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인터뷰이 선정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어느 인터뷰인들 안 그랬겠느냐마는, 이제 연재 3년 차에 접어든 만큼 독자들께 감동과 정보, 재미 등등 무엇이든 더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한때 「레이디경향」의 재테크 지면을 풍성하게 해줬던 반가운 얼굴 박경철이 오랜 고민 끝에 나온 해답이었다. (편집자 주)
박경철 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네요.
김진세 다친 데는 없으시죠?
박경철 네. 괜찮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김진세 아니에요. 박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이미 선생님 뵐 줄 알았습니다. 저와 같은 출판사에서 책 내셨더라고요. 대표님으로부터 말씀 들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어느 고깃집에서 뵈었는데, 나이 많고 유명하신 탤런트 선생님하고….
박경철 최불암 선생님이요?
김진세 네. 제가 바로 옆자리에서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진짜 뵙게 됐네요.
박경철 살다 보면 이렇게 만납니다. 한국 사회는 한 다리 건너면…. ‘저분을 언제 뵙지?’ 하면 진짜 만나게 됩니다.
김진세 인연이라는 게 참 소중한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박경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박사님께서 저와 동갑이시네요.
김진세 (웃음) 평소 박 선생님 글을 보면 저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게 확확 느껴지더라고요.
박경철 (웃음) 그러시죠?
새로운 것은, 흥미롭다
김진세 박 선생님 글은 꽤 분석적이에요.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담긴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도 많이 바쁘시죠?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박경철 대중없습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라디오 진행을 하고, 강연 횟수가 좀 많습니다. 벤처기업 사외이사나 경영 자문을 맡고 있기도 하고, 칼럼 쓰는 것도 있고요. 금융계 일이 있으니까 사람 만나는 일도 많네요. 두서없이 사방으로 저질러놓았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일 없는 곳이 병원입니다.
김진세 (웃음) 병원 일은 어떻게 하세요?
박경철 친구들에게 맡겨놨어요.
김진세 진료는요?
박경철 지금은 거의 못합니다. (안동 병원에는) 토요일밖에 못 가니까요.
김진세 여러 가지를 다 소화해내는 선생님을 보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잖아요. 이걸 놓으면 절대 다른 건 할 수 없을 것 같고, 또 진료를 놓는다는 데 대해 약간의 죄책감도 있고요.
김진세 맞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박경철 바뀌는 것은 재밌습니다. 새로운 것을 하면 굉장히 흥미롭고, 누군가 제가 해보지 않은 일을 제안하면 일단 솔깃합니다(웃음).
김진세 주식을 비롯해서 책도 쓰고 방송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 중 어떤 일이 가장 재밌었나요?
박경철 중앙일보에 연재한 인터뷰(박경철의 직격 인터뷰)예요. 아마 지금 박사님께서도 똑같은 경험을 하고 계실 텐데요. 인터뷰 제안을 듣고는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아무리 호기심이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게 당신 속내를 말해봐”라고 하려면 대개 1년은 걸리는데, 인터뷰어가 되면 만나자마자 궁금했던 것을 다 물어볼 수 있고….
김진세 맞습니다.
박경철 불편한 부분까지 다 물어볼 수 있잖아요.
김진세 네. 그게 제일 재밌었던 거군요.
박경철 제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을까? 이 사람의 고민은 뭘까?’ 이런 궁금한 것들을 바로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물어볼 수 있으니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었죠. 1년 동안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번거롭기도 했지만 짜릿했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금의 삶
김진세 최근에 하는 일 중에 가장 의미를 두는 건 어떤 건가요?
박경철 우리 세대가 40대 중반을 넘었지 않습니까. 이제 선배 그룹에 접어들었으니까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본 사람의 시행착오 같은 것들을 들려줘서 앞으로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일이야말로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박사님께서도 마찬가지시고요. 그래서 요즘은 대학생이나 20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멘토링에 가까운 강연이나 대화의 시간을 갖고 있어요. 상당히 즐겁기도 하고 의미의 무게가 큽니다. 5년 전에 제 강연을 들었다는 고등학생이 어느새 의과대학 본과 재학생이 되어서 저한테 메일을 썼더군요. ‘그때 선생님 강연 듣고 지금 이 길을 왔다’고요.
김진세 뿌듯하시겠어요.
박경철 뿌듯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죠.
김진세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박경철 긍정적인 롤모델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직 가치 성숙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가치 판단의 잣대를 심어줄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죠. (그런 메일을 받을 때면) 실시간으로 무게가 확확 다가오죠.
김진세 그럼 박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박경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겸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저는 통찰적이거나 선도적이거나 브라이트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좋게 말하면 우직한 측면이 좀 있고, 나쁘게 말하면 둔했던 거죠. 주어진 공부는 할 만큼은 하는데, 요령부득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저나 부모님이 생각하는 인생의 길이 정해져 있었어요. 공부를 못하지는 않으니까 잘하면 지방 의대 정도 가서 의사는 하겠다, 아니면 소위 말하는 SKY 공대 정도 가서 대기업에 취직해서 먹고사는 데는 무난하겠다. 그 이상의 꿈은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죠. 막연히 글을 쓰고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꿈은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 때만 해도 먹고살려면 무조건 의예과를 가야 했으니까요. 지금처럼 살 줄은 상상도 못했죠. 저는 정말 무난하게 살다가 무난하게 죽는 그런 코스로 갈 줄 알았거든요.
김진세 어릴 적 집안 분위기는 어땠어요?
박경철 아버지가 경찰 공무원이셨어요. 극히 평범한 말단 공무원이셨죠. 다섯 가족에 고모까지 먹고살기 빠듯한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부모님도 그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으셨고 저 역시 그랬던 거 같아요.
김진세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박경철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어요. 제가 맏이고요.
김진세 저희랑 순서가 똑같네요.
박경철 그때가 3남매가 유행이라(웃음).
김진세 네. 유행이었어요(웃음). 자라는 데 영향을 준 중요한 에피소드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박경철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강한 임프레션을 주는 자극이 없었어요. 롤모델을 삼고 싶은 분도 없었고요. 눈에 보이는 대로 공부하고 시험 치르고 그게 전부였어요. 요즘 들어 제가 학생들을 만나서 강연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을 보거나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자극을 받는 것도 좋지만 부모와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 케이스를 두고 하는 얘깁니다. 저는 굉장히 좋은 선생님 한 분과, 굉장히 좋은 아버지를 뒀어요. 지금도 돌이켜보면 사회적으로는 큰 성취를 이뤄낸 분은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아버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제가 스물두 살 때니까 25년 됐네요. 그런데 25년이 지나도 그 어른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뜨끈뜨끈할 정도로 저에게 미친 영향이 무척 컸어요.
김진세 어떤 분이셨어요?
박경철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제가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는 분도 아니었고 집에는 한 달에 기껏해야 열 번도 채 못 들어오셨던 거 같아요. 당시 경찰들은 먹고살기 힘들었잖아요.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저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어요. 제가 코너에 몰려서 누군가에게 “살려주세요”라고 할 상황일 때면 항상 아버지께 이야기했어요. 우리 시대에는 아버지께 그런 얘기 못하잖아요? 큰 잘못을 저지르면 대개는 아버지가 아실까봐 염려하는데 저는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거였어요. 그 양반의 아우라는 제가 나이를 먹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가끔 아버지가 생각이 나죠.
박경철 전 늘 ‘부모의 뒷모습’이라는 얘기를 해요. 이를테면 의사, 교수, 이사, 임원, 국회의원 같은 이런 훈장은 앞모습이거든요. 하지만 등 뒤로 보이는 모습은 감출 수가 없죠. 그렇게 꾸미지 않은 부모의 뒷모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주무실 때 빼고는 한 번도 눕는 걸 못 봤어요.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으셨어요. 당시로서는 드물게 아버지께서 사학을 전공하셨어요.
김진세 아, 사학이요?
박경철 우리 면 통틀어 처음으로 대학을, 그것도 국립대학을 나온 분이셨어요. 스타였죠. 그런데 바로 취직이 안 되니까 임시로 경찰직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앉아계셨으니 본인의 내적 갈등이 크셨겠죠. 집에 오시면 두꺼운 사서나 고전을 읽으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이래라 저래라 어떤 가치를 강요하기보다는 몸으로 보여주셨죠.
내 인생의 두 사람, 아버지와 선생님
김진세 그리고 좋은 선생님이 계셨다고요?
박경철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세요. 제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죠. 아버지 전근 때문에 촌에서 대구로 전학을 갔더니만 하필이면 거기가 서울로 치면 강남이에요. 얼마나 황당합니까(웃음). 교실 분위기도 다르고 애들 싸온 도시락 보니까 기절하겠는 거예요. 우리 시대에 햄샌드위치 이런 거 싸오는 애들 없었잖아요?
김진세 그럼요.
박경철 애들이 미키마우스 가방에다가 그런 햄샌드위치를 담아오는 거예요(웃음). 우리야 유리병에 김치 이런 거 담아왔잖아요.
김진세 양은도시락에다가….
박경철 네네. 촌에서 살 때는 잘난 놈도 없고 못난 놈도 없이 다 그렇게 어울려 다녔는데 갑자기 ‘차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게 굉장히 위축되지 않습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는 트라우마가 좀 있었어요. 도시락을 꺼내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고, 친구들 옷과 내 옷을 비교해보게 되고, 학용품을 비교하게 되고, 아버지 이야기들을 하는데 왠지 내가 말하면 민망할 거 같은 느낌을 그때 처음 배웠죠. 절대적인 욕망은 갖고 태어나는 거지만 상대적인 욕망은 사회가 가르친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거예요.
김진세 일찌감치 깨달으셨네요.
박경철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저를 불러서 아버지를 학교에 오시라고 해서는 육성회 이사를 맡기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촌에서 전학 온 놈을, 그것도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인데….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강력하게 거절하셨는데 선생님이 더 강력하게 추천하셔서 결국 수락하셨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곤혹스러울지는 모르고 어린 마음에 그저 자랑스러웠죠. 우리 아버지가 육성회 이사인데(웃음)! 그게 담임선생님의 깊은 배려였죠. 그 선생님은 지금도 뵙습니다.
김진세 그때 왜 그러셨는지 여쭤보셨어요?
박경철 선생님께서 “성적표를 보니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올 수’더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희 때 ‘올 수’ 안 받은 애들이 어딨습니까(웃음). 그때야 다 그랬죠. 선생님 보시기에는 촌놈이 나름 성실하게 잘해왔는데 전학 와서 찌그러져서는 수업시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까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그러셨던 거죠. 진정한 교육자세요.
김진세 선생님 글 중에 아버님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서 많은 영향을 주셨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을 나눠보니 충분히 그러실 만해요. 아버님이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참, 아버님 책들은 다 읽어보셨어요?
박경철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웃음).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쓰러져서 돌아가셨는데도 당시에는 순직 처리가 안 됐어요. 집안이 한 방에 쓰러져버린 거죠. 그 와중에도 제가 아버지 유품을 가지고 다녔어요. 제 서재에 아버지의 손때가 그대로 묻은 책들이 꽂혀 있죠. 지금은 구하지도 못하는 유현종씨의 역사소설이나 박종화씨의 「삼국지」 등이 있어요. 누렇게 변한 책을 지금도 한 번씩 꺼내 읽습니다. 그때 남기신 안경, 볼펜도 아직 가지고 있어요.
김진세 책 얘기가 나온 김에, 박 선생님의 독서량이 엄청나시더군요. 요즘 아이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들 하잖아요. 어쩌면 논술 때문에 강요된 독서를 하죠. 선생님께서는 책을 많이 읽게 된 동기가 있는지요?
박경철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부모의 뒷모습’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건데, 저는 아버지가 독서하시는 거 말고는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술도 반주로 한 잔 정도 하시는 분이셨고, 남한테 고함지르는 것도 본 적이 없고요. 두 분이 밖에 나가서 싸우셨는지는 몰라도 부부싸움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보기엔 싸움이 안 돼요. 아버지는 아우라가 있으세요. 언젠가 어머니께 여쭤봤거든요. 아버지가 무서웠느냐, 좋았느냐고요.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표현하기가 좀 그런 게 있대요. 힘든 분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소위 말해서 엉길 수가 없었대요(웃음).
김진세 아, 어떤 분인지 알 듯하네요.
박경철 자녀교육이라는 게 처벌이나 보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닌 거 같아요. 결국 부모가 보여주는 모습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겠죠.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박종화의 역사대하소설)「자고 가는 저 구름아」와 같은 책을 읽었어요. 왜냐하면 집에는 그런 책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동 동화류를 사놓고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제가 친구 집에서 빌려온 계몽사 동화책을 하도 보니까 어느 날 아버지께서 계몽사 전집을 할부로 사오셨더라고요. 애지중지하면서 읽었어요. 제가 가진 책은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김진세 그 책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다르셨겠네요.
박경철 대구로 전학 와서 친구 집에 가보니 과학책이며 위인전이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산 계몽사 50권짜리를 그때까지 읽고 있었는데(웃음). 5학년 때 하도 인쇄물이 보고 싶어서 조간신문을 정치면부터 사설까지 읽기 시작했어요. 뜻을 알고 읽은 게 아니라 문자를 읽은 거죠.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6학년 때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간첩을 숨겨주면 어떻게 되느냐고 저한테 질문을 하셨는데, “범인 은닉죄로 처벌된다”고 했거든요.
김진세 (웃음)
박경철 (웃음) 놀란 담임선생님께서 “아버지가 경찰관이니까 그런 거 가르쳐주더냐”고 하셨는데, 신문 사회면에 그런 용어가 나오고 자꾸 보다 보니 맥락을 이해하잖아요. 이건 갈증과 결핍의 문제인데요. 애들한테 풍요롭게 던져주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겠지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거예요. 제 경험으로 비춰보면 오히려 스스로 갈증하고 욕망하게 하는 게 중요해요.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는데 배고플 겨를도 없이 먹을 것을 자꾸 주면 이게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모르고 그러다 보면 먹는 게 짜증나잖아요. 진짜 결핍된 상황에서 먹는 거친 음식이 달콤하듯이 결핍의 경험이 소중했는데, 이런 부분이 책이나 활자에 대해서 어떤 집착에 가까운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오지 않았나 싶어요.
자녀들에겐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김진세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겠다는 방향성 같은 게 있나요?
박경철 큰애는 사회사업과에 들어갔고, 둘째가 지금 중학교 2학년이에요. 아이들은 무조건 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시킬 거라고 했더니 제 친구들은 “미쳤냐? 똥 가치관으로 애 인생 망치지 말고 빨리 강남이나 대구 수성구로 데리고 가라”고 해요. 저는 반대로 묻죠. “니는 니 애들 인생 책임지나?” 애한테 물어는 봅니다. “네가 원하면 강남도 좋고, 아버지가 그만 한 능력이 되니까 미국이라도 보내줄 수 있다”고요. 그럼 애는 안동에 있겠다고 하거든요. “그래라. 대신 있기 싫으면 얘기해라”고 말합니다. 대충 그 정도만 얘기해도 제가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하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김진세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세요?
김진세 이 얘기도 기사화하겠습니다(웃음). 아이들이 볼지도 모르는데!
박경철 (웃음) 소파나 침대에 눕지 않고 서재 의자에 앉아서 졸죠. 말로 백 번 얘기해도 소용없고, 제가 그래야 하니까요.
김진세 독서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에 있어서도 결국 아버지를 보고 스스로 롤모델을 삼아서 해주길 바라시는 거군요. 그러나 강제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박경철 DNA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DNA가 자손에게도 전해지고 사회나 국가에도 전해지는 건데요. 핵심 유전자가 전해지면서 진화를 하듯이 저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있을 거고 그걸 가풍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김진세 집단 무의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요.
박경철 네. 그 유전자를 바탕으로 전해주되, 진화를 고민하죠. 진화에 대한 고민 한 가지를 들려드리자면, 남들은 돈 많으니까 그런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중학생 아이에게 아이폰을 바로 사줬어요. 스마트폰 가지고 게임하면 어떡하느냐고 하는데, 양면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어가고 있으니 아이들이 변화에 친숙하도록 만들어주는 거죠. 내가 아이폰을 주면 게임하고, 대신 컴퓨터로 몰래 게임 안 하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반대라고 생각했죠. 그런 부분을 진화의 측면이라고 볼 수 있겠죠.
김진세 이 부분은 빼야겠네요. 우리 아이들이 아이폰 사달라고 난리를 피우는데, 제가 안 사주고 있거든요(웃음).
박경철 (웃음)
김진세 학창시절 친구들이 ‘마징가’라고 부르셨다면서요?
박경철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힘이 세서 그런 것도 있고, 아까 제가 우직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그런 측면도 있고요. 둔하죠.
김진세 ‘누군가에게 조정을 받는 거 같을 정도로 굉장히 열심히 산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신 적이 있으시던데요. 혹은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정도까지 계속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을까요?
박경철 박사님께서는 이해하실 텐데, 제게는 강박감이 조금 있어요. 아버지가 마흔 아홉에 돌아가셨어요. 이 어른이 3일간 혼수상태로 계실 때 내내 머릿속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할 일도 엄청나게 남았는데 아이들을 다 보살피지 못하고 가는 그 심정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막내 동생이 중학생이었거든요. 마지막 날에는 이런 생각도 했죠. ‘만약 아버지가 유언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분을 바라보면서 남겨진 사람들의 어려움을 제가 체험하기도 했고, 또 남자 대 남자로서 언뜻 이해했다고나 할까요.
김진세 어떤 강박감 말씀이신가요?
박경철 똑같은 상황이 되더라도 내 삶에서 이걸 못해서 아쉬웠다든지, 이런 부분 때문에 큰일 났다, 이런 걸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강박감이 있어요. 집사람은 끔찍하게 싫어하는 제 나쁜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제가 가족에게 남기는 말을 종이에 써서 줍니다.
김진세 어떤 내용을 써서요?
박경철 혹시나 내가 잘못되면 이렇게 해라, 이런 내용이죠. 늦둥이 일곱 살 딸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1년마다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는 사진 뒷면에다가 편지를 써서 붙입니다. 그때의 느낌도 적고, 또 나중에 자라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내용도 쓰죠. 아이가 커서 시집갈 때 주려고 하거든요. 다행히 제가 무병장수하면 기쁠 것이고, 혹시나 중간에 제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사랑받았구나’ 할 수 있도록 남겨주고 싶은 거죠. 심지어 책을 한 권 써도 서문에 큰놈들 이름은 안 적어도 딸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적습니다. 큰놈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에 있지만, 아직 어린 딸아이는 그런 기억이 없으면 참 안타깝잖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이는데 혼자서 생각해보면 이게 강박감에서 나오는 거구나 싶어요.
김진세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박경철 오히려 두렵진 않아요. 대신에 사람은 누구나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상황에서 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머지 관계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책임감 같은 게 굉장히 강하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죠.
첫사랑 아내는 좋은 사람, 정말 좋은 사람
김진세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머님 얘기를 빠뜨렸어요. 아버님이 그렇게 많은 힘든 것을 남겨놓고 가셨는데, 어머니께서 많이 힘드셨겠어요.
박경철 고생 무지하게 하셨죠. 그런데 어머니는 제가 일부러 아버지처럼 간절한 마음을 안 가지죠.
김진세 일부러?
박경철 네. 지금 잘해드리잖아요.
김진세 (웃음)
박경철 (웃음) 우리 아버지는 잘해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요. 지금 제가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께 뭔들 못해드리겠어요. 지금 살아계시면… 하여튼 대한민국에서 노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웃음), 다 해드릴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도 고생 많이 하셨지만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현재의 삶이 있으시고 또 자식으로서 얼마든지 제가 보상할 기회가 있으니까요. 항상 따뜻한 어머니셨다면 이젠 따뜻한 자식으로 가야죠.
김진세 사모님도 의사시죠?
박경철 네, 제 대학 동기입니다.
김진세 블로그에 쓴 ‘첫사랑’이라는 글의 주인공이 그분이 맞나요?
박경철 네, 맞습니다.
박경철 좋은 사람입니다. 굉장히 좋은 사람이죠. 다른 표현을 쓰기도 그렇고, 예쁘지도 않고, 밥할 줄도 모르고 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죠.
김진세 의사잖아요(웃음).
박경철 (웃음) 근데 제게 맞벌이하는 아내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정말 재밌는 게, 사람들이 “에이, 설마” 그러는데 저희들은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 했어요.
김진세 왜요?
박경철 저는 까칠한데, 싸움이 안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이 뭔가 받아줘야 되는 건데, 뭐라고 얘기하면 쑤욱 들어가버리니까요. 스펀지예요, 스펀지. 주먹으로 아무리 때려도 쑹쑹 들어가버립니다. 좋은 사람이죠. 굉장히 좋은 사람입니다.
김진세 어머님께서 아버님으로부터 느끼셨던 감정을 지금 사모님이 또 박사님에게 느끼는 게 아닐까요?
박경철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어머님 마음속에는 존경이 있었어요. 집사람은 친구니까, 그런 건 아닌데 워낙 사람 자체가 원만한 사람이라 잘 받아주는 거죠. 그 점에 있어서는 제가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고 있는 거 같아요.
김진세 트윗에서 따님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던데요.
박경철 (웃음) 네.
김진세 따님을 늦게 보셨어요?
박경철 그렇죠. 마흔하나에 낳았으니까요.
김진세 딸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박경철 저희 부부에게 있어서 축복이죠. 저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똑같이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김진세 (웃음)
박경철 아픈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아프긴 다 아프지만, 묵직하게 아픈 게 있고 악 소리 나게 아픈 게 있죠. 나이가 들어서 부모가 되는 경험은 특별한 축복이에요. 부모가 될 준비가 완전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로서 살아가는 것과, 내가 부모로서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 부모가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죠. 화초 키우는 집과 없는 집, 강아지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이 다른데 하물며 내 자식이,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내 나이 40대에 집안에 등장했다? 저는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눈에는 고슴도치로 보이지만(웃음), 정말 예쁘기만 하죠.
김진세 ‘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 내 나이가 몇인가’ 이런 걱정은 안 하세요?
박경철 오히려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애들 좀 자라다보면 예전에는 내가 잘못돼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와이프 직업 있으니 설마 내가 죽어도 우리 식구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할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애가 턱 태어나니까 내가 ‘이 눔아’ 책임져야 하잖아요(웃음). 아, 이거 70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되는구나. 본인에게도 긍정적이죠.
김진세 (웃음) 진짜 축복이네요. 선생님께서 살을 빼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
박경철 아, 그럼요. 이대로 100kg 유지하다가는 나중에 심혈관계 문제가 생기겠더라고요. 오래 살기 위해서는 일단 살을 빼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죠.
나는 행복한 소갑주의자
김진세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내가 갖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박경철 글쎄, 힘이 있을까요? 제가 가진 힘은… 저는 낭비가 싫어요. 뭐든지 낭비되고 소비되는 걸 참 싫어하는데, 예를 들면 연필 한 자루 사면 거의 다 씁니다. 자린고비하고는 달라요. 왜냐하면 돈 때문에 안 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건 다 하니까요. 이유 없는 낭비가 싫다는 거죠. 그 중 치명적인 게 제한되어 있는 것의 낭비인 것 같습니다.
김진세 제한되어 있는 것이요?
박경철 언제고 가질 수 있는 걸 낭비하는 건 괜찮잖아요? 예를 들면 돈? 좀 낭비해도 되죠. 또 벌면 되니까. 하지만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유일한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죽음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명제가 없으면 인간은 무지하게 교만해질 거예요. 죽음이 있으니까 어느 정도 시점이 되면 삶을 성찰하게 되고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죠. 모든 인간에게 어떠한 이유를 들어서도 늘릴 수 없는 재화가 시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시간 낭비가 싫습니다.
김진세 워커홀릭 소리를 듣는 것도 실은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때문인 거였네요.
박경철 일요일 낮에 너무 피곤해서 4시간 낮잠 잘 일이 있었는데, 그러고 나니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시간이 아까워서요. 이 황금 같은 4시간을(웃음)! 하다 못해 딸래미하고 뽀뽀하고 놀아도 아까울 그 시간에 이게 무슨 짓이었나 싶더군요. 그만큼 시간 낭비에 대해 엄격하다 보니 저는 TV를 안 봅니다. 제 숙소에 빌트인으로 TV가 있어서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 한두 편 본 적이 있지만, 사실 TV 안 본 지 10년도 더 된 거 같습니다. 심지어 제가 출연한 ‘무릎팍 도사’도 안 봤어요.
김진세 세상에나! 그렇다면, 박경철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박경철 저에게 행복하냐고 물으시면 비교적 그렇다고 답합니다. 저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냐, 종이냐. 주인처럼 살더라도 실제로 종인 경우가 있잖아요. 대표적으로 여의도에 계신 분들은, 종인데(웃음)…. 저는 소갑주의자입니다.
김진세 소갑주의자요?
박경철 큰 을(乙) 하는 것보다 작은 갑(甲) 하는 게 저는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니까요. 저는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걸 안 하면 대가가 없다? 일단 대가를 생각하면 을이 됩니다. 그렇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잖아요. 지금처럼 그야말로 야인처럼 사는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게 저에게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김진세 살면서 슬럼프를 겪으신 적이 있나요?
박경철 있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슬럼프 아니겠습니까.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추동력이 없는 거죠. 가끔 관성의 포로가 되어서 추동력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지 못할 때, 그럴 때가 곤혹스럽습니다.
김진세 어떻게 극복하세요?
박경철 냅둡니다. 저는 원래 미래 계획을 안 세우는 사람이거든요. 사람들이 저에게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보면(웃음), 없다고 합니다. 계획적으로 살지도 않고요. 그냥 오늘 내게 주어진 것을 낭비하지 않으면 내일은 무엇이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지더라도 ‘지금은 넘어가자. 뭔가 새로운 흥미로운 일이 생기겠지’ 하는 거죠. 저는 결과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습니다.
김진세 그럼 결과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신가요?
박경철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삶에 대해서 한발 점프해버린 듯한 느낌이 있어요.
김진세 달관인가요?
박경철 달관은 아니고, 도약해버린 느낌이에요. 20대에 할 수 있는 고민의 주제로는 너무 무거웠죠. 너무 깊이 고민을 했죠. 그래서 제가 겁이 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데 대해서도 전혀 겁을 내지 않습니다. 눈치를 보지도 않아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냥 합니다.
김진세 나름의 부자론이 있으시더라고요. 독자들께서도 관심이 많을 듯합니다.
박경철 다과와 총량과 양의 관점에서 보면 부자는 아무도 없죠. 그럼 왜 1천억을 가진 사람은 1조를 가지고 싶어 하고, 1조가 있는데 왜 10조를 가지고 싶어 하며, 10조 있는 사람은 왜 탈세를 할까요? 10조쯤 있으면 세금 5천억 내도 9조5천억이 남는데 말이죠. 그게 화폐가 추상화되어서 그래요. 1조 정도를 재화로 가지고 있으면 무슨 꼴이 날까요? 빵 1억 개, 우유 5백만 리터, 자동차 5백 대, 집 스무 채…. 그거 옆에 두고 있으면 썩어날 텐데 미쳐버릴 거 아닙니까. 누가 “더 줄까?” 하면 “으으으, 제발 좀 가져가라” 할 텐데(웃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화를 추상화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욕망은 끝이 없는 거죠.
김진세 그렇다면 진짜 부자란?
박경철 진짜 부자는 추상화하지 않고 그것을 내면화해서 봐야겠죠.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의 가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요. 이건 절대적인 면일 거고요. 상대적인 면으로는 인간적 존엄성을 봐야죠. 사람마다 인간적 존엄성은 다릅니다. 하루 세끼 밥걱정만 안 해도 인간적으로 존엄하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년에 한 번 이상 세계일주를 하고 최소한 벤틀리 정도는 몰아야 존엄하다는 사람이 있죠. 이런 차이는 다 존중할 수 있습니다만,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적 존엄성의 가치는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대적으로 욕망화되면서 그 가치를 넘어섰음에도 점점 더 가져가는 게 불행의 시작이죠. 스스로 존엄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의 재화는 목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 같아요. 위기가 왔을 때도 지금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하다면 ‘부자’, 지금은 존엄하지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존엄하지 않을 것 같다면 ‘보통 사람’, 지금도 존엄하지 않다면 ‘서민’. 결국은 서민과 부자는 존엄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진세 알겠습니다. 말씀을 정말 잘해주셔서 제가 여쭤보고 싶은 답이 중간중간 다 나왔어요.
박경철 (웃음) 편했습니다. 보통 언론 인터뷰하면서 이런 얘기까지 잘 안 하는데, 동기 의사 입장에서 편안하게 한 것 같습니다(웃음).
김진세 선생님께서는 과정을 즐기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이나 주변 사람에게 처음부터 정상에 오르려고 하지 말고 발 앞만 보고 걸어가라고 하거든요. 그렇게 계속 충실하게 살면 올라갈 수 있는 게 정상이니까, 어디든 기쁘게 갈 수 있다고요.
박경철 박사님, 저는 진짜로 삽 들고 ‘구댕이’ 파는 일을 하고 싶어요(웃음). 운동도 될 거 같고요(웃음). 계속 파다가 바위를 만나면 그걸 어쨌든 해결하기 위해서 고생을 할 거고요. 나중에 보면, 세상에 그런 취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사람 보신 적 있습니까? 한 10년 구덩이를 판 다음에 이만큼을 팠다고, 사람이 이런 일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어떨까요. 당장은 아무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10년간 땅을 판 사람으로 삽 들고(웃음)….
김진세의 에필로그 아버지, 뜨거운 삶의 지도 시골의사 박경철. 어떤 사람이기에 환자가 끊이지 않는 외과 전문의, 냉철한 주식투자가, 존경받는 베스트셀러 작가, 냉철한 라디오 진행자이자 청년들을 위한 멘토링 명강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의 길을 걷고 있을까? 하나도 하기 힘든 일들을 멀티플레이어로 훌륭하게 이끌어가는 그는, 어떤 긍정의 힘을 갖고 있을까? ‘아버지’. 그의 입 속에 아버지란 단어가 맴돌자 눈시울이 붉어진다.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를 가슴 깊은 곳에 두고 저리도 그리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시골의사 박경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일종의 선입견이라 할까, 그는 너무 이성적이라 감성은 무딜 것이라 짐작했다. 흔히 ‘외과 전문의인 경상도 남자’의 원형에서는 볼 수 없는 뜨거운 감성이었다. 그의 트위터에 올라온 딸에 대한 지극 정성한 사랑을 엿보았을 때도, ‘의외인 면이 있네’라고 할 정도였지, 이토록 뜨거울 줄 몰랐다. 중년의 우리에게 아버지는 남다르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의 할아버지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그분들에게 사랑은 사치였다. 사랑을 꺼내 보여주기 힘들 정도로 삶이 곤궁했으니 말이다. 너무나 궁핍한 세대의 자식, 그러니까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겪고 자란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더욱 간절하셨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가부장적 책임감을 물려받고, 채우지 못한 결핍된 애정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몹시도 애쓰셨다. 사랑은 받아본 자만이 베풀 줄 안다고, 할아버지에게서 못 받은 사랑을 자식들에게 반드시 전해주어야 한다는 마음만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중년에게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무뚝뚝하게만 느껴진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 집에 돌아와도 눕는 법이 없었으며, 늘 책을 곁에 두고 사셨다. 그는 자식에게 묵묵히 삶의 모범을 보이셨다. 아들이 힘들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어주셨다. 아마도 “아들아! 사랑한다”는 말은 낯간지러우셨으리라. 요즘 그가 그렇듯 딸과 즐긴다는 뽀뽀나 스킨십을 통해 사랑을 전달하는 것도 어색했으리라. 아버지는 아버지식의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이 무척이나 크고 깊어, 지금도 시골의사의 가슴속을 뜨겁게 한다. 그에게 아버지란, 그가 생각하는 삶의 힘인 ‘강박감’과 과정을 즐기는 ‘진지함’,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근원인 것이다. 사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지도다. 어린 아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그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삶의 기준이 되고 양심이 되고 초자아가 된다. 우리를 늘 지켜보며 비뚤어지지 않게 하는 길잡이다. 그래서 힘이 들 때면 당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답을 얻는다. 물론 지도를 들었다고 반드시 똑같은 길을 따라 목적지에 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래도 목적지는 똑같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아 다양한 삶을 즐기고, 낭비에 대한 경계로 늘 분주하고, 과정을 중시하여 계획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더라도 그는 아버지와 같이 성실하고 정이 깊으며 자식을 사랑한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은 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살 것이다. 살아계시든 아니면 고인이 되셨든, 아버지는 우리에게 긍정의 힘을 모으게 하는 삶의 등대다. 어두운 곳에서 더 반짝이는 등대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긍정의 힘을 더하는 선물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이 책은 그가 만난 환자와 이웃들의 이야기입니다. 40개의 감동적인 사연은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는 겸손하게 그저 ‘내레이터’일 뿐이라고 했지만, 같은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 같은 ‘글쟁이’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분석적인 그의 역량에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그가 농담처럼 인간이 얼마나 땅을 깊이 팔 수 있나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지요? 그가 한다면, 그저 땅을 파기만 해도 감동일 겁니다. 오랜만에 존경할 만한 동년배를 만나 또 다른 인생을 배웁니다.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박경철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박경철, 리더스북)를 보내드립니다. |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으며 노숙자의 자립을 위한 잡지 「빅이슈」에 ‘김진세의 Love Myself’를 연재하고 있다.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외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을 썼다. 트위터 @yourden.
박경철은…
트위터(@chondoc) 자기소개란에 쓴 ‘혼자 내딛는 천 걸음보다 천 명이 손잡고 나아가는 한 걸음의 가치’와 같이 소통의 가치를 잘 알고 실천하는 그의 본업은 의사. 마흔 전에 고향에 병원을 내자는 친구와의 약속에 따라 진료 횟수에서 전국 8위, 의사 개인으로는 3위를 기록하던 대전의 의원을 접고 경북 안동에서 신세계연합클리닉을 운영 중이다. 이론 학습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외환 위기를 예견하며 필명 주식 전문가 ‘시골의사’로 이름을 알린 그는 지금 누군가에게는 감동적인 에세이를 쓴 저자로, 누군가에게는 주식시장의 맥을 짚는 냉철한 경제 전문가로,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등불이 되어준 연사로, 누군가에는 인간적인 진행의 방송인으로, 일곱 살 딸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아빠로 포지셔닝 중이다. 자칭 ‘무계획 미래’가 더욱 궁금한 이유다.
■기획&진행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