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누명 벗고 고국 땅 밟은 한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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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절망과 기적 경험한 17개월간의 이야기

온두라스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억류 중이던 한지수씨가 지난 1월 5일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구 반대편 먼 나라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17개월간의 시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긴 싸움을 끝내고 가족의 품에 안긴 그녀는 울기보단 웃는 것을 택했다.

1년 5개월, 먼 길 돌아 마침내 맞이한 귀향(歸鄕)
살인 누명 벗고 고국 땅 밟은 한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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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통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 감옥에서, 그것도 언제 나갈지 모르는 미결수의 신분으로 자유를 빼앗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같은 이야기는 한지수씨(28)에게 지난 1년 5개월 동안 일어났던 일이다. 그는 지난 2008년, 스킨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두라스에 머물던 중 네덜란드 여성 마리스카 마스트 피살 사건에 연루되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2009년 12월 가석방돼 온두라스 한인교회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 지난해 11월 최종 무죄 판결을 받고 또 한 번의 해를 넘기고서야 비로소 가족과 친구들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지난 1월 5일, 취재진들과 가족, 지인들이 기다리는 가운데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그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온두라스에서 4일 아침 9시에 출발해 우리나라에 5일 오후 4시 반에 도착했어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내내 실감을 못하다가 동해를 건너고 눈 쌓인 태백산맥을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나더라고요. 공항에 가족과 취재진뿐만 아니라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하상욱 변호사님과 김정석 경감님, 트위터를 통해서 많은 힘이 되어주신 김태연 목사님, 또 트위터 방송국 분들 등 많은 분들이 나와주셨어요. 멀리서 도움만 받았는데 실제로 뵈니 무척 반갑고 감사했죠.”

‘레이디경향’은 지난 6월,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당시 온두라스 한인교회에서 가택연금 중이던 한지수씨의 소식을 전한 적이 있다. 힘든 상황인데도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답변을 받아보고 ‘참 씩씩한 아가씨구나’ 생각했는데 역시나, 귀국 후 일주일 만에 만난 그는 그동안의 시름을 털어버린 듯 더욱 밝은 모습이었다.

“온두라스를 떠날 때부터 울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공항에서 저를 보고 울먹이는 친구들에게도 울지 말라고 했어요. 저도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죠. 웃었어요. 웃는 게 더 어울리는 날이었으니까요.”

얼마나 그리웠을까. 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을 떨쳐내고 또 떨쳐냈다. 기도로 지새우던 수많은 밤을 지나 비로소 맞이한 귀향. 그는 울고 싶은 만큼 웃었다.

살인 누명 벗고 고국 땅 밟은 한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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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자마자 할머니 댁에 가서 친척들과 저녁식사를 했어요. 할아버지 산소에 가 ‘저 잘 돌아왔습니다’ 하고 인사드리고, 여기저기 도움 받은 분들 찾아뵙다 보니 일주일이 훌쩍 갔네요. 앞으로도 찾아봬야 할 분들이 많아요. 쉬고 싶다는 생각보다 더 늦기 전에 도움 주셨던 분들 찾아뵙고 덕분에 건강하게 잘 돌아왔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아직 시차적응이 안 돼서 새벽 4시면 눈이 떠진단다. 사건 발생 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었던 만큼 몸과 마음을 푹 놓고 피로를 풀 시간이 필요할 법도 한데 집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와 사람을 만나는 게 즐겁다는 그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모든 게 즐겁다고 몇 번이고 강조한다. 가장 즐거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걷는 것”이라는 대답했다.

“갇혀 있는 동안 제가 맘껏 걸어 다니지 못했잖아요. 온두라스 교도소에서도, 교회에서도 정해진 공간을 뱅뱅 도는 게 전부였는데 서울로 돌아와 버스에서 내려서도 걷고, 지하철을 탈 때도 걷고, 빨리 걸을 수도 있고, 먼 곳에 갈 수도 있고, 그게 정말 좋아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 자유롭게 걷고 뛸 수 있다는 것이 주는 기쁨은 갇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아, 다들 스마트폰을 쓰더라고요. 내가 다시 문명세계로 돌아왔구나 싶었어요(웃음).”

증인을 ‘살인’ 누명 씌운 그날의 사건
한지수씨가 맨 처음 온두라스 땅을 밟은 것은 2008년 6월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꿈에 그리던 스킨스쿠버들의 천국, 온두라스 로아탄 섬으로 떠났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강사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결심했죠. 혼자 여행을 많이 한 편이었어요. 2003년에는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 2006년에는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도 갔었고요. 외국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었어요. 사전에 알아보니 제가 연락했던 다이빙 숍도 영국 소유였고 로아탄 섬은 영국과 미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라 영어를 많이 쓰는 곳이어서 안심을 했죠.”

온두라스의 제2 도시 산페드로슬라 공항에 내려 경찰들이 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으나 로아탄에 도착하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관광지이다 보니 온두라스 본토만큼 범죄율이 높지 않았고 활동도 자유로웠다. 다이빙 강사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기간은 3개월. 3개월 후면 그는 자격증을 손에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격증 시험이 있기 일주일 전, 그러니까 2008년 8월 22일이었어요. 다이버 숍 근처 바에서 친구들과 있었는데 집주인 댄이 마리스카와 다른 강사 분과 어울려 들어왔어요. 댄과 잠시 인사를 하고 마리스카와도 통성명을 했어요.

그러고 다시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제가 먼저 집으로 들어왔고 잠시 후 댄이 마리스카와 함께 들어오더라고요. 예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서 그러려니 했죠. 맨 처음 렌트 계약을 할 때도 친구를 데려와도 되겠냐고 했거든요. 저는 같이 사는 입장에서 피해만 주지 않으면 괜찮다고 했고요.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 전 방으로 가 잠이 들었는데 새벽 3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와보니 마리스카가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마리스카가 갑자기 통나무 쓰러지듯 ‘쿵’ 하고 쓰러지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다이빙 강사인 댄이 응급처치를 할 줄 아니까 마리스카를 살폈어요. 다행히 마리스카가 정신이 있었고 눈썹 끝이 조금 찢어진 것 빼고는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아 얼음을 가져다가 안정을 시키고 전 다시 들어가서 잠을 청했어요.”

3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온두라스 라세이바 교도소. 지수씨의 침대.

3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온두라스 라세이바 교도소. 지수씨의 침대.

가벼운 해프닝으로 여기고 다시 잠자리에 든 다음날 아침 더 큰일이 벌어졌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 6시쯤 댄이 ‘지수! 지수!’ 하며 제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기에 그의 방으로 가보니 마리스카가 숨을 헐떡이고 있더라고요. 댄도 크게 당황한 상태였고요. 혼비백산해서 밖으로 나가 도움을 청했죠. 건너편 주유소까지 가 응급실에 연락을 했는데 앰뷸런스는 도착하지 않았어요. 결국 옆집 남자 트럭에 매트리스를 깔고 마리스카를 옮겨서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가는 동안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했고요. 우리나라 병원과는 달리 그곳은 굉장히 열악해요. 그래도 병원에 도착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날 마리스카는 사망했고 댄은 체포됐다. 그는 참고인 신분으로 경찰서에 가 진술을 했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댄의 심리는 그의 자격증 시험날 예정되어 있었다. 강사 시험을 보기 위해 우틸라 섬에 도착한 그는 도착하자마자 강사로부터 그 사건의 증인으로 댄의 심리에 출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결국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심리 후 댄은 풀려났고 다음날 온두라스를 떠났다. 사건 뒤 평상시처럼 생활하던 지수씨는 한 달 뒤인 9월 24일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12월 이집트 다합으로 떠나 8개월 동안 스킨스쿠버 강습을 했다. 사건이 있고 1년 가까이 온두라스와 한국, 이집트를 오가며 그의 행동에 제약을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온두라스에서의 사건이 점점 희미해져갈 무렵인 2009년 8월, 그는 이집트에서 강습 생활을 마치고 어머니가 계시는 미국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카이로 공항에서 여권 심사를 받던 중 인터폴에 체포됐다. 혐의는 ‘살인’이었다.

사건 발생 1년 후 이집트에서 체포,
이집트에서 보낸 악몽의 3주
‘황당하다’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온두라스 경찰이 그녀와 마리스카, 댄이 삼각관계이며 그녀와 댄을 살인 공범인 것으로 추정하고 수배를 요청한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황당했어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날 끌고 가나 싶었죠. 나중에는 누군가 내 DNA를 추출해서 조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렇게 끌려가 카이로 감옥에서 3주를 보냈어요. 저에겐 30년 같은 시간이었어요.”
온두라스도, 한국도 아닌 이집트에서 보장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작정 끌려가 심문을 받았고 정황을 설명하며 영사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족과 연락을 하고 싶다는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답답함과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통하고 내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도 없고, 내가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싶었어요. 정말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엄마가 워싱턴에 마중 나와 계실 텐데, 아빠와 언니가 걱정하고 있을 텐데, 가족을 생각하니 더 막막했어요.”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외로움과 싸우며 남긴 메모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외로움과 싸우며 남긴 메모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답답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함께 있던 수감자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난 건 천운이었다. 경범죄로 붙잡혀 들어온 여대생이었는데 지수씨의 사연을 듣고 밖에 나가면 가족에게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국에 있는 언니 연락처를 알려줬고 이틀 뒤 그토록 기다리던 영사가 찾아왔다.

“그 여대생이 제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언니에게 연락을 해준 거예요. 언니가 이집트 영사관에 연락을 하고 영사님이 찾아오신 거죠. 들고 오신 사건 파일에 ‘한지수 실종사건’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가족이 실종신고를 했는데 그동안 영사관에서 저를 못 찾은 거예요. 가족은 일단 카이로 비행기 탑승 기록을 찾아봐달라고 했는데 대사관에서는 탑승 기록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미국 대사관 쪽에 아는 분을 통해 탑승자 명단을 찾아봤는데 제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제가 이집트에서 비행기를 못 탄 걸 안 거예요. 그때 걱정했을 가족을 생각하면 정말 미안해요. 우리나라 대사관의 역량이 그것밖에 안 됐다는 것이 아쉽고요.”

이집트와 온두라스는 범인 인도 협정조차 맺어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붙잡혀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 게다가 사건 발생 1년 후에야 갑작스레 체포가 된 것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었다. 온두라스 측에 헌법소원 형식으로 절차상의 하자를 호소했지만 인터폴이 한 일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하나 딱히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가고 있었다.

“사실 저는 카이로에 영사님이 오셨을 때 살았구나 싶었어요. 가족과도 연락이 됐고 아빠도 걱정 말라고 하셨고요.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했는데 2주 후에 다시 오신 영사님께서 온두라스로 가게 될 수도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온두라스로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전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거든요.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온두라스로 가 무죄를 입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무죄였고 절차상의 문제라면 가서 바로잡자 했는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어요.”

절실했던 신원보증 확인서, 외면했던 대사관에 상처받아
온두라스에서의 심리를 기다리며 지수씨는 동시에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쌌다. 온두라스로 날아온 변호인단도, 아버지도 그녀가 곧 풀려날 것이라 확신했고 지수씨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심리 당일 새로운 부검 보고서를 내놓는 온두라스 검찰 측을 보고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마리스카가 죽었을 당시에 쓰인 보고서에는 사인이 뇌부종이었다. 그런데 검찰 측이 새로 작성한 보고서에는 경부압박질식사, 그러니까 목 졸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던 것. 어떻게 부검보고서가 번복이 되며 그것도 한지수가 잡혀온 바로 다음날 작성될 수 있느냐 따지니 그건 본 법원에 가서 따지라는 소득 없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법원은 검찰 측의 손을 들어줬고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죠. 이게 정말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그때서야 뭔가 잘못됐구나, 이건 우리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연락해 언니 친구들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겠다 싶었어요. 언니에게 알리고 전 감옥으로 갔어요. 수감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언니의 구명활동이 시작됐죠.”

지수씨 소식이 알려지며 날아든 편지와 엽서들. 한국에서 보내온 응원은 어둠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게 해준 큰 힘이었다.

지수씨 소식이 알려지며 날아든 편지와 엽서들. 한국에서 보내온 응원은 어둠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게 해준 큰 힘이었다.

지수씨의 언니 지희씨는 동생의 사연을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알렸고 이를 본 네티즌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딴지일보와 시사IN 등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고 결정적으로 KBS-TV ‘추적 60분’에 보도되며 구명활동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한지수 사건’은 정동영 의원실의 도움으로 외교통상부 회의에서 거론되고 이에 정부는 남미법 전문가인 하상욱 외국어대 로스쿨 겸임교수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중 박사, 강력계 사건 전문가인 수서 경찰서 김정석 경감, 국제법 전문가인 대한변협 유영일 변호사 등 특별전문가팀을 파견했다. 이제껏 우리 정부가 재외국민 보호를 위해 취한 가장 적극적인 조처였다. 지수씨가 온두라스 라세이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3개월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라세이바 교도소는 온두라스의 살인범과 강력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다. 교도소 내에서도 폭동과 사고가 끊이질 않는 악명 높은 곳에서 어떻게 3개월을 버텼는지 묻자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이집트에서 체포되었을 때 시멘트 바닥에 수건 한 장 깔고 3주를 잤어요. 추위에 목이 돌아가고 근육통 때문에 하루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미리 단련이 된 거죠. 라세이바에는 매트리스라도 있는 게 어찌나 감사하던지, 무엇보다 일주일에 세 번 아빠를 볼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감사했어요.”

한국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사건이 터진 후 생업을 정리하고 온두라스로 날아와 딸의 옥바라지를 했다. 50대 중반,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먼 나라에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면 지수씨는 지금도 목이 멘다. 아버지는 한 번도 딸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신 적이 없었다.

“면회를 오시는 날이면 감옥 매점에서 콜라를 몇십 개씩 사세요. 교도소의 여자 죄수들과 경찰들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지수 잘 봐달라고. 여자 교도소 방장이 필요하다고 하면 청소도구건 화장품이건 다 구해오셨어요. 덕분에 제가 교도소에서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죠. 그때 아빠가 안 계셨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다 잘될 거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색은 안 하셨지만 말도 못하는 억울함과 답답함을 감내하셨더라고요. 저 몰래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그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대사관의 확인서만 있으면 됐다. 그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지수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겠다’라는 형식적인 수준의 서류 한 장이었다. 하지만 대사관 측에서는 신원보증의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확인서를 발급해주지 않았고 그와 그의 아버지는 언제 끝날지 모를 절망에 휩싸여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신원보증 요청이 거절되고 대사관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말은 대법원장에게 편지를 한 번 써줄 수 있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여론의 도움으로 전문가팀이 와서 설득하고 나서야 확인서를 받을 수 있었어요. 감옥에서 꺼내주고 한국으로 돌려보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 확인서 한 장 써주는 것에 몸을 사리는 공무원들을 보면서 ‘하루만 감옥에 있어보세요. 하루만이라도 당신 딸이 감옥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살인 누명 벗고 고국 땅 밟은 한지수씨

살인 누명 벗고 고국 땅 밟은 한지수씨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재외국민 보호 위해 국가가 나서야
가석방 판결은 재판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찾아든 희소식이었다. 2009년 12월 산페드로술라의 한인교회에서 연금생활을 시작해 최종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와 언니, 현지 교민들의 보살핌이 있었고 누구보다 긍정적인 그였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억류생활에 대한 불안감과 어쩌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그를 덮쳤다. 긴 어둠을 뚫고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땐 기쁘다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 당연한 결과를 받기 위해 정말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잖아요. 그 많은 시간과 노력,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무엇보다 이제는 어디 가서도 ‘난 무죄다’ 말할 수 있어서 속 시원했고 마음속의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기분이었어요. 그래도 가족이 고생한 건 한순간에 없어지지 않잖아요. 마냥 기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감정은 말로 표현을 잘 못하겠어요.”

당시의 심경을 전하기 위해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잠시 눈물이 차오르는 듯했지만 이내 웃어 보였다.

“처음에는 내가 왜 하필 다이빙을 시작해서, 왜 하필 온두라스에 가서 이런 일을 당했을까 원망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그건 제가 그곳에 갔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어요. 맨 처음 인터넷에 글을 올렸을 때 저의 결백을 믿지 않는 분들도 많았어요. 왜 위험한 곳에 가서 사고를 당했느냐, 네가 거기만 안 갔어도 이런 일 없었을 거 아니냐, 그런 말씀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저는 무죄였기 때문에 당연히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설령 유죄라 하더라도 법의 심판을 공정하게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온두라스에 전문가팀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대사관에서 신원보증 확인서가 발급되지 않았겠죠. 전 계속 감옥에 있었을 것이고 결국에 무죄 판결을 받았더라도 그 상처와 절망감은 엄청났을 거예요. 저는 운 좋게 잘 풀렸지만 이게 단발성으로 끝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부는 다른 나라 어디에선가 억울한 일을 당하신 분들에게도 저와 똑같이 해드려야 한다고 봐요.”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어준 국민께 감사,
비겁하게 살지 않을 것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어쩌면 그녀 인생에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지만 그 상처를 통해 얻은 것이 참 많다.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배웠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정신력도 생겼다.

“오히려 인생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무죄 판결이 나고 귀국을 기다리며 운동을 다녔는데 하루는 어떤 분이 운동을 하다 쓰러졌어요. 순간 그때 사건이 떠올랐지만 지체 없이 도와드렸어요. 제가 사람을 살리려고 했던 것이 이런 일을 겪게 했지만 그렇다고 비겁하게 움츠리고 살진 않을 거예요. 만약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전 그때처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사명감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이 일을 겪으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에요.”

이제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당분간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볼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그래야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제 인생에서 평생 할 일을 생각해보려고요. 당장 뭘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어요. 우선 가까이서, 또 멀리서 도움 주신, 감사드릴 분들이 정말 많아요. 맨 처음 사건을 보도해주신 기자님들부터 현지에서 도움 주신 한인교회 목사님과 교민 분들, 정동영 의원님, 절 구하러 와주신 전문가팀 선생님들, 외교부 관계자님들, 마지막에 많은 도움 주신 현 주 온두라스 대사님, 모교 서강대와 학교 선후배들, 트위터를 통해 ‘한지수요일’을 만들어주신 김태연 목사님, 김주하 아나운서, 모든 트위터 팔로워 분들….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힘을 마련해주신 네티즌 여러분과 국민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기적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 덕분에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어요.”

기회가 된다면 도움을 주신 분들과 아름다운 곳에 가서 스킨스쿠버를 가르쳐드리고 싶다며 작은 소망을 밝힌 그녀는 언젠가 다시 한번 온두라스에도 가보고 싶다고 한다. 상처가 많았던 곳이지만 그만큼 치유도 받았던 곳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뚫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 절망의 순간에도 용기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한지수 사건 일지
2008년 8월 스킨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증 취득 위해 온두라스 로아탄 섬 방문, 사건 발생
2009년 8월 이집트 공항에서 체포, 구치소 수감
2009년 9월 22일 온두라스 라세이바 교도소 수감
2009년 12월 15일 가석방. 1년여간 산페드로술라의 한인교회에서 연금생활
2010년 10월 17일 1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구두 판결)
2010년 11월 24일 무죄 판결(최종)
2011년 1월 5일 귀국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강은호 ■장소 협찬 / 어반가든(02-777-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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