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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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선 사람들이 있다.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 보이지만 신체적(때론 정신적) 기능과 능력이 평범한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한다.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고, 30분 이상 걷지 못하는 의사 류미씨도 여기에 속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중간에 선 그녀의 고군분투 의사 도전기를 공개한다.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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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종로구 부암동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초콜릿 전문점은 류미씨(37)의 단골 카페다. 이곳은 주차를 한 후에 골목길을 여러 번 돌아와야 하기에, 다리가 불편한 류미씨가 자주 찾기에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창문 너머로 인적 드문 골목에서 짐을 잔뜩 짊어진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추석을 맞아 현재 근무지인 경남 창녕에서 인천의 부모님 댁으로 가기 위해 짐을 바리바리 싸서 올라온 듯 보였다. 차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서는 그녀는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서 있고, 걸을 수 있는, 겉보기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는 어머니가 태워다주셨어요. 인터뷰가 끝나면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했고요. 워낙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어떻게든 이동 수단이 마련되더라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웃음).”

경남 창녕에 위치한 국립부곡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류미씨는 경상도 생활 1년 반 만에 유창한 사투리 실력을 자랑할 정도가 됐다. 이제는 표준어가 더 어색하다며 웃는 그녀는 경상도 억양과 표준어가 어색하게 섞인, 어눌한 듯 정감 넘치는 어투로 기자와 첫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구김 없이 편안한 인상의 그녀가 대학에 세 번 입학했고, 의사가 되기 위해 많은 길을 돌아와야 했던, 남들보다 더 할 말 많은 인생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고, 예기치 못한 통증
사건의 발달은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됐다. 유명 특목고등학교에 다니며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는 입시를 코앞에 두고 사고를 당해 한 달간 등교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사고에 대해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남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사건이었고, 이를 다른 방법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다지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군가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사건의 경위야 어찌 됐건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입시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적은 이미 곤두박질친 상태였지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떠밀려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선택했다. 두 발에 깁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대입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합격. 목발을 짚고 버스와 택시로 등하교를 하며 시작한 대학생활은 몸이 불편한 신입생에게는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도, 여유롭지도 않았다. 한 학기가 지나도록 목발을 뗄 수 없었고 불편한 몸으로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는 것도 곤혹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몰랐어요. 의사들 말로는 저와 비슷한 상태인 환자들이 각기 다른 증상을 보인다고 했어요. 전혀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죠. 극과 극의 상황에서 제가 어느 정도의 통증을 느끼게 될지 의사도, 저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어요.”

목발을 떼고 나서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예전처럼 무심히 지하철을 탔지만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10분이 지나도 자리가 나지 않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람과 아파서 걷지 못하는 사람 중에 그녀는 중간쯤이라고 해야 할까. 류미씨는 10분 이상 서 있을 수 없었고 30분 이상 걷지 못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아파서 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녀의 병명은 ‘박리성 골연골염’으로 무척 낯설다. 사고로 연골과 뼈가 망가져 완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아플 수도 있고, 아프지 않을 수도 있는 병’이다 보니 아무리 아파도 ‘장애등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겪는 통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수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길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두 다리 멀쩡한 젊은 여자가 엄살떠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통증의 속성상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통증에 대해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슬퍼할 새도 없었고 좌절할 새도 없었죠. 슬픔보다 늘 통증이 앞섰거든요. 마음은 모호하고 육체는 명료해요. 슬픔 이전의 통증은 언제나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만들어주었죠.”

한 학기 만에 휴학계를 낸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고 이과에서 문과로 진로를 바꿔 이듬해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에 진학했다. 입학 시험 당시 휠체어를 탄 그녀의 모습을 모두가 기억하고 있었던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와는 달리 서울대 불문과에서는 4년간의 대학생활 동안 그녀의 신체적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외과 의사셨어요. 그럼에도 부모님께조차 제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못했어요.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인천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고, 가끔 만나는 부모님께 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않았죠.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요.”
아픈 발목이 인생의 발목을 잡다

일상적으로 생각하기엔 살면서 10분 동안 서 있고, 30분 동안 걸을 일이 그렇게 많은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무심코 해왔던 일이기에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류미씨는 살면서 불편한 발목 때문에 난감하고 힘든 상황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일단 버스, 지하철을 탔을 때 10분 만에 자리가 나지 않으면 난감해진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라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없다. 늦은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됐다. 그렇잖아도 택시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0분 만에 택시를 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MT에 참가할 수도 없었고, 가족과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팔짱 끼고 번화가를 거닐거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꿈꿀 수 없었다.

류미씨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눠 인생을 리모델링해 살았다. 이렇게 구별을 짓고 나니 남들보다 활동 반경이 줄어들기는 했어도 생활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도 주로 영화를 보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활동성 없는 일을 주로 했다. 쇼핑도 인터넷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휠체어 탄 ‘미모의 여의사’ 류미씨의 좌충우돌 분투기

그런데 아픈 발목이 끝내 그녀 인생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 시험을 치를 때였어요. 1차 작문 시험을 통과한 후 현장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치러진 2차 시험도 무난히 해냈는데, 마지막 3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1박 2일로 진행된 합숙 중 등산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거든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무모함이 만들어낸, 인생의 첫 탈락이었죠.”

그럼에도 이를 발판 삼아, 기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도전해 결국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그 후 3년간 편집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조직 생활에서도 자꾸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더구나 활달한 에너지가 많은 그녀에게 내근직인 편집 업무는 무난하지만 오래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격증을 따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심은 그녀에게 본격적인 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주었다.

진통제 50알로도 지울 수 없는 통증
“의대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주변에서 ‘붙기만 하면 길이 열릴 거다’라며 응원해주셨어요. 그중에는 의사도 많이 계셨지만 막상 제 상황을 정확히 모르셨기 때문에 저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는 못하셨어요. 아버지도 ‘개업의는 힘들다’라고만 말씀하셨을 뿐이에요. 저 또한 실습이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실감하지 못했던 터라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짐작만 하는 마음으로 의대 진학을 준비했죠.”

그녀는 이과에서 문과로, 다시 문과에서 이과로 진로를 바꿔 27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가톨릭대 편입에 성공했다. 덕분에 예과 2년은 건너뛰고 본과 공부부터 시작됐는데, 문제는 본과 3학년 2학기 때부터 1년간 진행되는 병원 실습에서 불거져 나왔다. 실습은 말 그대로 병원 생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기에, 회진을 돌고 수술방에서 참관을 하거나 스크럽(보조)을 선다. 각 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보통 회진은 30분 이상이 기본이고 수술실에서 반나절 이상 서 있는 경우도 흔했다. 건강한 체력을 가진 젊은 학생들에게도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때문에 류미씨에게 병원 실습은 ‘서기’와 ‘걷기’의 반복이었고,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생활하는 데 불편하기는 해도, 견딜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병원 생활이 시작되면서 큰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 거죠. 겉보기에는 멀쩡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주지 못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이럴 바에야 누가 봐도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애가 오히려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은 없을 테니까요.”

실제 실습 도중 흉부외과 수술방에서 주임교수에게 “너보다 외팔이가 더 낫다”는 말을 들으며 쫓겨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동기들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실습 과정을 어렵사리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거대한 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99%의 합격률을 자랑하던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지게 된 것이다. 몸이 불편하다는 진실, 거기에 당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면접관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고시를 치르면 의사 면허가 주어진다. 진료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개업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특별한 전공과목이 없던 터라, 의사 면허만 가지고 개업한들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는 수련의를 끝내고 ‘전문의’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하지만 그녀는 번듯한 의사 자격증을 가지고도 취업을 할 수 없었다.

모교 인턴 모집에서 떨어진 후 다른 병원에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녀를 이해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레지던트는 ‘이거 먹고도 못 서 있느냐’리며 진통제 한 움큼을 들이밀기도 했어요. 통증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의사조차 제 통증을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그걸 한꺼번에 다 먹어버릴까’ 그 순간에는 그런 마음도 들었죠. 하지만 제 통증은 진통제를 아무리 먹어도 진정될 수 없는 거예요. 전혀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 그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힘들게 시작한 인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오래 서 있고 걷는 대신 앉아서 이동할 수 있는 ‘휠체어’로 병원을 활보했다. 하반신 마비가 더 낫겠다고 할 정도로 절망했던 그녀는 외려 ‘휠체어’에 앉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회진은 물론, 수술방 참관도 어렵지 않았고 각종 처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턴 생활 중 깨달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발자국이라도 걸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휠체어로 이동한 후 필요에 따라 서서 하는 의료적 행위도 할 수 있다. 막상 ‘휠체어’를 타고 보니 잠시라도 서 있고, 잠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가 ‘도전자’
류미씨는 전쟁 같았던 인턴 과정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마치고 이제 ‘당직에서 자유로운’ 레지던트 2년 차에 들어섰다. 최근에는 한 언론사에서 진행한 원고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고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하지만 이 책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는 “앉아 있을 때는 통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라며 “지금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말처럼 책 속의 류미씨는 고난을 만나 좌절하기도 하고, 역경을 재치 있게 뛰어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함정 속에 퐁당 빠지기도 한다. 구구절절한 감정적 호소 없이, 유쾌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녀는 비단 신체적 통증이 아니더라도 이 시대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는 ‘도전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류미씨는 ‘전문의’가 되는 단기간의 목표 외에 작가로서의 의욕도 감추지 않았다. 책은 물론 인터뷰 내내 함구했던 고3 시절 당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중요한 소스가 될 것이다’라며 끝까지 말을 아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의 생활도 글로 옮겨 놓고 싶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세상에는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있는 직업도 많은데 그녀는 왜 굳이 기자나 의사와 같이 활동성 많은 직업을 선택한 것일까?

“주변에서는 ‘네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 정도 하고 산다’라고들 해요. 불편하지 않았으면 더 많이 돌아다니며 살았을 거라는 거예요. 주변 반응이 그 정도니,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하는 저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편집기자나 정신과 의사를 선택한 것도 제 몸 상태를 어느 정도 감안한 거죠.”

인터뷰를 마치며 편집기자로 3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자신의 기사에 어울릴 만한 제목으로 어떤 게 좋겠냐고 물었다.

“뭐, 특별한 게 있겠어요? ‘미녀 의사’ 정도가 좋겠네요. 아, 이건 정말 농담입니다(웃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예뻤다. 큰 눈에 하얀 피부도 그랬지만, 오랜 시간 아픔과 함께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긍정적인 마음이 그녀를 더 맑고 예쁘게 빛내주고 있었다.

장애는 Disable 아닌 Challenged이다
“장애인은 영어 ‘Disable’를 번역한 말이다. 지금 영미 지역에서는 이 말을 쓰는 사람을 미개인 취급한다. 장애인은 뭔가를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쓰기 시작한 용어는 ‘Challenged’이다. 그들은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전받은’ 것이다. ‘도전받았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용기를 넘어서 의욕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의욕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도전 받은 자’가 희망을 바라보는 말이라면 ‘할 수 없는 사람’ 은 절망을 내재하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내 상황에 적당한 단어를 찾자면 ‘중간 도전인’ 정도가 될 것이다. 책 「도전받은 곳에서 시작하라 - 휠체어 탄 의사 분투기」 중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이성원 ■장소협찬 / MONOS(02-39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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