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는 문재인의 운명 그리고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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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석상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문재인 이사장이 지난 7월 말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에세이집 「운명」 출간 기념 북 콘서트를 통해 대중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그는 이날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위치에서든 노력할 것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야권의 차기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그의 이 말 한마디는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문재인, 그가 누구인지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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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아닌 문재인으로 나선 첫 행사
지난 7월 29일 오후 7시 30분께. 서울 정동의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의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재인 이사장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과 참여정부 시절의 이야기,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신의 인생사를 엮은 에세이집 「운명」의 출간과 관련해 열린 북 콘서트 ‘우리들의 운명’에 참석하기 위한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던 것. 로비 한편에 자리를 잡고 노무현재단의 후원 회원을 모집하는 봉사자들과 “노무현 정신을 살립시다!”라고 외치고 있는 배우 문성근도 눈에 띄었다. 북 콘서트가 열리기 전 취재진에 둘러싸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도 이날 초대받은 손님 중 한 명이었다.

북 콘서트의 진행은 성공회대 겸임교수이자 이번 행사의 기획자 탁현민 교수가 맡았다. 인디 밴드 ‘일단은 정석이네’의 축하 공연이 끝나고, 드디어 문 이사장이 등장했다. 1층과 2층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뜨거운 반응이 나오리라 예상치 못한 듯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번졌다. 패널로는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와 「운명」의 집필을 도운 양정철씨가 참석했다.

“이렇게 많은 분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2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많은 사람이 제게 책을 쓰라고 권유했습니다. 노 대통령과 오랜 세월을 같이했고,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으니 제가 가장 먼저 그 작업을 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책을 쓴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이제 한 정권이 끝나가고, 국민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지요.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시기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역사에 남긴 것들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문 이사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에세이집 「운명」의 집필 동기를 이야기했다.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운명」은 노 대통령과의 인연, 참여정부 시절의 증언 이외에도 문재인 이사장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결혼 등 개인사에 대한 부분이 따로 구성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패널들의 질문을 받던 문 이사장은 “개인적인 이야기는 끝까지 넣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양정철씨가 “이 책에는 문재인 이사장에 대한 부분도 필요했다. 노 대통령이 남긴 꿈과 목표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우리도 알 필요가 있다”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양씨의 말을 듣던 문 이사장은 난처한 웃음만 지었다.

문재인 대통령?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저는 지금까지 반장에 뽑힌 적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그 흔한 줄반장 한 번 못해봤어요. 노 대통령이 취임을 앞두고 저희 부부를 서울로 초대해 청와대로 와달라고 부탁하셨을 때도 저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느 당에도 입당한 적이 없어요.”

문 이사장 옆에 앉은 오연호 대표와 양정철씨는 “그는 권력 의지가 없어 문제다”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문 이사장의 성향이 노 대통령의 뜻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객석의 호응을 유도했다. 북 콘서트를 보러 온 많은 관객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문재인 대통령’을 외쳤다. 공연장의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대선에 출마해달라”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문 이사장은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웃기만 했다. 몇 분 후 문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1 경희대 법대 3학년 때 음대 1학년이던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났다. 왼쪽부터 문재인 이사장과 그의 부인. 2 문 이사장은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은 군 복무 중인 그를 찾아올 때 안개꽃 한 다발을 사오곤 했다. 3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된 그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4 노 대통령은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가깝게 지냈다. 5 청와대 생활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네팔의 히말라야로 갔다. 조용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1 경희대 법대 3학년 때 음대 1학년이던 지금의 부인을 처음 만났다. 왼쪽부터 문재인 이사장과 그의 부인. 2 문 이사장은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부인은 군 복무 중인 그를 찾아올 때 안개꽃 한 다발을 사오곤 했다. 3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된 그는 폭파 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4 노 대통령은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가깝게 지냈다. 5 청와대 생활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네팔의 히말라야로 갔다. 조용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기 대선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여권과 야권의 단일 구도입니다. 그것만 성사된다면 우리는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요. 오세훈 시장은 굉장히 빼어난 인재입니다. 또 손학규 대표도 정치 내공이 상당한 분이고요. 어느 편이 되던 야권의 단일화를 위해 힘쓸 것입니다. 하지만 대선 출마에 대한 확실한 입장은 다음으로 미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이사장은 “오랜 지인들은 저에게 ‘절대 정치에는 나서지 말라’라고 조언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어떤 성품이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의 의견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노 대통령이 추구한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준비를 마쳤다는 의중은 감추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정말 걷잡을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고, 세금도 늘어만 갑니다. 절박한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한 노력할 작정입니다. 제가 보태는 힘이 헛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이사장이 차기 대선까지 바라는 것은 오직 야권의 단일 구도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직접 대선 후보로 출마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계속 답을 미뤘다. 또 그는 우리 역사에서 단 한 번이라도 야권이 제대로 통합된 자세를 보여주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은 크게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국(서울대) 교수나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허락한다면 그분들의 능력으로 함께 이루고 싶습니다. 두 분 모두 부산 출신이신데, 제 뜻을 받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북 콘서트의 2부는 탁현민 교수가 문 이사장에게 시민들이 보내온 질문을 하나씩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냐?”라는 한 시민의 질문에 문 이사장은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을 다니던 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번은 노 대통령과 강원도 수해 지역에 방문했습니다. 그때 피해 규모가 심각해서 전국 각지에서 강원도로 자원봉사를 온 분들이 많았어요. 저희가 노 대통령을 모시고 현장을 방문하자, 어떤 자원봉사자께서 ‘대통령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요?’라고 하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노무현 오빠 오빠’ 하면서 저희를 반겨주셨지요. 저라면 글쎄요…. 우연히 저를 만나신다면 오빠라고 부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웃음).”

문 이사장은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다소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 출마에 대한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권 교체만이 이 나라의 살 길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또 노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세상을 만드는 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이후 지방 투어로 이어지는 북 콘서트 행사를 두고 문재인 이사장의 공식적인 대선 행보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머니의 연탄 배달, 허드렛일 도운 어린 시절
그럼 문재인 이사장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어린 시절의 가난이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의 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당시 명문이던 함흥농고 출신으로, 북한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지냈다. 그러던 중 1950년 12월 국군과 미군이 두만강까지 올라갔다가 예상치 못한 중공군 개입으로 후퇴한 상황에서 흥남 마을 사람들을 미군 선박에 태워 거제도로 피난시킨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길어야 2, 3주일만 피해 있으면 된다는 예상과 달리 문 이사장의 부모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거제도에서 터전을 다시 일궈야 했다.

문 이사장은 「운명」에서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에서 달걀을 싸게 사서 머리에 이고, 나를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파는 행상을 했다. 그걸로 조금씩 저축을 했고, 돈이 약간 모이자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조금 전에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라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또 그는 어머니가 연탄 배달을 하거나 허드렛일을 할 때도 자주 도왔다고 했다. 한번은 연탄을 실은 수레가 미끄러져 가볍게 다친 적도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의 교육에 가장 신경 쓴 그의 부모님 덕분에 초등학교를 무사히 마친 그는 당대 명문인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처음 등교해보니 입학 전에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처음부터 기가 죽었다. 노는 문화가 전혀 달랐고, 용돈 씀씀이도 큰 차이가 나서 함께 어울리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 따라가보면 나로서는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집에, 정원에, 가구가 놀랍기만 했다. 그에 더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련님으로 떠받들어지는 모습에 더 주눅이 들곤 했다”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특별히 공부에 매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보내며 읽고 싶은 책을 실컷 읽었다. 또 그는 고3 때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다 정학을 맞은 경험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법과나 상과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는 첫 입시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입시 공부를 등한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재수 끝에 당시 후기였던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이렇게 그의 서울 생활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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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의 연애는 면회의 역사
문 이사장은 경희대 법대 3학년 무렵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당시 5월 초 ‘법의 날’에 맞춰 열리던 ‘법 축전’이란 이름의 법대 축제에서 파트너로 처음 만나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그는 “호감이 갔다. 그러나 이후 만남을 이어가진 않았다.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교내에서 한 번씩 만나면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라며 부인과의 추억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75년 4월 비상학생총회에 참가한 문 이사장은 페퍼포그(최루탄)에 맞아 실신을 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것을 느꼈는데, 그 주인공이 지금의 부인이다. 그후 문 이사장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는데, 어느 날 부인이 면회를 와서 작은 신문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경남고가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톱기사가 실려 있었다. 문 이사장은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법 축전’ 때 학년 대항 야구 시합에서 학년 주장을 맡아 우승한 적도 있을 정도다. 부인이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해 신문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세상에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 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감방에서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곤 했다”라며 당시의 풋풋했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공수부대에 입대했을 때 부인은 흔히 군 장병의 면회 때 챙겨가던 통닭이나 빵 대신 안개꽃 한 다발을 가져왔다고 했다.

애인이 면회를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동기들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우르르 문 이사장에게 몰려와서 난처했다고도 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동기들에게 안개꽃을 조금씩 나눠준 일도 소개했다. 부부는 7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경희대 음대 졸업 후 서울시립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부인과 함께 문 이사장은 부산으로 내려갔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판사 임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검사는 그의 체질에 맞지 않고, 변호사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는 부산행을 결정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부산에서 문 이사장은 사법연수원 동기인 박정규씨의 주선으로 노무현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무엇보다 느낌이 달랐다. 내가 만난 법조인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주 소탈했고, 솔직했고, 친근했다”라고 노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표현했다. 그들은 서로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부산 부민동에 ‘변호사 노무현·문재인 합동 법률 사무소’를 냈다. 이 일이 그들을 평생의 운명으로 엮어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당시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문 이사장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항상 존대를 했다. 그러다 편한 높임말을 쓰게 된 계기는 문 이사장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다. 그도 웬만하면 ‘형님’이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는 성격이지만, 30년 지기인 노 대통령에게만큼은 ‘선배님’을 넘어선 그 어떤 호칭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 노 대통령은 어려운 사람들, 노동자,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방향을 굳힌 뒤였다. 따라서 동업을 하게 된 문 이사장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변호사로서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대의를 위한 실천에 있어서도 한계를 두지 않고 철저해야 한다’라는 노 대통령의 원칙을 배웠다. 일반적이던 법조계의 커미션도 끊고, 가슴 아픈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 데 매달렸다. 또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환경운동가의 편에 섰던 이유로 그는 지금까지 그 흔한 골프 한번 배워보지 못했다. 국회의원을 거쳐 대선 후보에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을 떠나보낸 뒤 부산에 남은 그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취임식 전 노 대통령은 문 이사장에게 함께 일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절대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금 못 박은 그는 노 대통령과 함께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그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던 노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국장의 상주를 맡았던 문 이사장은 ‘나까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노 대통령이 남긴 것들을 지켜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 그가 남기고 간 숙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충격, 비통, 연민, 추억 같은 감정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그를 ‘시대의 짐’으로부터 놓아주는 길이다”라는 말로 「운명」의 서두를 쓴 문재인 이사장. 아픔과 고통을 겪고 일어선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구상했다. 그리고 이제 조심스럽게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대로 ‘살맛 나는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그의 진심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어릴 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됐다. 더 이상 가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 잘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받았던 도움처럼 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었다. 자라서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것도, 인권 변호사가 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굴곡이 많고 평탄치 않은 삶이었다. 돌아보면 신의 섭리 혹은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에 노무현 변호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어렵게 자랐고 대학도 갈 수 없었다.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나보다 훨씬 뜨거웠고, 돕는 것도 훨씬 치열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하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 문재인의 「운명」 중


■글 / 정은주(객원기자) ■사진제공 / 이성원, 도서출판 가교 ■참고 서적 /「운명」 (문재인 저, 도서출판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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