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

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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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엄홍길 ‘대장’일까. 원정 대장의 대장일까, 대장정을 많이 나서니 대장일까. 결론은 한 가지, 그에게 대장만큼 어울리는 직함은 없다는 것. 히말라야의 혹독한 환경에서도, 혹은 정신적으로 괴로운 상황에서도 그는 불굴의 도전정신과 긍정의 마인드로 일보 전진의 기운을 불어넣어줄 만한 믿음직스러운 대장이다. 지금 인생이 힘겨운 당신, 과연 몇 부 능선에 서 있는가. 엄 대장의 에너지를 받아서, 다시금 희망의 고삐를 당겨보자. (편집자 주)

16좌 등정의 기록, 16개 휴먼스쿨 설립으로 이어가겠다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_
오늘은 태백에 다녀오셨다고요?

엄홍길_ 네. 하이원리조트에 제 이름을 건 인공 암벽장이 생겼어요. 해외와 견줄 만한 시설을 갖춘 크고 멋진 곳이 만들어져서 거길 다녀왔죠.

김진세_ 저는 태백을 태국이라고 듣고는 피곤하실까봐 한 걱정 했죠.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시니까요.

엄홍길_ 아, 태국이 아니라(웃음), 내일부터는 스리랑카로 봉사활동을 떠납니다.

김진세_ 요즘은 엄홍길휴먼재단 일도 열심히 하고 계시던데요.

엄홍길_ 2008년 5월 28일에 재단을 설립했죠. 산이 저에게 준 깨우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히말라야 8,000m 이상의 16좌 등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기까지 성공 이면에 수많은 실패와 희생, 고통의 세월이 있었거든요. 제가 그 시련을 극복한 것이기도 하지만 히말라야가 저를 받아준 것 아니겠어요?

김진세_ 그렇죠.

엄홍길_ 저에게 무척이나 큰 은혜를 주셨는데, 성공했다고 히말라야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조그마한 것이라도 되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김진세_ 혼자 힘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잖아요.

엄홍길_ 많은 분께서 공감해주셨어요. 언제 재단을 발족할까 저울질만 하던 차에 마침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에서 휴먼원정대(2004년 초모랑마 원정 도중 숨진 대원들을 찾기 위해 엄홍길 대장이 조직한 원정대의 이름. ‘휴먼원정대’는 지난 2005년 두 달간의 노력 끝에 에베레스트 정상 8,750m 지점에서 고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수습해 돌무덤을 쌓고 그의 안식을 기원했다)의 공을 인정받아 상금 4천만원과 함께 특별공로상을 받았어요. 당시 시상식에서 “재단을 만드는 데 쓰겠다”라고 공표를 했죠.

김진세_ 가장 먼저 추진하신 일이 학교를 짓는 거였죠?

엄홍길_ 아이들이 춥고 배고프다고 해서 빵이나 옷을 주는 건 일시적인 방편이지 그들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잖아요. 생선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다 싶어서 초등학교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1호 휴먼스쿨이 지어진 곳은 에베레스트의 팡보체라는 곳이에요. 히말라야에서 제가 가장 먼저 도전했던 산이 에베레스트이고, 또 첫 번째 사고로 제 동료를 잃은 곳도 바로 에베레스트입니다. 그 친구가 술딤 도르지라는 셰르파인데, 그의 고향이 바로 팡보체예요.

김진세_ 당시 충격이 크셨을 텐데요.

엄홍길_ 크나큰 충격을 받았죠. 사고 이후 팡보체에서 그 친구의 홀어머니와 갓 스무 살도 안 된 미망인을 만난 뒤에 ‘산을 떠나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귀국길에 올랐어요. 하지만 히말라야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을 거뒀죠. 이후에도 쭉 이 지역으로 등반을 할 때면 유가족과 관계를 맺었어요. 늘 그 친구를 생각하며 언젠가 이 지역에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팡보체에 첫 번째 학교를 지었죠.

김진세_ 그 지역에 학교를 짓는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요.

엄홍길_ 우여곡절이 많았죠. 해발 4,060m이다 보니 차량 접근이 안 돼요. 모든 물자수송은 경비행기나 헬리콥터로 해야 하니까 수송비가 엄청 났어요. 또 겨울이 긴 지역이라 건축공법도 다르게 해야 했고요. 건축기술자도 경비행기에서 내려서 3박 4일을 걸어 올라가야 했죠. 쉬운 게 하나도 없었어요. 8,000m 산에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밀어붙였어요.

김진세_ 그것도 엄청난 도전이셨군요.

엄홍길_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뜰 때만 해도 주민들이 혀를 차면서 “저게 가능하겠냐”라고 했대요. 외국의 여러 NGO 단체에서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더라고요. 그러니 우리가 학교를 짓는다고 했을 때 ‘괜히 폼만 잡고 사진만 찍고 가겠지’ 하고 반신반의했던 거예요. 그런데 1년 만에 학교를 지었더니, 이건 기적이라고 했어요. “미스터 엄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죠.

김진세_ 그러게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어요?

엄홍길_ 현지 사람에게만 맡겨놓으니까, 이러다가 개집 하나 못 짓겠더라고요(웃음). 함께 원정 다니던 대원 중에 건축업을 하는 후배가 있어서 부탁을 했죠. 처음에는 원정 가는 건 줄 알고 좋아하더니(웃음), 제 부탁을 듣고는 자기 일을 접고 도맡아준 덕분에 준공 날짜에 맞춰서 완성할 수 있었어요. 2호 학교는 네팔의 타루프에 지었고 지금은 룸비니라고 석가모니가 탄생하신 네팔의 인도 접경 지역 평야지대에 세 번째 학교를 짓고 있어요. 내년 2월 22일 준공 날짜를 잡고 한창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김진세_ 학교는 언제까지 지을 계획이세요?

엄홍길_ (산악인으로서) 제 목표가 8,000m 16좌였잖아요. 히말라야가 제게 16봉을 내어줬으니, 저도 그쪽 오지에 16개 학교를 짓겠다는 게 새로운 목표이자 꿈입니다. 그렇다고 숫자에만 연연하는 건 아니에요. 그 현지 사정에 맞게 세심하게 배려해서 짓고 있어요. 아마 다른 NGO 단체라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예요. 1호 학교의 경우 난방 시설을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서 모든 벽과 벽 사이에 단열재를 넣고, 햇빛이 잘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크게 만들었어요. 1월에 가봤더니, 큰 창으로 환하고 따뜻한 햇빛이 들어와 난방을 하지 않아도 훈훈하더라고요. 아름다운 경관도 그대로 들어오고요. 두 번째 학교 준공식에는 현지 교육부 장관이 와서 “앞으로 네팔의 초등학교 모델로 삼아야겠다”라는 축사를 하셨어요. 저희가 달랑 학교만 지은 것이 아니라 책걸상이며 컴퓨터실, 도서실, 양호실, 놀이시설까지 완비했거든요. 생전 처음 그런 놀이기구를 접해본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죠.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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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세_ 인근에도 소문이 자자하겠어요?

엄홍길_ 세 번째 학교의 경우 아직 완공도 못했는데 잘 짓고 있다는 소문이 나서 벌써부터 학생 수가 50명이나 늘어났어요(웃음). 그래서 교실 두 개를 더 만드는 상황이 됐어요.

김진세_ 기쁘면서도 책임감이 크시겠어요.

엄홍길_ 이제는 네 번째 학교 지을 자금을 마련해야죠. 또 기존 학교의 학용품비 지원도 해야 하고요. 저희가 교사와 양호교사 월급과 의료봉사를 위한 약품도 지원하고 있거든요. 제가 개인적으로 강연도 다니고, 산악회 관련 행사로도 바쁘지만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건 재단 일이죠.

세 살 때부터 산에서 자란 산사나이
김진세_ 이렇게 훌륭한 산악인이 되셨는데, 정작 아버님께서는 반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아버님과는 관계가 어떠셨어요?

엄홍길_ 저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셨어요. 제가 개구쟁이기도 했고요. 산에 미쳐 있는 것을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는데, 그 사이에서 어머니께서 완충 역할을 해주셨죠.

김진세_ 아버님은 등산을 안 하셨어요?

엄홍길_ 저희 집이 도봉산 중턱에 있었으니, 수시로 산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셨을 거 아니겠습니까. 또 거기서 매점을 하셨으니까 굳이 등산을 따로 하실 필요가 없으셨죠.

김진세_ 장남이라고 하셨죠?

엄홍길_ 네, 위에 누님이 있고 밑으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어요.

김진세_ 형제분들은….

엄홍길_ 산에 안 다녀요(웃음). 지금은 누님과 매형, 여동생은 가끔 다니는 거 같긴 하더라고요.

김진세_ 제가 문득 대장님의 아버님 입장이 되어보니, 장남이 만날 산만 오르고, 그것도 위험한 산만 다녔다면 속 많이 썩었을 거 같은데요. 그래도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으셨나 봐요.

엄홍길_ 인생은 스스로 판단해 개척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걸 아버님께서 가르치신 거 같아요. 생각해보세요. 부모님이 장사를 해서 형제들은 다들 거기에 매달려 있고, 주말이면 특히 바쁜데 저는 산에만 다니니 얼마나 못마땅하셨겠어요? 그래도 그걸 강압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으셨어요. 다만 화가 나면 그때만 좀 나무라시긴 하셨지만, 당신께서 생각하는 인간의 기본 도리에만 어긋나지 않는다면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김진세_ 그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군요.

엄홍길_ 제가 산에만 다녔을 뿐이지, 못된 짓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러니 제가 밖을 돌아다녀도 ‘저 놈은 지 앞가림은 하는 놈이니까 신경 안 써도 되겠다’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거 같아요.

김진세_ 본격적으로 산을 타신다고 할 때도 내버려두셨어요?

엄홍길_ 그게 어느 날 갑자기 본격적으로 산을 타겠다고 한 게 아니라 서서히 달궈지면서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일이라 크게 무리가 없었어요.

김진세_ 어머님은요?

엄홍길_ 늘 “이놈아, 집안의 장남이 이렇게 해서 되겠냐.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느냐”라는 말씀은 하셨지만, 그래도 저와 아버님 사이에서 중재를 잘해주셨어요.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아버님 몰래 해주시기도 하고(웃음).

김진세_ 집안 식구들이 다 붙어서 가게 일을 도울 때 혼자만 빠졌으니, 좀 밉상일 수도 있었겠어요(웃음).

엄홍길_ 그렇죠, 형제들에게 미안하죠. 특히 등산 시즌이나 주말이면 장사가 무척 잘돼서 정신없었거든요. 조카들까지 나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러고 다녔으니, 많이 미안하죠.

김진세_ 그 당시에는 산이 뭐가 그리 좋으셨어요?

엄홍길_ 하아, 그냥 산에만 가면 좋고 편한 거예요. 아무런 잡념 없이 행복하고요. 자연의 모든 것 그 자체가 정말 좋았어요.

김진세_ 그런 기분을 제일 처음 느낀 건 언제였나요?

엄홍길_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부터 산을 놀이터 삼아 놀았으니까요. 제가 2000년 5월까지 40여 년 세월을 산 근처에서 살아서 도시 환경보다 산이 더 익숙해요. 처음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적응이 안 돼서 정말 힘들었어요. 9층에 살았는데, 아휴….

김진세_ 어려서 산에서 사셨으면 학교 가는 길이 힘들었겠어요.

엄홍길_ 산길을 따라 40분에서 1시간 정도 걸어 다녔어요.

김진세_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셨어요?(웃음)

엄홍길_ 만날 뛰어다니고 노는 거 좋아했는데, 공부를 잘할 수 있었겠습니까?(웃음) 그냥 중간 정도(웃음).

김진세_ 중학교 2학년 때 클라이밍을 처음 배웠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엄홍길_ 저희 집에서 좀 더 올라가면 두꺼비바위가 있었어요. 바위 윗부분이 두꺼비가 입을 벌린 것처럼 기이하게 생겼는데, 그 암벽이 좍 펼쳐져 있어서 굉장히 좋거든요. 저희 집에 와서 음식도 사고, 술 한 잔 하러 오시는 분들과 친하게 지내다가 등반하는 거 구경하면서 ‘신기하다, 재밌겠다’ 이러다가 배우게 된 거죠.

김진세_ 금세 따라 하겠던가요?

엄홍길_ 제가 도시 사람들과 신체적으로 좀 다른 거 같아요. 걸음마 내딛기 시작하면서부터 평지 보행을 한 게 아니라 매일 산을 오르락내리락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하체 근육이 남다를 수밖에요. 또 지금에야 먹을 게 지천이지만 그때만 해도 나무 타면서 머루, 다래, 밤을 따 먹곤 했죠. 또 옛날에 TV에서 ‘타잔’이 나왔잖아요?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_ 네, 기억나요.

엄홍길_ 그걸 보고 따라 했었죠. 또 잣은 엄청 높은 곳에 달려 있거든요. 어려서도 그 나무를 다 올라갔어요. 지금 봐도 그 나무들은 진짜 높거든요. 지금은 올라가라고 해도 못 올라가요. 그때는 겁도 없이 놀았던 거죠. 그렇게 신체가 높은 산을 올라갈 수 있게끔 발달된 거예요.

산에 미친 남자가 바다로 간 사연
김진세_ 재미있는 게 대장님께서 산과는 아주 거리가 먼 해군에 입대하셨어요(웃음). 지원하신 거예요?

엄홍길_ (웃음) 나이가 차서 군대를 가야 하는데 3년 동안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여태껏 산에 미쳐서 산에서만 살았는데….

김진세_ 이젠 물에서 좀 살아봐야겠다?

엄홍길_ 바다? 아하! 배 타고 망망대해 이 섬 저 섬 다니다가 어느 항구에 정박하고 수영을 하면 참 멋있겠다고 낭만적인 상상을 하면서 지원을 한 거예요.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인천 연안부두 근처 연안경비정 근무로 배치를 받았어요. 정박해 있으면 졸병이라도 내무반 생활이 참 편했어요. 그런데 출동만 나가면 너무 괴롭고 힘든 거예요. 취사병이 따로 없어서 제가 취사병 노릇을 해야 했거든요. 아홉 명 분의 식사를 배 밑 좁은 공간에서 하려는데, 제가 어디 요리를 해봤겠습니까(웃음).

김진세_ (웃음)

엄홍길_ 만날 생선 손질하다가 가시에 찔리고, 게다가 선배들은 ‘음식이 짜네, 맵네’ 타박하지.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배 엔진에 불이 나서 우리 배가 고장이 난 거예요. 다행히 부두까지는 들어왔는데, 결국 폐선 처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김진세_ 그럼 부대원들은 어떻게 됐나요?

엄홍길_ 할 일이 없어서 대기발령 상태로 있었죠, 뭐. 그러다가 거기서 저한테 암벽등반을 배웠던 분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직책이 높은 상관이시더라고요.

김진세_ 군대 생활 폈네요(웃음).

엄홍길_ 그래도 어쨌든 임무는 해야 하니까요. 하긴 덕분에 가끔 사제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어요. 또 서울과 가까워서 면회 오는 사람도 많아서 그런 대로 편했어요. 그런데 제 상관들은 발령을 받아 다 나가고 혼자만 남아 있다 보니 제가 완전히 군기가 빠진 거예요(웃음). 갓 일병 달았는데 말이죠. ‘짬밥’ 살이 쪄서 허벅지가 얼마나 굵어졌는지, ‘와 내가 봐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해군 UDT 특수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그걸 보는 순간 ‘저건 남자로서 할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진세_ 주변에서의 반응은?

엄홍길_ 헛소리하고 있다고 했죠. 다른 사람은 다 돼도 너같이 군기 빠진 놈은 안 된다고(웃음). 그래도 제 인생은 제가 사는 거니까, 어쨌든 밀어붙여서 지원을 했는데 이게 6주도 아니고 6개월 훈련을 받는 거예요.

김진세_ 세상에!

엄홍길_ 그 훈련이라는 게 진짜(웃음), 상상을 초월합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중에는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거예요. 지금이야 군대가 어디 군대입니까, 병정놀이 하는 거지(웃음).

김진세_ 근데 거기서도 마라톤 같은 거 일등 하셨다면서요.

엄홍길_ 마라톤, 수영은 거의 상위권이었어요. 1, 2위를 다퉜죠.

김진세_ 이후 산에 오를 때 체력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겠어요.

엄홍길_ 그럼요. 그게 결정적인 순간에 많은 도움이 됐죠.

성공보다 먼저 경험한 실패, 동료의 죽음
김진세_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 16개를 정복하셨잖아요. 하지만 이면에는 절반의 실패 경험을 갖고 계시죠. 더군다나 초기 3년간은 두 번 실패 후에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셨고, 이후 여섯 번 내리 실패하셨잖아요.

엄홍길_ 그랬죠.

김진세_ 정신적으로 가장 힘드셨던 순간은, 아까도 언급하셨던 에베레스트 도전에서 셰르파를 잃었을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대장님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던가요?

엄홍길_ 네, 그런데 당시 그 친구가 저랑 같이 오르다가 추락한 게 아니에요. 식량과 장비를 가져다주기로 한 두 명의 셰르파를 기다리다가 그중 한 명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거예요.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내려오는 길에 바람은 또 얼마나 불던지…. 히말라야의 겨울은 엄청납니다. 상상을 초월해요. 2,500m에 달하는 거대한 절벽에서 낙석이 총알처럼 날아다니죠. (물 한 모금 들이켜고) 잔뜩 겁에 질린 상태로 내려오면서 대체 어디서 어떤 사고가 일어났는지 상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산악인 엄홍길 16좌 등정의 기록은 히말라야 오지의 16개 학교 건립으로 그 빛을 이어갈 것이다. 1호 휴먼스쿨 팡보체 초등학교에 이어 현재 3호의 건설이 한창이다.
▲불의의 사고 이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15년간 불편한 몸으로 살았던 네팔인 밍마 참지양(가운데)은 엄홍길휴먼재단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치료를 받고 두 발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팡보체휴먼스쿨의 건강진료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산악인 엄홍길 16좌 등정의 기록은 히말라야 오지의 16개 학교 건립으로 그 빛을 이어갈 것이다. 1호 휴먼스쿨 팡보체 초등학교에 이어 현재 3호의 건설이 한창이다. ▲불의의 사고 이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15년간 불편한 몸으로 살았던 네팔인 밍마 참지양(가운데)은 엄홍길휴먼재단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치료를 받고 두 발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팡보체휴먼스쿨의 건강진료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김진세_ 그럴 수밖에요.

엄홍길_ 그 친구의 흔적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절벽 바위 틈새에 배낭이며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어요. 더 내려오다 보니 이번에는 등산화가 바위틈에 딱 껴 있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저걸 다시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때의 공포감이라는 것은…. 등산화가 쉽게 벗겨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벗겨진 등산화를 보는 순간, ‘저 속에 발목이 있는 건 아닌가? 발목이 부러지면서 신발과 같이…’ 그런 생각을 하니까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도 이건 반드시 확인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고개를 돌렸더니, 분명히 신발만 있더군요.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사방에 핏자국이….

김진세_ 그런 공포심이 오래 남잖아요. 트라우마라고 하죠. 나중에도 산에 가실 때 그런 공포심이 느껴지던가요?

엄홍길_ 왜 없겠습니까. 은연중에 그런 것이 떠오르죠.

김진세_ 어떻게 극복하세요?

엄홍길_ 거기서 두려움을 느끼고 포기한다면, 절대 다시 오를 수 없는 거죠. 이겨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나는 이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고 스스로 수없이 많은 갈등을 하게 됩니다.

김진세_ 워낙 담대해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넘기신 줄 알았더니 실은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좀 더 강하셨던 거네요.

엄홍길_ 네, 그렇습니다. 그 몇천 미터의 산을 한두 번 가본 대원들은 산의 깊이, 그 내면 세계를 모릅니다. 겉만 보고 다니는 거지, 속을 모르는 거죠. 저는 그동안 수차례 등반을 다니면서 산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또 그 위험한 상황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됐어요.

김진세_ 아, 일종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인데요.

엄홍길_ 눈사태가 쏟아질 것 같다, 돌이 떨어질 것 같다, 히든 크레바스(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빙하의 갈라진 틈)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딱 그런 상황이 돼요. 제가 예상하는 대로 전개되는 겁니다. 스스로도 놀라고, 또 너무너무 겁도 나고요.

김진세_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겠어요. 어쩌면 흔히들 ‘신기’라고 말하는?

엄홍길_ 그런 셈이죠. 그런 신기가 딱 발동한다니까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 말자.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고 다독이죠.

김진세_ 보통 사람은 견뎌내기 힘든 큰 실패를 많이 겪으셨잖아요. 그것들을 이겨내는 특별한 힘이 있으신 듯해요. 실패를 바라보는 남다른 눈이라고나 할까요?

엄홍길_ 저보다 등반 경험이 많은 대선배님도 계시고 지금 한창 등반하는 후배들도 있지만 저만큼 고산 등반을 하면서 극한의 상황을 많이 체험한 사람은 없을 거 같아요. 죽음이라는 공포랄까, 별의별 상황을 다 겪은 거죠. 아마 평범한 사람은 백 년을 살면서도 못 겪을 일들이죠.

김진세_ 평생 한 번도 겪기 힘든 일을 수차례 겪으셨잖아요.

엄홍길_ 그렇다 보니 담담해지더라고요. 사고가 터지면 순간적으로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이내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만약 우왕좌왕하고 눈물을 쏟으면 저를 믿고 따라오는 대원들은 어떻겠어요.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는 거죠. 엄청난 노력이에요. ‘흔들리면 안 된다. 사고는 사고다. 산 사람부터 살아야 된다.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자. 그 다음에 생각하자’. 어느 정도 상황이 종료된 뒤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싶죠. 그제야 고통스럽고 ‘내가 당했어야 하는데…’ 하는 죄책감도 느끼죠. 하지만 일단 사고를 당하는 순간에 저는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분명 징조가 있어요. 당사자는 모르지만 산 사람은 알아요. 그럴수록 운명과 숙명을 생각하게 되죠.

김진세_ 하지만 극한의 상황을 겪고도 또다시 오르시잖아요.

엄홍길_ 그렇죠. 마음에 쌓아두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당연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니, 내 목표를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거죠. 솔직히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올라가야 하나, 여기서 주저앉아야 하나,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겠습니까. 그럴 때일수록 강한 긍정의 사고를 갖는 거죠.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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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만병통치약
김진세_
한 TV 프로그램에서 엄지발가락이 없다고 밝히셨잖아요(1992년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 동상으로 오른쪽 엄지발가락 한마디와 두 번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냈다). 걷는 데는 치명적인 약점인데, 그럼에도 끄떡없으신 걸 보면서 새삼 참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어요. 워낙 성격적으로 기질적으로 남다른 의지를 타고나는 분도 있습니다만, 대장님께서는 산에 다니면서 그 신념과 의지를 얻으신 건가요?

엄홍길_ 산에 오르는 많은 과정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진 거 같아요. 1985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을 때, 그 등반 자체가 순조롭고 성공을 거두었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김진세_ 시련이 오히려 득이 됐다는 말씀이군요.

엄홍길_ 동료의 죽음은 가족, 형제를 잃은 그 이상의 고통이거든요. 처참한 현장을 맞닥뜨린 유가족의 흐느낌… 그만큼 고통스러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걸 겪고 나니 여러 가지 극한의 상황과 마주해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더라고요.

김진세_ 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산 아래에서도 어려움이 많은 게 인생이잖아요. 살면서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으세요?

엄홍길_ 크게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지금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잖아요? 이젠 산이 아니고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고 있죠. 사람과의 관계라는 건 인연을 맺고 또 풀어가는 거 아닙니까. 딱히 슬럼프는 없었어요.

김진세_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실 텐데, 어떻게 푸세요?

엄홍길_ 저는 무조건 산에 가요.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어서 결국 우이동 산자락으로 들어갔거든요. 살면서 힘들고 답답할 때는 무조건 산에 올라갑니다. 그럼 마음이 진정되고 꼬였던 일이 풀리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모든 걸 얻은 것 같은 기분으로 산을 내려와요. 그래서 저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오전에는 약속을 안 잡습니다.

김진세_ 산에 가시려고요?

엄홍길_ 네. 산에 올라가서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때도 내가 이겨냈는데, 이 정도야 뭐’라고 생각하게 되죠. 가장 큰 위안은 역시 산입니다.

김진세_ 그렇게 많은 산을 다니다 보면 집안일에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없잖아요? 사모님의 불만은 없으세요?(웃음)

엄홍길_ 왜 없겠습니까. 저야말로 산 중독자 아닙니까(웃음). 제가 가정과 등산 두 가지를 모두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면, 아마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됐을 겁니다. 취미 삼아 산에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가지 말라고 한다고 안 갈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아내가 잘 알기 때문에 묵묵히 내조하고 힘을 실어줍니다. 그 덕에 제가 산에 에너지를 더 쏟아 부을 수 있었죠.

김진세_ 자녀분들은 산에 가겠다고 하지 않나요?

엄홍길_ 딸이 열다섯, 아들이 열세 살인데 우리 애들은 아직까지는 산에 가자면 안 가려고 해요. 그래도 어쨌든 데려가면 진짜 잘 오릅니다. 산에 안 다닌 애들인데도 잘 올라가요. 주변 분들이 (산을 잘 오르는) DNA가 있나 보다고 할 정도로요.

김진세_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의 사연이 절절하게 그려진 산악 영화를 본 기억이 나는데요. 혹시 아이들이 전문 산악인이 되겠다고 한다면요?

엄홍길_ 강요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본인들이 좋아서 하겠다고 하면 말릴 생각은 없어요.

김진세_ 아이들 나이를 보니 대장님께서 한창 산에 다니실 때 태어났겠네요. 아버지의 공백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엄홍길_ 왜 없겠어요. 산에 한 번씩 다녀오면 쑤욱 커 있었죠. 애들이 어릴 때는 저를 보고 울면서 도망가기도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시커먼 사람이 나타나니까 겁나지 않았겠어요? 귀국하고 나면 아이들이 선뜻 제 곁으로 안 왔어요. 하루 정도 지나면 쓰윽 다가와서 옆에 앉곤 했는데, 며칠 친해지면 또 떠나곤 했으니까요. 다른 아빠들처럼 오랜 시간 가까이 있지 못하는 걸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래도 잘 자라고 있어요.

김진세_ 특별한 교육 원칙이나 당부 같은 게 있으세요?

엄홍길_ 그런 건 없어요.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고요. 단지 저는 “할 도리는 해라”라고 하죠.

김진세_ 아, 대장님의 아버님처럼요?

엄홍길_ 꼭 그렇다기보다 “너희들이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세상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 많다. 그걸 이겨내려면 현재 시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얘기를 자주 합니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한 자
김진세_ 엄 대장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엄홍길_ 행복이란 ‘노력하는 것, 만들어가는 것!’ 그래서 노력한 다음에 성취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하죠.

김진세_ 저도 주말이면 가끔 북한산에 가거든요. 산에 가면 뭐가 좋고, 어떻게 하면 산을 제대로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요.

엄홍길_ 운동하겠다고 헬스클럽 다니는 분들 많잖아요. 등산하면서 흘리는 땀과 헬스클럽에서 흘리는 땀은 온도가 다릅니다. 등산이야말로 전신 운동이에요. 일단 좋은 산소를 마시잖아요. 그리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죠. 아무리 돌부처처럼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왜 이렇게 힘드냐는 생각만 들지만 다니다 보면 산이 보여요. 그럼 다음부터는 안 갈 수가 없어요. 엔도르핀이 팍팍 도니까요.

김진세_ 힘들어서 엄두를 못 내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엄홍길_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가자니까 마지못해 가거나, 왜 올라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 좋은 산을 가면서도 시작부터 힘이 들죠. 절대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야죠. 산행 시작하기 전 30분 이상은 반드시 워밍업을 해야 해요. 호흡 조절하고 스트레칭을 해서 몸을 충분히 달군 다음에 속도를 내야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따라서 막 오르니까 시작부터 끝까지 힘든 거예요.

김진세_ 말씀 듣고 보니 저도 차 세워놓자마자 뛰어올라갔다가 뛰어내려왔던 거 같아요.

엄홍길_ 시종일관 그러면 숨 가쁘고 힘들고 그렇죠. 절대 서두를 이유가 없어요.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려오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올라갈 힘만 갖고 가는 게 아니라 내려올 힘도 갖고 와야죠. 내려올 때 더 큰 힘이 있어야 하니까요. 정신적으로는, 산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산을 오르면서 바위를 쓰다듬을 수 있고, 나무를 끌어안아볼 수도 있어야죠. 그렇게 느끼면서 오르다 보면 힘든 줄도 몰라요.

김진세_ 요즘 힘들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실패를 가장 많이 겪으신 대장님께서 힘이 될 만한 말씀 한마디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엄홍길_ 제 경험에 비춰보건대, 눈앞에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그게 영원하진 않더라고요. 시간은 흘러갑니다. 내 인생도 한순간, 한순간 흘러갑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지금의 이 실패를 겪지 않으면 아마 더 큰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이 정도는 내가 감수할 수 있다고. 더 잘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여보세요. 참고 이겨내야겠다는 자신감,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게 중요해요. 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인데 마냥 푸념만 하고 있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거예요. 제 인생의 좌우명이 자승최강(自勝最强)이에요.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한 법이죠. 결국은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죠. 우린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자신감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진세_ 얼마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대장님께서 스쿠버 다이빙하시는 장면을 봤어요. 제 취미가 다이빙이거든요. 문득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면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라고 생각해보니까, 답은 ‘좋아서’더라고요. 제가 오늘 왜 산을 좋아하느냐고 여쭤보지 않았잖아요. 대장님께서도 산이 좋아서 올라가시는 거죠?

엄홍길_ 그럼요! 제가 산이기 때문에, 산이 저이기 때문에 가는 거죠.


김진세의 에필로그
엄홍길 대장, 성공보다 더 값진 실패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정신과전문의로 많은 사람과 상담을 하다 보면 실패와 성공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풀어내는 이 교훈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록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용기를 갖고 헤쳐 나가면 끝내 성공하고야 만다는 진리지만, 슬픈 현실은 이렇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도 우리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받는다. 결코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또 교통사고나 화재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또다시 그런 일이 닥칠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다. 경적 소리에 놀라고 폭죽놀이에 기겁을 한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을 회피하게 마련이다. 흔히 겪지 못할 만큼 엄청난 사고를 당하고 나면 극심한 공포와 우울증을 앓게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기도 한다.

엄홍길 대장에게도 실패가 있었다. 그것도 성공보다 더 주목해야 할 실패였다. 지구별에서 가장 높은 16개 봉우리를 정복한 그의 이력은 진정 화려하다. 하지만 그 성공률은 예상보다 높지 않았다. 1985년 시작해 2008년까지 약 4반세기 동안 서른여덟 번의 등정을 시도해 그의 절반 정도인 스무 번을 성공했다. 성공 반 실패 반이다. 무슨 점심 내기도 아니고, 목숨을 건 도전인데 50%의 성공률은 너무 위험하다. 더구나 첫 도전은 실패였고, 두 번째 도전에서는 설상가상 셰르파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다. 간신히 세 번 만에 첫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도 여섯 번이나 위험천만한 도전을 하고서야 두 번째 성공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아마 뭇사람이라면 충분히 포기를 선언하고 말 상황이다. 그럼에도 엄 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최초라는 화려한 수식 뒤에는 아픔의 역사가 함께했다. 반복되는 실패를 이기고 이뤄낸 도전도 힘들었겠지만,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느꼈을 절망과 무력감이 주는 고통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런 극한 공포를 경험했을 그는 어떻게 다시 설 수 있었을까?

그도 무서웠다고 한다. 비록 그를 빗겨 지나갔지만, 곳곳에 도사린 위험과 고통으로 인해 그만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눈을 질끈 감고 두렵지 않다고 허풍을 떨어봤자 소용이 없다. 공포를 마주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용기 내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해야 비로소 공포는 사그라지게 마련이다. 또 스스로 자승최강(自勝最强), ‘스스로 이기는 자가 가장 강하다’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 용기와 신념 뒤에는 어릴 적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길 바라며 묵묵히 지켜보던 부모님과 산에 중독돼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이해해주는 아내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산과 죽음 앞에 겸손했다. ‘난 죽지 않아! 실패하지 않아!’라는 극단적인 낙천주의가 아닌, ‘산은 무섭고, 나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실패가 마지막은 아니다’라는 현실적인 긍정의 사고가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기에, 실패를 받아들이기에, 그리고 자만하지 않았기에 그는 성공에 오를 수 있었다.

세상 살기가 참 힘들다.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은 녹록지 않은 고통의 연속이다.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엄 대장이 일갈했다. “실패? 목숨을 건 것도 아닌데 용기를 내야지.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세요!” 성숙한 인생 스승의 목소리에는 히말라야의 메아리만큼이나 깊은 울림이 있었다. 인생은 성공보다 실패를 통해 성숙한다.


긍정의 힘을 더하는 선물_「오직 희망만을 말하라」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사실 엄홍길 대장님은 심리전문가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합니다. 엄청난 재난을 당하면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하고 다시는 그 자리에 발을 내딛으려 하지 않잖아요. 공포가 심해지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병을 앓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대장님은 반대입니다. 오히려 재난을 겪고 나서 그 극한의 상황을 잘 이겨낼 수 있는 특별한 힘이 더 생기는 분이시죠. 이런 경우를 ‘외상후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휴먼재단 일로 한창 산에 오르던 시절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책까지 내셨더라고요. 최근작인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에서는 셰르파를 잃은 뒤 겪는 대장님의 인간적인 고뇌와 오지 마을에 학교를 지으면서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산이 준 선물을 봉사로 보답하는 대장님! 말만 앞세우지 않고 실천으로 보여주시는 대장님을 닮고 싶네요.

* 김진세의 인터뷰_ 긍정의 힘 엄홍길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다섯 분을 선정해 「오직 희망만을 말하라」(마음의숲)를 보내드립니다.

엄홍길은…
1960년생. 아시아 최초, 인류역사상 여덟 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완등한 산악인 최고의 스타. ‘정복’이라는 표현을 거부하며 히말라야가 자신을 받아준 것이라고 말하는 엄홍길의 겸손함은 셰르파를 인간적으로 존중한 덕분에 네팔에서 얻은 별명 ‘엄싸부’에서도 묻어난다. 세계 산악 역사상 최초로 등정이 목적이 아닌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원정대를 조직해 결국 동료의 시신을 거두었던 그의 ‘휴먼원정대’는 국민에게 진한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관 세 곳을 가진 그는 2008년에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세계의 어린이와 산악인을 돕기 위한 활동에 한창이다. 1997년 히말라야만큼 넉넉한 품을 가진 아내 이순래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살아 있는 도전의 아이콘 엄홍길 대장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으며, ‘행복연구소 소감’을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다.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외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 행복한 삶으로의 변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애티튜드」를 썼다. 트위터 @happy_mentor

■기획&진행 / 장회정 기자 ■사진&제공 / 이주석, 엄홍길휴먼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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