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을 다룬 드라마 ‘싸인’이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됐었다. 사건 현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증거를 찾는 법의관 윤지훈(박신양 분)은 생소하기만 했던 법의관의 세계를 세상에 알렸다. 현실도 드라마와 같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법의학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절이 멀지 않은 과거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법의학을 개척해온 선구자가 있다. 대학민국 최초의 법의학자이자 국과수 창립 멤버, 제1호 법의관인 문국진(86) 박사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국과수 제1호 법의관 문국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게 해준 사건
“사건 당시 경찰은 한강 백사장 부근에서 일하는 인부들 가운데 누군가가 저지른 범행일 거라고 생각하고, 그들 중에서 좀 수상해 보이면 누구라도 잡아가서 족치고 했디요. ‘빨리 불라, 이 ○○야!’ 뭐 그랬디. 그러나 ‘이 놈이 맞는 것 같다’ 하면서도 시체에 난 치흔과 일치하는 사람은 찾지 못했디요. 그러다가 한 수사관이 피해자 남편의 치흔과 비교해보자고 했는데 말이야… 그게 딱 맞지 뭐갔어. 그 당시 나로서는 치아의 모형과 교상(물려서 남은 상처)으로 개인 식별을 하는 게 처음이었어.”
증거에 의거한 과학 수사가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채 그 형태를 갖추지 못했고, 법의관이라고는 문국진 박사 한 명뿐이었다.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일주일 동안 피해자에게 남은 치흔과 치아의 모형과 남편의 치아 모형을 이리 맞춰보고 저리 맞춰봤다. 결과 발표도 늦췄다. 혹시 놓쳤을지도 모르는 감정 오류를 검토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감정이 맞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였다. 증거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 남편은 경찰에 연행됐고 증거 앞에서 남편은 자신이 범인임을 자백했다. 진범을 찾았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그러나 문국진 박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물론 진범을 찾는 게 본 임무디요. 맞디, 맞아. 그런데 말이야 법의학이란 게 사람의 권리, 즉 인권을 다루는 학문 아니갔어요? 당시는 고문이 횡횡하던 시절이었고, 허위 자백을 강요해 누명을 씌우는 일도 태반이었디. 내가 치흔으로 남편이 범인임을 밝혀내지 않았다면 누가 범인이 되었갔어요?”
문국진 박사는 이 사건이 법의학이 인권을 보호하는 학문임을 잘 나타내주는 한 사례라고 소개했다. 그가 치흔을 가지고 ‘과학적인 증명’을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것이다. 증거는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공정하게 법의학이 집행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문 박사는 법의학으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인권을 지켜냈다. 더구나 이 사건은 국과수에 법치의학실을 설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치흔’으로 범인을 잡은 그의 공을 높이 사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소원을 물었다.
“소원이 뭐 따로 있었갔어? 승진이나 포상 같은 건 애초에 관심 밖이었디요. 그 사건 해결할 때 치과대학마다 찾아다니면서 감정을 요청하며 애를 먹어서 국과수에 법치의학자가 들어오는 게 소원이라 답했지. 사실이었고 말이디. 그래서 국과수에 법치의학 담당자가 생기게 된 기야.”
당시 들어온 우리나라 제1호 법치의학 담당자는 김종열씨. 그는 후에 제6대 국과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국과수 제1호 법의관 문국진
평범한 의대생이었던 문국진 박사가 법의학자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의외로 낭만적이었다. 그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청계천 근처를 걷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헌책방이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한 권의 책을 그곳에서 만난다. 후루하다 다네모노라는 법의학자가 쓴 「법의학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에게는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된 민주국가에서만 발달한다. 따라서 법의학의 발달 정도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나 민주화 정도를 알 수 있다.’
“그 구절을 읽는데… 그 말에 홀딱 반해버렸디요.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막 뛰는 기야. 그때까지 전공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책을 사서 다 읽고는 법의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디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시 법의학의 불모지여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 배울 곳도, 가르치는 곳도 심지어 국과수도 없었을 때니까 말이야. 내 스승이신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상의드렸디요.”
장기려 박사는 법의학을 하겠다는 제자의 결심에 “그건 학문도 아니다”라며 크게 화를 냈다. 스승의 독려를 기대했던 문국진 박사는 실망했다. 하지만 법의학을 선택한 그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졸업을 하고 나니 이제, 정말 막막한 기야. 한국에 법의학과나 법의학교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하는 곳도 배울 곳도 없으니까. 한때는 일본으로 밀항이라도 해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을 꽤 심각하게 하기도 했디요(웃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법의학을 할 운명이긴 한 것 같단 말이지.”
일본과 국교 수립 전이라 사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는 고민 끝에 서울대학교 병리학교실에 찾아가 주임 교수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다. 병리학이 법의학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법의학을 할 운명이긴 했나 보다. 병리학교실을 나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주임 교수가 그를 불렀다. 국과수를 발족할 예정인데 의학과 졸업생을 추천해달라는 공문이 왔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인연 아니오? 내가 졸업한 바로 그해에 국과수가 독립 기관으로 발족하면서 법의관을 뽑았던 거요. 가보니 청와대 뒤쪽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국과수로 쓰고 있더라고. 국과수에서도 서울대학교 의대 졸업생이 왔다고 무척 반겼디요. 내 그래서 법의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기요. 내 자신도 운명이었다고 생각될 때가 많아요.”
국과수가 생기던 해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문국진 박사는 그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과학 수사라는 인식조차 없던 시절에 법의관이란 명찰을 달고 법의학이라는 불모의 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부검하려 메스를 드니 도끼가 날아들었다
법의학을 하고자 결심했을 당시의 부푼 꿈과 법의관으로서의 사명감을 지켜내기에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부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었다. 국과수가 존재하고 법의관이 됐지만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법의관이 된 첫해에 그가 한 부검은 고작 52건. 일주일에 한 건 정도밖에 되지 않아 부검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부검을 ‘두벌죽음’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큰 형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피살자의 가족들은 어지간하면 부검을 하지 않으려 했고, 수사관들조차 부검까지 하면서 사건을 수사할 의지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두벌죽음이란 ‘두 번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해부나 화장, 극형 따위를 당하는 일’이라고 나와 있더군. 왜 옛날부터 ‘신체발부수지부모’라는 말이 있잖소. 그런 인식이 주검에 손을 대는 것까지 금기시하는 풍토를 만들었디요. 그러니 억울한 죽음이나 미제의 사건들이 많을 수밖에. 한번은 피살자 가족이 휘두르는 도끼에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디요(웃음). 지금이야 웃지만 당시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국과수 제1호 법의관 문국진
사과 상자 네 개를 이어 만든 간이 해부대에 청년의 주검을 눕혀놓고 부검을 시작하려고 메스를 들어 절개하려던 순간이었다. 도끼가 번쩍 날아들면서 사과 상자 한쪽이 동강나고 말았다. 문 박사가 고개를 들어보니 할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부검 현장에 와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그는 할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을 뻔했다.
“그런데 말이요, 내가 경험한 미국인들의 태도는 우리와 너무나 달랐디. 뉴욕대학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인데 말이야. 한 개업의가 자신의 아버지 부검을 의뢰해왔어. 수명을 다하고 평화롭게 맞은 죽음이었지만 살아 계실 때 위암과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는 거야. 그러니 정말 위암이었는지 확인해야 자신과 자식들이 대비할 수 있다는 거디. 속으로 못된 놈이라고 욕은 했디요(웃음). 하지만 한편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이만큼이나 다르니 법의학과 의학이 발전하는 것 아닌가 싶더군. 법의학에 대한 인식이 아주 낮은 우리나라의 형편을 생각하니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기야.”
책을 부검하다, 북 오톱시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자이자 법의학의 선구자인 문국진 박사는 국과수에서 법의학과 과장을 끝으로 고려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언뜻 생각하면, 마땅히 국과수 원장을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혹시 권력과의 불편한 관계, 그런 것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출세에 뜻이 있었다면 법의학을 선택하지도 않았디요. 불편한 관계는 없었단 말이지. 고려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부검 의뢰가 많이 들어왔거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얼마나 보람과 사명감을 느낄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했디요. 그런데 당시 법의관으로서 자괴감이 드는 일이 많았어.”
수사관이고 검사고 마치 수수께끼를 내며 ‘어디 한번 맞히나 보자’ 하는 태도로 법의관을 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법의학에 일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그에겐 참기 힘든 것이었다. 법의학에 대한 낮은 인식 수준도 안타깝기만 했다. 실의에 빠진 문국진 박사는 스승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더 이상 못하겠으니 외과의사로 받아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분이 정말 대단하신 양반이요. 한 우물을 파야 한다며 돌려보내시더라고.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라며 반대하셨던 분 맞나 싶을 정도였디. 아무튼 그때 장기려 박사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면, 오늘날 법의학자 문국진은 없었겠디요.”

1 1973년 뉴욕대 의대 법의학교실에서 객원교수로 임명된 문 법의관. 2 새로운 혈액형 CL 발견 기념 촬영. RH형을 발견했던 공동 연구자 위너(Wiener) 박사와 함께.
“가능하니까 시작한 것 아니겠소! 유명한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진료 기록도 많이 남아 있고, 또 전기 작가들이 그들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해서 기록을 남기니까요. 당시는 법의학적 지식이 부족해 사인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문헌적 ‘증거’는 많다고. 북 오톱시를 시작하면서 내 요즘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반 고흐 죽음의 비밀」, 「바흐의 두개골을 열다」라는 책은 ‘부검’하는 일에 몰두해 얻은 결과물이다. 유명 예술가들의 남아 있는 자료들을 분석해 왜곡돼 전해오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바로잡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신이 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씨를 뿌리고 가야 할 분야라고 믿고 있었다.
“법의학 연구는 대학에 맡기고 이제 법의학에 관한 저변 확대와 올바른 인식 확산에 힘을 쏟는 게 내 마지막 임무지 않겠어요. 법의학 감정은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야. TV 드라마 덕에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갈 길이 멀디요. 확고한 사명감 없이는 아직도 힘든 일이니까 말이야.”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때 월남했고, 자유당 독재 정권부터 여러 군사 정권을 살아온 그의 삶은 현대사 그 자체이다. 또 법의학의 살아 있는 역사다. 그러나 이 노학자는 자신의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쉰 번째 저서를 마무리해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법의학이 아니었다면 엉뚱한 살인범을 낳았을 문국진의 그때 그 사건 #1. 간경변증으로 고생하던 남자 K가 약국에서 일주일치 약을 조제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약을 먹은 뒤 외출하겠다며 대문을 나서다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남자의 가족은 약국에서 조제한 약에 문제가 있어 남자가 죽었다며 약사를 경찰에 신고했다. 부검을 해보니 K는 식도정맥류 파열로 사망한 것으로 약사가 조제한 약과는 무관했다. 우연히 사망 직전 약사가 조제한 약을 먹었을 뿐이었다. 약사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2. 개업한 지 30년이나 된 유명 산부인과에서 분만 도중 아이의 머리가 툭 떨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이 일어났다. 분만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진통 끝에 태아의 머리가 보여 의사는 숙달된 솜씨로 태아의 머리를 잡아당겼는데 그만 태아의 목에서 머리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부모는 의사를 고발했다. 의사 또한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부검 결과 아이는 이미 자궁 안에서 죽어 있었고, 사망 원인은 선천성 매독이었다. 의사는 혐의를 벗었다. #3. 시골에서 상경한 B는 창경원에 놀러 갔다가 처음 만난 여인과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B는 하얀 거품을 물고 신음하다 죽었다. 그의 시신을 부검했지만 정확한 사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사인을 듣기 위해 온 B의 가족으로부터 메밀꽃 알레르기가 심했다는 말을 들었다. 재부검 결과 메밀 껍질이 가득 든 여관 베개를 베고 자다 과민성 쇼크를 일으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으로 지목됐던 여자는 풀려날 수 있었다. |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제공 / 원상희, 문국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