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

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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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理想한 사람들은 한국판 슬럿워크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슬럿워크(Slut Walk)는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강연 중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여자들이 슬럿(헤픈 여자)처럼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데 대해 여성들은 되레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며 ‘몸에 대한 권리’를 부르짖었다. 지난 4월 캐나다에서 시작된 뒤 세계 곳곳으로 퍼져 한국에도 ‘잡년행진’이란 이름으로 슬럿워크가 펼쳐졌다.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지난 7월 16일 오후 3시 종로. 몸에 딱 붙는 블랙 원피스, 새빨간 립스틱,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며 행진한다. 도심 한복판에는 여성용 속옷인 브래지어가 아무렇지 않게 널려 있다. 그들은 자신을 ‘잡년’이라고 칭한다.

“잡년이 뭐 어때서? 내 몸이야! 손대지 마!”
잡년이라니…, 포털 사이트에서도 성인 인증을 하지 않으면 검색할 수 없는 단어다. 과격하다! 그러나 그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과격해야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스키니 진을 입었다는 이유로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이나 음주 심신미약이란 이유로 행해지는 감경, 성폭력을 여성의 단정치 못한 행실로 돌리는 은근한 시선 등. 한국의 남성 중심적 사고는 더욱 과격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기자가 만난 첫 번째 이상한 사람은, 영화 ‘조선명탐정’의 제작자인 김조광수 감독(46)이다. 그는 얼마 전 커밍아웃을 한 후, 7년간 사귄 동성 애인과 내년에 결혼 계획을 발표해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오렌지색 하와이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레이디경향(이하 LADY) 감독님, 옷이 멋집니다.
김조광수
멋지긴요 뭘….

LADY 어떤 계기로 슬럿워크에 참여한 건가요?
김조광수
트위터를 통해서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슬럿워크’가 무슨 행사인가 하고 검색해보니 외국에서 비롯된 시위더군요. 마침 진행자들로부터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기꺼이 응했죠.

LADY 감독님은 평소에 사회 약자와 관련된 행사에 종종 참여하셨잖아요?
김조광수
네. 매년 성적 소수자들의 축제 ‘퀴어 퍼레이드’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데 이번 행사 역시 사회적 약자 편에 서는 전체적인 취지가 비슷하잖아요? 제가 힘이 됐다면 좋겠어요.

LADY 직접 참여해보니 어땠나요? 준비 과정에서 몇몇 남성들의 악성 댓글 때문에 여의치 않았던 걸로 아는데요.
김조광수
많은 여성들이 악성 댓글을 달던 남성들이 집회장에 와서 방해할까봐 꽤 걱정했어요. 그런데 저의 경험상, 그런 지질한 사람들은 오프라인에 멈춰선 채 나서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했죠.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고 처음 한 것치고는 매우 원활하게 진행됐어요.

LADY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시위 현장에 직접 나가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김조광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스스로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참여한 겁니다.

LADY ‘야한 옷차림과 성폭력’ 관계 어떻게 보세요?
김조광수
우리 사회에서 간혹 성폭력 피해자들의 옷차림이나 행실이 문제라고 하고, 법원에서조차 그런 식의 판결을 내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그런 인식은 잘못된 권력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요.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LADY 감독님은 얼마 전 커밍아웃을 해서 화제가 됐는데 그 이후 달라진 점이 있나요?
김조광수
일단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 저는 참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 됐어요. 일도 더 잘되고 있고요. 제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니까 용인됐지, 일반 직장인이었으면 참 불편했겠죠. 저는 괜찮은데 가족이 불편해합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성당에 다니시는데 나이 많으신 분들이 걱정스러운 말씀을 하시는 모양이에요. 어쨌든 어머니께서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들으면서 본인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아들을 감싸줘야 하는 위치니까 힘드시겠지요.

LADY 다음 신작으로 퀴어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김조광수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라는 영화입니다. 캐스팅은 거의 마무리가 됐고요. 올 10월부터 찍을 예정입니다.

LADY 내년에 교제하는 분과 결혼식을 하신다면서요?
김조광수
아직 구체적으로 진행된 건 없지만 결혼식을 공연처럼 크게 할 계획이어서 올 가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려고 합니다.

LADY 감독님이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김조광수
저한테는 큰 목표가 있어요. ‘무지개센터’를 짓는 거예요. 층마다 색을 다르게 해서 퀴어센터, 인권센터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장기적인 목표죠. 제가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 후배들은 아름다운 청소년기를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기자가 만난 두 번째 이상한 사람은, 금발과 몸에 딱 붙는 붉은색 원피스의 강렬한 색상으로 시위 현장에서도 단연 한눈에 들어온 여성이다. 그녀는 전업 미술작가 양은주씨(32)로 ‘1인시위닷컴’이라는 웹 사이트의 대표이기도 하다. ‘1인시위닷컴’은 서울대 미대 박사과정을 밟던 중 뜻이 맞는 이들과 만든 웹 사이트라고 한다.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한 1인 시위에 예술적 퍼포먼스를 가미해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LADY 그 옷은 평소에도 입는 옷인가요?
양은주씨
일부러 이번 행사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평소에는 작업하는 사람이라 지극히 평범한 옷을 입습니다.

LADY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생업으로 하는 일이 있나요?
양은주씨
미대를 나온 전업 작가입니다. 그리고 ‘1인시위닷컴’이란 웹 사이트를 통해 사회활동도 하고 있어요.

LADY 이번 행사는 개인적으로 혼자 참여한 건가요?
양은주씨
네. 혼자 왔어요. 슬럿워크의 주제 자체가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굉장히 공감이 가기 때문이죠. 원래 퍼포먼스하는 걸 즐기기 때문에 행사 소식을 듣고 ‘꼭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LADY 운영하고 있다는 ‘1인시위닷컴’은 어떤 웹 사이트인가요?
양은주씨
사회적 이슈를 선정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1인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1인 시위에 참여하고 싶어도 시간이나 여건의 제약으로 못하는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 의견을 남기면 ‘1인시위닷컴’이 주제에 맞는 메시지와 시위 방식, 참여자 등을 결정해 대신 시위를 해주기도 해요.

LADY 예술을 가미한 1인 시위라니, 획기적인 생각이네요.
양은주씨
박사과정을 하면서 만난 선생님들과 뜻이 맞아 함께 만들었어요. 각자 관심이 가는 주제별로 다양한 1인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LADY 그동안 어떤 1인 시위를 해왔나요?
양은주씨
최근에는 홍대와 롯데 손해보험 청소 노동자 관련 1인 시위를 했어요. 그리고 원전 반대, 최저임금 인상, 4대강 사업 반대, 고엽제 피해자 관련 시위를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꼴로 하고 있죠.

LADY 언뜻 미술과 시위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요?
양은주씨
미대 커리큘럼에 현대미술이란 과목이 있어요. 페인팅만 하는 게 아니라 영상 퍼포먼스, 설치예술, 행위예술 등을 모두 배우죠. 대부분의 주제가 사회적 이슈예요. 공연하다가 시사적인 문제에 눈을 뜨는 친구들이 많아요. 낸시 랭 아시죠? 그분이 서양화 전공인데, 런던에서 행위예술을 하면서 유명세를 떨쳤잖아요. 그런 분과 비슷한 일을 하는 거죠.

LADY 1인 시위에 시각적인 효과를 더하는 거군요?
양은주씨
네, 맞습니다. 보통 1인 시위 하시는 분들을 보면 내용은 좋은데 시각적인 호소력이 부족해요. 눈도 가지 않고 오히려 빽빽하게 적힌 빨간 글씨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주는 경우가 있죠. 저희가 기획하는 1인 시위는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멋있게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해요.

LADY 양은주씨가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양은주씨
다 같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말은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우리 사회의 내면을 들춰보면 볼수록 그야말로 이상적인 거죠. 이런 슬럿워크 행사나 1인 시위처럼 사회적 약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언젠간 이뤄질 거라고 생각해요.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기자가 만난 세 번째 이상한 사람은, 이번 행사를 준비한 위원회의 멤버다(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웹 닉네임인 ‘도둑괭이’로 대신했다). 행사 후 사람들의 반응이나 상황이 궁금해 다음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행사 내내 비를 맞으며 마이크를 잡고 진행하기도 했지만 행사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맞은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LADY 행사를 진행하게 된 계기가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이었다고요?
도둑괭이
사건이 일어난 후 ‘여성이 성추행당할 만한 행동을 했다’라는 소문이 인터넷상에 떠돌았어요. 이에 대한 항의로 슬럿워크 1인 시위가 진행됐고 트위터를 통해 젊은 여성들이 ‘잡년행진’이란 제목으로 시위를 주도했어요.

LADY 여성단체 등이 아니라 익명의 여성들이 모였다는 게 신선하군요.
도둑괭이
모두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준비한 행사예요.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여성 스무 명이 모였죠. 그리고 점점 커져서 1백50여 명이 참여했어요.

준비위원회 진행자 도둑괭이

준비위원회 진행자 도둑괭이

LADY 본인도 직장인인가요?
도둑괭이
네.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그런데 행사 후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어요.

LADY 정신적으로 힘든 건 왜죠?
도둑괭이
행사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들이 7백 개가 넘는데 다들 비난 일색이에요. 외모 비하부터 성추행 수준의 댓글들이 너무 많아서 거의 정신 붕괴 수준이에요. 행사가 잘 끝났다고 자축할 시간도 없이 앓아누운 친구들이 많아요.

LADY 악성 댓글이야 준비 과정에서도 많이 받지 않았나요?
도둑괭이
악성 댓글을 다는 남성들은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일부 ‘키보드워리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 남성들의 80~90%가 슬럿워크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 점이 굉장히 슬퍼요.

LADY 그래도 여성들은 대부분 지지하지 않나요?
도둑괭이
같은 여성들도 ‘잡년’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에요. ‘저런 행사를 굳이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며 난색을 표하는 글도 있었어요. 또 ‘부드럽게 여성성을 살려서 시위를 할 수 있지 않냐’라는 의견도 있고요.

LADY 그런 의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둑괭이
성범죄자라는 것이 특별히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성폭력 뉴스만 조금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죠. 그들은 남성 의욕에 도취된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여성들은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쓰더라도 온몸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럿워크가 왜 찬반논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네요.

LADY 슬럿워크가 논란의 중심이 됐군요. 어떻게 대처해나갈 생각인가요?
도둑괭이
일단 후속 조치가 시급해요. 악의적 댓글에 대해서는 사법적 처리가 필요할 거예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수면 위로 떠오른 잘못된 인터넷 성 인식에 대해서도 논쟁할 겁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슬럿워크가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1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2회, 3회 이어져야 하는 행사입니다.

LADY 다음에 기획하고 있는 시위가 있나요?
도둑괭이
여성이 나서야 할 시위가 아직도 많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죠. 현대차 협력업체 성희롱 사건(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2009년 4월께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사내 하청업체 금양물류 관리자 2명에게 수차례 성희롱당한 사건) 관련 시위를 기획하고 있어요. 정작 피해자는 해고되고 가해자들은 전원이 타 기업으로 고용 승계돼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여성가족부와 관련 기업체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이유진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한국 최초의 슬럿워크 ‘잡년행진’

LADY 당신이 꿈꾸는 ‘이상’은 뭔가요?
도둑괭이
‘여성들 스스로 야한 옷차림을 해 성폭행의 원인 제공을 하는 것 아니냐’라는 주장은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생각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이분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나의 몸은 나의 것이고 내가 입는 옷은 나의 선택일 뿐이니까요.

* ‘이유진 기자가 만난 理想한 사람들’ 시리즈는 이달을 끝으로 마칩니다.

■글 / 이유진 기자 ■사진 /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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