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

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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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긍정성은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훈장과도 같다. 북한을 벗어나 중국을 6년간 떠돌다 한국에서 취업설계사로 자리 잡기까지 말로는 표현 못할 사연을 겪은 노은지씨의 도전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이제 경력을 갓 1년 채운 취업설계사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여성들의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국경을 두 번 넘어 안착하기까지
경기여성비전센터(경기새일지원본부, 이하 센터)는 새터민으로 첫 취업설계사가 된 노은지씨(35)의 일터다. 상담이나 취업 알선이 주된 업무다. 각자 특성과 전문 분야를 살려서 여성들의 취업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노은지 설계사는 거의 유일한 탈북 여성 취업 전문가인 셈이다. 다양한 직업 경험이 필요한 설계사지만 아무래도 남한 여성들의 경력 단절과는 접근부터 달라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부터 받았어요. 기초적인 업무도 저한테는 다 생소했기 때문에 업무 하나를 서너 번씩 반복하면서 남다른 노력을 했어요.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겨서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봉사정신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눈만 감아도 코를 베어가는 자본의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탈북 여성들은 살아남기도 힘들다. 센터는 새터민 여성을 위한 취업 매니저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20명 정도가 노은지씨의 뒤를 이어 취업설계사가 되기 위해 준비 중이다. 탈북 주민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한미라 팀장 덕분이었다.

“새터민 여성들에게 고기 낚는 법을 알려주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교육 과정을 개설했어요.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 잘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노씨는 새터민들 사이에서 ‘성공한 사람’이고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 그도 한 팀장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온기와 관심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북한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 담배 마는 일을 잠시 하다 홀로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있던 6년 동안 공장에서 벽돌 굽는 일, 개 잡는 일 등 공안경찰의 눈을 피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에 와서 한 주유소 일은 쉬운 축에 속했다. 공장 일은 기본이고 남자들도 하기 싫어하는 험한 일도 너끈히 해냈다. 그만큼 고생에는 익숙했지만 차별과 편견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한국은 같은 민족인데도 같은 사람으로 봐주지 않더라고요. ‘4년제 대학 나온 사람도 정규직원으로 채용되기 어려운데 나는 대체 뭘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어요. 다행히 전문 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많이 치유되어서 남까지 도울 수 있게 됐죠.”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경력 단절 여성의 부활]② 새터민 여성 취업설계사 1호 노은지

한 땅에서 한민족으로 차별 없이 살고파
하나원(새터민의 정착을 돕는 교육기관)을 나올 무렵, 모든 것이 막막했다. 처음 거주하게 된 임대아파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두려움과 우울감이 엄습했다. 어린 아들이 곁에 있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으로 인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빈집에 라면 다섯 개와 담요, 취사도구가 살림살이의 전부였어요. 고향을 떠나왔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 나서 애를 붙들고 울었어요. 뭘 사러 밖에 나갔다가 길을 잃어서 경찰서까지 가기도 했고요. 그때는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했어요. 우울증이 심해서 11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고요. 아들이 없었더라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어차피 고생은 계속 해도 상관없었지만 아들의 진로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죠.”

중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다. 하나뿐인 남동생도 무사히 탈북을 감행, 인천에 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다던 어머니는 소식이 끊겨 돌아가셨는지 공안에 잡혔는지 알 길이 없다.

“한국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란 아들은 이제 도리어 ‘엄마 말투가 이상하다’라고 타박을 해요(웃음). 동생은 북에서 온 여성과 지난 7월에 결혼했어요. 직업전문학교 강사인데 누나가 이만큼 살고 있으니 누를 끼치지 말고 열심히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해요.”

새터민 여성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어둡고 수당이니 복리후생을 따져서 일을 구할 형편이 못된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오랜 시간 동안 경력이 단절되다 보니 취업도 힘들다. 수치로 평가되는 취업률과 상관없이 노씨는 새터민을 취업시킬 때마다 신바람이 절로 난다. 이제 길 가다가도 취업 공고만 보면 눈이 커지는데다 출퇴근하면서도 늘 일 생각을 하는 ‘직업병’의 소유자가 됐다.

“여전히 불편한 부분은 있어요. 구인 정보를 검색해서 전화로 채용 요청을 하면 대뜸 ‘중국에서 오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인데 일하거나 사람을 만날 땐 먼저 웃으려고 노력해요.”

그간 취업 지원을 했던 사례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을 물으니 북에서 온 스물셋, 스물다섯 자매를 첫손에 꼽는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기회가 많을 것 같아 진학을 권유했지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아 굳이 일을 하겠다고 고집하더란다. 시간제나마 취업은 금방 됐는데 하루 두 시간밖에 일이 없었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이틀간 전화만 60번 한 끝에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안 된다는 걸 저를 믿고 한 번만 써달라고 부탁해서 다행히 자매는 취업이 됐어요. 처음엔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니 이젠 언니라고 불러요(웃음). 한 땅에 사는 남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겠어요.”
노은지씨는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좋은 일터를 연결해주고, 오십이 넘으면 남을 가르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꾼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몫이 아니니까.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 / 원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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