾아볼 엄두도 못 내고 있어.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지독한 그리움을 잠재울 방법을 모르니까.
엄마가 요양하던 병원에서 열어줬던 이벤트 기억나?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열린 ‘시낭송의 밤’에서 엄마가 자작시를 낭독했었잖아. 엄마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의료진들 때문에 낭송회장은 눈물바다가 됐었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에 수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었지. 암 투병 중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고울 수 있냐고.
사실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게. 아직도 집에 들어서면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고 환하게 웃으며 맞아줄 것 같은데…. 그 웃음, 그 눈빛, 그 목소리, 엄마가 항상 흥얼거리던 찬송가, 모든 게 아직도 너무나 생생한데….
요즘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들어. 왜 엄마가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지 못했을까. 나 정말 나쁜 딸이었지? 난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고 내 일상에 지쳐 애꿎은 엄마에게 분풀이를 해대곤 했었잖아. 유난히 예민하고 별난 나로 인해 엄마는 참 많이도 울었었지. 그런데도 엄마는 항상 “우리 예쁜 딸”이라고 불러줬고 많이 안아줬잖아. 그리고 항상 내 편이었어.
난 엄마의 아픔을 공유하지 못했고, 일방적인 사랑을 당연한 듯 받기만 했어. 엄마의 지독한 사랑이 답답하고 지겨워서 엄마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내곤 했어. 엄마, 나를 용서해줘. 특히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항상 외롭게 했던 것이 가장 미안해. 병상에서 엄마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엄마는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얼마나 살 수 있다니?”라고 묻던 그 모습….
엄마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난 엄마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그 상황이 너무 괴로워서 매몰차게 외면했고 “왜 엄마는 다른 엄마들처럼 건강하지 못하냐”며 따지고 들었었지. 모든 게 후회뿐이야. 엄마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우린 정말 행복했을 텐데. 난 정말 좋은 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엄마, 뭐가 급해서 그렇게 빨린 간 거야. 난 엄마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인 거 알면서. “먼저 가서 미안하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차마 눈도 못 감고 떠난 ‘우리 엄마’. 엄마에게 주어진 그 시간 동안 좀 더 좋은 추억을 만들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쉽고 미안해. 그리고 모든 게 다 미안해. 엄마가 내 엄마여서 정말 행복했어. 엄마처럼 착하고 현명하고 신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내 엄마여서 난 항상 자랑스러웠고 감사해.
우리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리고 항상 그랬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내 엄마가 돼줘. 그때는 나도 좋은 딸이 될게. 아낌없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둘째 딸(최세연, 36세, 결혼 10년 차)
“딸의 집에서 10년 동안 살림하고 아이들 키워준 엄마, 떠나고 나서야 그 빈자리를 느껴요”
기억나? 10년 전, 엄마가 전화로 “아빠 사업이 망해서 빈털터리가 됐다”고 했을 때 정말 충격이었어. 어쩌다 우리 집이 그렇게 됐을까. 항상 소녀 같은 우리 엄마, 앞으로 어떻게 살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하지만 엄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참 담대하고 씩씩하더라고.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사건이 엄마한테 너무 힘겨웠나 봐. 속병이 쌓여서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고, 그러다 심장병까지 도져서 다시 수술했지.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모든 걸 잃어버리고 둘째 딸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됐잖아.
엄마, 그거 알아? 우리 집에 들어와 지내는 10년 동안 엄마는 꼭 어두운 회색처럼 활력도 없고, 희망도 없이 우울해 보였어.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화려하고 예쁜 거 좋아하고, 구두 좋아하고, 가방 좋아하고,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꼭 빨간색 같은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회색처럼 우울해 보이는 엄마를 보니 참 가슴이 아프더라. 불쌍한 우리 엄마…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동안 엄마랑 진짜 많이 싸웠다, 그치? 10년 동안 그렇게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해주면서 살았는데, 용돈도 안 드리고 나 잘났다고 엄마한테 대들기나 하고 말대꾸하고.
나 진짜 못됐어. 그치? 그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친정엄마니까, 우리 엄마라서 화냈던 거 알지? 내가 시어머니한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어? ‘우리 엄마니깐 내 마음 알아주겠지’하는 마음에 화를 냈던 것 같아! 엄마도 사람이고, 상처받는 여자였는데…. 정말 미안해 엄마.
몇 달 전, 엄마는 우리를 앉혀놓고 “이제는 우리가 이 집에서 나갈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 아이들이 많이 컸는데 엄마랑 아빠 때문에 아이들 공부방이 없는 게,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면서. 우리 나가면 공부방 만들어주라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고 평생 맘속에서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우리가 10년 동안 엄마 아빠를 정말 잘 모시고 살아온 줄 알았어. ‘이만하면 우리도 할 만큼 했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엄마가 10년 동안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엄마가 우리 집을 떠난 지 아직 3개월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엄마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몰라. 엄마가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하며 살았는지, 그동안 난 알면서도 모르는 채 그렇게 그냥 당연한 듯이 살았던 것 같아. 엄마 미안해.
엄마는 항상 “아이들이 지금 한창 자랄 나이니까 밥 잘 챙겨주라”, “신랑한테 잘하라”고 했지. 그런데 엄마가 떠나고 나서 아이들도 잘 못 챙겨 먹이고, 신랑도 잘 못 챙겨주고, 와이셔츠도 못 다려주고 있어. 엄마가 있을 땐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내가 하려니 정말 힘들더라고.
엄마는 나한테 “항상 예쁘다, 괜찮다”고 말했잖아. 그런 것도 입어라. 저런 것도 입어라. 잘 어울린다 등. 엄마는 무조건 예쁘다고만 했지. 내가 봐도 이상한 옷과 헤어스타일인데, 그래도 괜찮다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울 엄마. 언제나 항상 내 편인 우리 엄마.
엄마, 그동안 내가 참 못했지? 앞으로도 엄마 맘에 안 드는 일도, 엄마랑 싸우는 일도 많을 거야. 하지만 그럴 때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게. 엄마… 나도 사랑해.
사랑하는 나의 애숙씨~(김은정, 26세, 미혼)
“엄마는 우리 가족에게 ‘존재’만으로도 참 감사한 사람이에요”
며칠 전 혈액순환도 안 되고 갱년기가 오는 거 같다며 슬쩍 얘기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언니랑 내가 할 수 있는 건 갱년기 여성 영양제를 사드리는 것뿐이었던 게 더 속상했어. 우리 엄마는 안 늙을 줄 알았는데…. 마음으로는 더 자주 표현해야지 하면서 막상 전화 통화라도 하게 되면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지만, 내 마음 그리고 언니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거 알지?
지난주 집 앞으로 단풍 구경 가서도 한없이 쓸쓸해 보이던 엄마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엄마, 오늘은 내가 사진작가니까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라고 하는 순간 엄마는 소녀처럼 창피해했잖아. 하지만 엄마도 그 순간이 행복하고 소중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즐거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사진 속 엄마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여서 나까지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몰라. 그리고 엄마 눈이 많이 처져서 사진 찍기 싫다면서 “에이, 사진은 무슨 사진” 하면서도 오붓하게 데이트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활짝 웃는 모습 보기 좋았어.
앞으로 엄마가 더 많이 웃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먹는 영양제보다 우리들 웃음이 더 큰 영양제가 아니었나 싶어. 엄마를 더 웃게 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자랑스럽고 더 예쁜 딸이 될게. 사랑하는 울 엄마. 아빠와 언니와 나에게 엄마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에요~. 사랑해요 엄마!
사랑스러운 나의 엄마에게 (한아름, 33세, 미혼)
“33년 만에 처음으로 단둘이 떠난 엄마와의 여행, 소녀 같은 모습에 가슴이 짠했어요”
엄마랑 나랑 호텔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웃고 울었던 그 밤이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어.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참 몰랐던 것 같아. 엄마도 마음이 여린 여자고 낭만을 좋아하는 여자였건만 내가 모른 체하고 살았던 것 같아. 그때 엄마가 했던 말 중에 “밥 안 차려도 되고, 편하게 좋은 음식 먹는 게 정말 좋다”고 했지?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어.
미안해 엄마. 그동안 내가 도와주지도 못하고 투정만 부렸어. 많이 반성하고 있어. 결혼할 때가 지난 큰딸 걱정에 한숨부터 쉬는 엄마에게 너무 많이 미안해. 내가 엄마에게 아직도 짐이 되는 것 같아 면목이 없어. 좋은 사람 만나서 엄마한테 멋지게 소개하는 날이 곧 올 거야. 기다려줘 엄마. 올 가을에는 엄마랑 단풍 구경도 못 가고 겨울을 맞이했네. 아쉬워서 어쩌지? 겨울에 아빠랑 눈 구경 가자.
그리고 내년에는 아빠랑 같이 일본으로 여행 가는 거야. 돈 아깝다고 안 간다고 하기 없기야. 큰딸이 내는 거니까 눈 딱 감고 가자. 아프지 말고 건강해. 엄마, 고마워 그리고 너무 너무 사랑해.
서른다섯 노총각 아들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소녀 같은 엄마 (김용운, 35세, 미혼)
엄마. 이렇게 편지로 ‘엄마’ 하고 불러보는 게 5, 6년도 더 된 것 같아.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잡지 못해 비루한 20대 후반을 보내고 있을 때, 엄마가 더 뒷바라지 못해줘서 미안하다며 괜히 본인 탓을 한 적이 많았어. 아마 그 무렵 내 생일날 엄마에게 편지를 썼던 걸로 기억이 나. 잘 키워주신 것만 해도 어딘데 왜 당신 탓을 하냐고 말이야.
엄마. 이제 엄마도 염색을 하지 않으면 검은 머리를 찾아보기 힘든 나이가 됐어. 나보다 딱 30년 먼저 태어났으니 이제 예순다섯. 환갑을 넘긴 나이라 예전이면 할머니라 불렸겠지. 다행히 엄마는 호호 할머니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우울해하지 마. 엄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엄마를 보며 은근히 부러워했어. 네 엄마는 날씬하고 세련됐다고. 여전히 난 엄마가 또래 아줌마들보다 훨씬 날씬하고 세련되었다고 자부해. 게다가 아직 장가를 안 간 아들 덕분에 ‘할머니’도 아니잖아. 그러니 나이를 먹어 자꾸만 깜빡깜빡 잊어버린다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해. 설령 잊어버리는 게 생기면 어때.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라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세월 탓이지.
엄마, 1980년 엄마가 서른다섯 살이었을 때 믿기지 않겠지만 난 그때 다섯 살 꼬마였음에도 엄마의 모습이 기억나. 북아현동 시장 골목에서 장사를 하던, 외할머니 병환 때문에 속상해하던, 아버지가 동사무소에서 당직 근무할 때 야식을 챙겨 가던, 그리고 리어카를 끌고 물건을 떼어오던 모습들. 속 썩이는 아버지 때문에 혼자서 가게 문을 닫고 울던 모습도. 유독 약했던 동생 때문에 마음 졸이던 밤도. 그렇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던 엄마의 서른다섯 살에 비하면 난 아직도 한창 철이 없고 세상물정 모르지.
앞으로도 철이 들 가능성은 좀 없어 보이지만 다행인 건 김선옥 여사께서 엄마로 살아온 세월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지. 적어도 엄마 아들에게 엄마의 30대, 40대, 50대 그리고 앞으로의 삶은 내 인생의 근거이자 자랑이기도 해. 그러니 김선옥 여사님은 거울을 보며 세월 무상하다며 너무 한숨 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들이 장가를 못 간다고 마냥 걱정하지도 말고. 적어도 장가를 가고 싶은데 못 가는 것은 아니니까. 늘 그랬듯이 아들은 알아서 잘해왔잖아. 엄마가 나보고 ‘샘이 많은 성격’이라 했듯이 정작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요즘 연예인들이 많이 하는 ‘혼수’부터 장만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엄마, 편지와 달리 전화를 받으면 늘 퉁명스럽고, 집에 가도 별로 살갑지 않은 아들이란 거 잘 알아.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해서 내가 엄마 앞에서 하는 행동이 달라지지도 않을 거 같아. 그래도 굳이 남세스럽게 이렇게 편지를 쓴 건 마음으로, 속으로 늘 엄마 생각하고 또 기도하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어서야. 내가 힘들고 지칠 때 엄마 생각하면서 다시 기운 차리고 일상에 충실해지듯 엄마도 가끔은 자식들이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힘내고 기운 냈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사실 이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싶어 편지를 썼어. 2010년 12월 3일. 엄마의 만 예순네 번째 생일. 정말 축하해. ‘사랑해 엄마’라고 끝맺기에는 너무 민망해서 ‘늘 기도할게’로 대신해. 미천한 신앙이지만 내 지금껏 해온 기도의 절반은 모두 엄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하늘이 내려준 단비 같은 존재, 생선 다듬으며 오남매 키운 엄마
(김애향, 41세, 결혼 15년 차)
“기억할게요! 절뚝거리는 엄마의 다리는 은혜였음을…”
1년 전 그때도 요즘처럼 낙엽들이 대지를 뒹구는 늦은 가을날이었죠. 그날따라 자정을 지나 새벽이 돼서야 작업을 마칠 정도로 생선들이 많았잖아요. 당신은 지친 몸을 이끌고 트럭에 탄 것도 잠시, 졸음 운전한 기사의 실수로 그만 트럭과 함께 바닷물 속으로 빠져버리셨죠.
온 힘을 다해 바다 물살을 헤치고 트럭에서 빠져나와 손에 집히는 바위 하나에 몸을 기대 간신히 살아난 후, 엄마는 그 와중에도 우리 오남매가 아니었으면 바닷물 귀신이 됐을 거라고 농담까지 했던 게 기억나네요. 하늘이 준 은혜로 살아났다며 그 많던 생선들에 대한 보상금이나 병원 치료비도 전혀 받지 않고, 오히려 트럭을 잃어버린 운전기사 걱정을 하는 엄마를 대할 때는 참 속상했어요. 그분은 받은 은혜에 고맙다고 말하겠지만 절뚝거리게 된 다리를 봐야 하는 이 딸은 그저 가슴만 아프고 이만저만 속상했던 게 아니었어요.
이렇듯 돌아보니 저에게 엄마의 인생은 힘든 것과 아픈 것을 혼자 감수하고 자식들을 위해 다 나눠주며 고통을 떠안는 희생적인 삶이었더군요. 얼마 전에는 결혼 후 지금까지 용돈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한 못난 딸이 이제야 좀 더 넓은 방과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기뻐하시면서 생선 고르는 일하며 모은 적금을 털어 이사 비용에 보태라고 제게 주신 돈, 지금까지도 이렇게 받기만 하는 딸 주기만 하는 엄마의 인생이네요.
평생 고생스러운 삶을 이제는 보상받고 편히 쉬셔야 할 때인데도 지금도 밤이면 선착장에 나가 일당 오만원짜리 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마다하지 않고, 이 딸에게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나눠주려 하시니 불효한 이 딸은 어디에다 고개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 엄마는 이 딸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축복 가득한 단비 같은 존재랍니다. 이 단비를 맞고 살아가는 저도 엄마처럼 어디 가서나 상대방을 돌아보는 삶, 나누는 삶, 보듬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축복의 단비가 되어보고자 해요.
기억할게요! 절뚝거리는 엄마의 다리는 은혜였음을. 언제까지나 사랑해요 엄마….
이제는 함께 흰머리 세며 늙어가는 친구 같은 나의 엄마(이안숙, 51세, 결혼 26년 차)
“제 남은 인생, 맛있는 음식들 찾아 엄마와 함께 여행하며 보내고 싶어요”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지 벌써 4년이 흘렀습니다. 남편과 자식까지 둔 저는 지금도 하늘만 쳐다보면 어딘가에서 절 지켜보고 계실 듯한 아버지 생각에 금세 눈가가 젖어들곤 합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참으시며 외로운 나날을 보내셨나요?
저는 가슴 언저리 한쪽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늘 서러워 울컥합니다.
어머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요즈음 암 투병 중인 올케 언니 건강 문제로 속이 새카맣게 타셨죠? 저도 그래요.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고 아파와요. 하지만 어머니, 생명을 주신 분도 가져가시는 분도 단 한 분 하느님이신데 연약한 우리가 무얼 할 수가 있을까요? 다 맡기고 기도하는 수밖에요…. 아마도 언니는 다시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확신합니다. 어머니도 굳건한 믿음으로 잘 이겨내시리라 믿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셔서 때때로 힘들고 외롭고 슬플 때 기도의 힘으로 큰 위로를 받곤 합니다.
어머니…. 시간을 내서 어머니와 함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재밌는 얘기도 나누며 그렇게 해보는 것이 제 남은 인생의 작은 바람입니다. 언젠가 제 큰아이와 함께 그렇게 해요. 뒤돌아보니 저도 자식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참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세월은 빨리 흘러갈까요? 그나마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배려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맑고 푸르네요. 아버지가 하늘에서 웃으며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어머니가 언제나 행복하게 웃으면서 하루하루를 맞이하길 제가 기도할게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아들의 장애마저 극복시킨 아름답고 강한 나의 엄마 (김민규, 17세)
“체중 40kg의 엄마는 자궁절제 수술을 받고 퇴원한 다음날에도
60kg의 저를 데리고 지옥훈련을 했습니다”
가족과 외식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섞여 앉지 않는 곳으로만 가야 했고 지하철을 타거나 마트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르고 몸을 움찔거리는 통에 언제나 사람들이 쳐다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심한 우울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틱 증상 때문에 먹는 약의 부작용으로 살이 찐다는 것이었는데, 증상이 심한 만큼 약의 용량은 늘어가고 제 몸무게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습니다. 심각한 틱증상과 낮은 지능, 비만과 대인기피증, 우울증…. 내가 가진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된 지금 저는 그 모든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지능 검사를 하면 장애 등급을 받고 하루에 몇 번은 틱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말을 하거나, 한글을 읽거나 쓰는 일, 숫자 셈, 간단한 영어회화는 문제가 없습니다. 한자 실력도 없는 편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더 이상 비만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키 121cm에 체중이 61kg까지 나가면서 혼자서 운동화 끈도 묶지 못했지만 지금 나는 비보이가 되기 위해 연습을 하면서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할 정도로 날렵한 몸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을 빼고 틱 증상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가족, 특히 엄마가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능이 낮고 심한 틱 장애를 갖게 되면서부터 엄마 역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저와 함께 무인도로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엄마도, 저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강했습니다. 언제까지나 길을 찾지 못해 헤매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40kg의 엄마는 60kg의 저와 함께 지옥훈련을 했습니다. 함께 운동장을 뛰고, 등산을 가고, 수영장에 갔습니다. 자궁절제 수술을 받고 퇴원한 다음날도 엄마는 저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함께 뛰어주지 못하는 대신 운동장 귀퉁이에 담요를 깔고 앉아 호각을 불며 나를 운동시켰습니다.
그 결과 저는 이제 비만아도 아니고 틱 증상 때문에 사람을 피하지도 않게 됐습니다. 지능이 조금 낮긴 하지만 엄마와 틈틈이 한자를 익히고 영어회화를 하면서 생활에 불편은 없습니다. 오히려 또래의 친구들이 입시에 시달리며 받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버릇을 갖게 된 것도 일기 쓰기를 거르지 않게 한 엄마 덕분입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자들을 보면 참 예쁩니다. 걸 그룹 가수들도 그렇고,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다들 잘생기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 엄마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귀신처럼 찾아내는 엄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다 아름답겠지만 우리 엄마는 제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언제나 미안한 생각만 드는 우리 엄마
(문수진, 35세, 결혼 10년 차)
“삶을 즐기기보다 삶에 치였던 당신…,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이제야 이해하게 됐어요”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고 아이들과 살며,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했어. 아이들 보다는 나부터 챙길 거라고 생각했고, 내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찾으면서 살 거라고 결심했었지. 하지만 살림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결혼 생활이 그리 쉽지 않았어. 내가 막상 그렇게 만만치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그 옛날 엄마의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더라고. 언제나 삶을 즐기기보다 삶에 치였던 당신을….
요즘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머리도 좋고,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순발력도 있는데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해결책을 생각해내기도 한 것 같아. 나는 지금까지 엄마의 짧은 배움만으로 지혜와 능력을 가늠했었나 봐.
참 신기하게도 우리딸이 꼭 나와 닮았다는 거야. 그래서 더욱 엄마를 생각하게 돼. 내 딸의 모습에서 나를 만나는 거지.
엄마도 나를 보며 그랬을까? 나처럼 생각했겠지? 그래서 이제 더욱 편한 엄마가 되리라 결심했어. 삶에 찌들지 않고 삶을 주도하는 엄마가 되려고. 엄마가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내가 하려고 해. 그리고 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이제 엄마의 삶을 격려하고 싶어.
내가 교회 안에서 매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엽서를 띄우는 일을 하면서 수없이 하는 마지막 말이 있어. ‘사랑합니다’. 이제 엄마에게 나의 미안함과 엄마에 대한 신뢰를 더해서 그 말을 하고 싶어. ‘엄마, 정말 사랑합니다.’
■기획 & 정리 / 김민주·윤현진 기자 ■사진 / 원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