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형 김정철에 비해 승부욕이 강했던 김정은
김정일은 무용수 출신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김정철과 김정은 그리고 막내딸 김여정을 두었다. 1990년 1월 황해남도의 한 초대소(조선노동당과 정부 관계 기관의 특별 시설. 백두산, 묘향산, 함흥, 원산 등 곳곳에 자리해 있다)에서 후지모토씨는 당시 각각 9세, 7세의 김정철·정은 형제를 처음 만났다. 자기소개 시간, 김정철은 후지모토씨가 내민 손을 잡고 흔쾌히 악수를 했으나, 김정은은 일본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 탓인지 한동안 그를 향한 험악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버지 김정일이 “후지모토씨야”라고 다시 소개를 한 후에야 비로소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에서 이 일곱 살짜리 어린 대장은, 마흔 살 어른인 나를 노려보며 등골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했다. 이때 느꼈던 강한 인상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서 마음속에 ‘김정은이야말로 언젠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만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심어놓은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북한 문제 전문가들까지 나의 예측을 무시하고 심지어 비웃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일주일 뒤, 고꾸라지기만 하는 김정은의 연에 후지모토씨가 다리를 달아주면서부터다.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달라”는 김정일의 예상치 못한 지시를 통해 후지모토씨의 북한 생활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당시 측근들은 정철·정은 형제를 ‘왕자들’ 혹은 ‘큰 대장’, ‘작은 대장’으로 불렀다. 후지모토씨가 ‘정은’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고영희가 은연중에 내뱉은 호칭을 통해서였다. 우리 통일부가 기존에 쓰던 김정운에서 김정은으로 표기를 변경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2009년 10월이었다.
정철·정은 형제는 사이가 무척 좋았는데 체형이나 성격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외모상으로는 확실히 김정은이 김정일을 빼닮았다. 얼굴은 물론 체형까지 아버지를 닮아 뚱뚱했고 10대 중반에는 키가 다소 자랐지만, 10대 후반에는 허리둘레만 튼실해졌다. 김정철은 모친 고영희를 닮았는지 늘씬한 근육질 체형이었다. 신장 162cm인 후지모토씨가 자신의 기준에서 추정한 것에 따르면 김정철은 성장한 후 175cm 정도였고, 김정은은 168~170cm 정도라고 한다.
“정은 대장은 어릴 적부터 나를 부를 때 경칭을 붙이지 않은 채 ‘후지모토’라 불렀고, 형인 정철 대장은 ‘후지모토씨’라고 경칭을 붙여 불렀다. 두 사람 모두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만 성격은 정철 대장이 더 얌전했다. 반면 정은 대장은 승부욕이 강하고 응석기가 좀 있었다.”
한번은 형제들과 술래잡기를 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간 후지모토를 보고 장난기가 동한 김정은이 “후지모토,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면서 화장실 문을 흔들어댄 적이 있다. 당시 안쪽에 잠금장치가 없어 문을 잡고 안간힘을 썼던 기억을 회상하며 후지모토씨는 “김정철이라면 그런 장난을 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김정은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1년 후 형제가 구슬 게임의 일종인 오델로 게임을 하다가 김정철이 그만 구슬을 놓치자 이에 화가 난 김정은이 형의 얼굴을 향해 구슬을 던진 일도 있었다. 이 같은 동생의 과격한 행동에도 김정철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을 정도로 온화한 성격이었다. 형제 사이에서도 어떤 놀이를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언제나 김정은이었다. 김정철은 형임에도 동생에 비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일이 별로 없어 보였다.
“정은 대장이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이모님이 평소 부르는 대로 ‘작은 대장’이라는 호칭을 쓰자 김정은이 갑자기 큰소리로 화를 내며 ‘내가 아직도 유치원생인 줄 알아?’라며 이모님을 쏘아보았다. 언제나 형 밑에서 ‘작은 대장’이라고 불린 것이 이날따라 참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10대 후반이 되면서 김정은은 놀이를 할 때도 유감없이 리더십을 발휘했다. 농구 시합을 할 때도 자기 팀 선수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 후지모토의 눈에 김정은은 그저 단순히 남들의 선두에 서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김정은은 사회적인 관심도 형보다 강했다.
“정은 대장이 열다섯 살이었을 때, ‘후지모토, 외국의 백화점에 가서 보니 어디를 가나 물자와 식품들로 넘쳐나서 놀랐어. 우리나라의 상점은 어떨까?’라고 말했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자기 나라와 외국을 비교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위스 유학을 통해 영어의 중요성에도 눈을 떴는지 2000년께에는 열심히 영어를 배우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미 10년 전 북한의 장래를 걱정하던 후계자의 면모
“김정은은 다른 나라에 비해 공업기술이 한참 뒤떨어져 있고, 전력이 턱없이 부족하며, 내세울 것이라고는 지하자원인 우라늄 광석밖에 없는 북한의 실정을 제대로 짚어냈다. 또 북한을 바꾸기 위해서는 중국의 방식을 본보기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듯했다. 북한의 현실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 따위를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릴 적부터 부족함 없이 뛰어놀던 ‘응석꾸러기’의 이미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김정은은 원산 초대소에 머물면서 김정일로부터 중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닐까, 하고 후지모토씨는 이야기한다. 김정일은 이미 형제의 성격 차이를 꿰뚫어보고 있을 터였다. 김정일은 평소 당이나 군 간부들 앞에서도 김정은에 대해 “나를 닮았다”며 만족스럽게 이야기해왔다고. 반면 김정철에 대해서는 “그 녀석은 안 돼. 계집애 같아서”라고 일축하곤 했다.
김정일에게는 1972년 배우 출신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 김정남이 있다. 2001년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밀입국혐의로 체포되어 한바탕 화제를 모은 그는 마카오, 중국 등지에 체류하며 종종 국내외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2008년 김정일의 건강악화설이 알려지기 전만 해도 장남인 정남이 후계자 후보로 언론에 거론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후지모토씨는 그가 유부녀였던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점, 무엇보다 김정일로부터 버림받은 성혜림이 정신병을 얻은 뒤 어렵게 생활하다가 2002년 러시아에서 사망한 점을 들어 김정남이 후계자로 지명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내 주장해왔다.
2009년 북한 내에서는 김정은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김정은의 아홉 살 생일에 맞춰 발표되었던 노래 ‘발걸음’이 북한 전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찬양하는 가사가 담겼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정일은 안정적인 후계 체제는 세습에 의한 길밖에 없다고 봤을 것이다. 건강에 불안감을 느낀 김정일은 살아 있는 동안에 빨리 정은 대장에 의한 후계 체제를 굳혀서 가능한 한 공식 석상에서 정은을 후계자로 등장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설령 후계에 일말의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일에는 절대 거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 보위에 오르지 못한 형 김정철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후지모토씨는 김정철은 동생과 대립하거나 각을 세우지 않고 든든하게 보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이복형인 김정남의 제거 우려에 대해서도 그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다. 처음부터 후계자 경쟁구도에 참여하지 않은 그를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것. 또 후지모토씨는 고영희가 사망한 후 사실상 김정일의 정부인이 된 김옥 역시 김정은을 음지에서 지원하며 그의 후계자 체제를 공고히 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정일의 여인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 그리고 김옥
“김정일에게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직접 보고 알고 있는 ‘사모님’은 고영희뿐이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북한 제일의 예술단 무용수로 활약했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김정일의 열애 이야기는 측근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후지모토씨는 고영희는 언뜻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끄는 미인이라고 했다. 신장이 165cm 정도로 김정일과 나란히 서 있으면 거의 같을 정도로 보였다고. 측근은 물론 수행원들은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요리를 잘했다는 고영희는 김정일의 집무를 돕는 비서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했으며 평상시 김정일의 머리도 직접 잘라주었다고 한다. 단, 파마를 하기 위해 이발사를 부를 때만 빼고.
“1993년 고영희는 프랑스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당시 입원 중인 고영희에게서 온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김정일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고영희는 2004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지만, 후지모토씨는 사인이 뇌경색일 거라고 풀이한다.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오른쪽 반신이 마비된 적이 있으며 재발 여지가 높은 병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50세 전후 젊은 나이의 고영희가 뇌경색을 일으킨 배경에는 그로부터 10여 년 전 유럽 체류 중 미국으로 망명한 여동생 부부로 인한 심적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지난 8월 북중 정상회담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현재 김정일의 실질적인 부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옥에 대해 후지모토씨는 김정일의 제1비서였던 ‘옥이 동지’일 거라 추측했다. 컴퓨터에도 능통했으며 김정일의 스케줄 관리를 담당했던 김옥은 고영희와 함께 김정일이 가는 곳에는 거의 동행했다고 한다. 담소를 나눌 정도로 두 여인의 관계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고.
후지모토씨는 김옥을 1964년생으로 추정했다. 지난 1994년 3월 그녀의 서른 살 생일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서른 개의 초가 꽂힌 케이크를 본 그녀가 “싫어요, 치우세요. 치우지 않으면 나가버릴 터여요”라며 어깃장을 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 대우를 받은 여인은 고영희에 앞서 두 명이 더 있다. 김정남의 친모 성혜림에 이어, 고 김일성 주석의 정식 허락을 받아 결혼식까지 올린 인민보안국 타자수 출신의 김영숙이 그 주인공. 김영숙과의 사이에서는 김설송·김춘송 자매를 두었으나, 후지모토씨는 이번 책에 이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리 / 장회정 기자 ■참고 서적 /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후지모토 겐지, 맥스미디어) ■사진 제공 / 맥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