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김혜자 분)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친 지 3년이 지났다. 엄마들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전히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찾기 힘든 그녀들을 대신해 여기 네 명의 엄마가 카메라를 들었다. 그 결과물은 드라마와 같은 이름의 사진전으로 빛을 보게 되어 많은 이의 공감을 얻어냈다.
지난 10월, 젊음의 거리 홍대 앞 복합문화공간 상상마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진전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그동안 ‘엄마’란 이름(?)으로만 불리다 당당히 ‘본명’을 밝힌 7인의 사진작가. 지난 1년간 포토그래퍼 윤광준의 강좌를 통해 열심히 갈고닦은 실력을 당당히 선보일 수 있게 됐다. 그중 4인의 주부를 만났다.

엄마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어엿한 작가로 전시장에 섰다. 왼쪽부터 엄순자, 이연옥, 지성옥, 임연희 작가.
“세상의 아름다움과 속내를 들여다볼 것이다. 집 밖도 두렵지 않다” _임연희
함께 떠난 여행에서 사진기로 가족의 모습을 담는 건 보통 ‘아버지의 몫’으로 여겨진다. 일단 여자는 기계에 친숙하지 않고 무거운 장비에 익숙하지 않으며 잡안일이 더 어울린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그런데 카메라를 든 7인의 엄마는 카메라가 부담스럽지 않고 애초부터 편안했다. 이들 중 네 명의 인연은 여행 카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cafe.daum.net/moosimjae)’에서 시작됐다. 함께 간간이 여행을 다니며 카페에 올리던 글과 사진에 맛을 들여 문화센터 강좌를 듣기 시작했고 결국은 전시까지 열게 됐으니 이 여자들의 사진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사진 찍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여행을 다니면서 찍기 시작하다가 좀 더 아름답고 더 특별하게 찍고 싶어서 수업을 듣게 됐어요. 각자 나이도 결혼 연차도 다르지만 우리는 상상마당 사진아카데미에서 함께 수업을 들은 동기예요.” (이연옥·53)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로 시작한 건 7년, 전문가용 사진기로 찍은 건 4년 정도 됐어요. 사실 우리 나이에 튈 일이 뭐가 있어요(웃음). 그런데 사진은 남보다 잘 찍고 싶고 튀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이끌어주지 않았으면 전시까지 할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주저할 때마다 ‘하면 자신감이 생기는데 왜 이름을 잊고 사느냐’라고, ‘사진도 내놓을 만하다’라고 용기를 주셨거든요.” (엄순자·59)
1년이 넘게 이들과 동고동락한 중견 사진작가 윤광준은 여러 권의 책을 낸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이 베테랑 사진가는 무엇 때문에 사진과 친해진 지도 오래되지 않은 이 중년 여성들의 사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됐을까.
“사진에 담긴 섬세함과 매혹적 색채를 유심히 보세요. 대한민국 여성이 지닌 감수성의 층차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사계의 감흥은 나이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인데, 세월을 살아낸 이들은 미세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냈어요. 전국을 돌면서 만난 이 나라의 속살은 다채롭고 색채는 풍요롭지요. 그리고 ‘뿔났다’라고 외치며 사진을 선택한 이들의 용기와 희망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진으로 자신의 이름 찾은 엄마들 “카메라가 제 애인이랍니다”
“의류업을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되니 여유가 생겨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사진이었어요.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다 보니 사진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거지요. 예술이냐 아니냐를 떠나 사진기와 함께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자신감을 얻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주부로서는 큰 즐거움이었어요. 즐거워서 찍었지만 찍는 순간의 감성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었거든요.”
아무리 엄마로 이름을 잊고 살아왔다곤 해도 이들은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사진을 접했고 가족의 도움과 지원이 있었기에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결혼 8년 차에 벌써 아이가 셋인 정초희씨도 남편이 등을 떠밀어 그제야 자신을 찾을 엄두를 낼 수 있었다.
“남편이 ‘저만의 시간을 가져봐라’고 하더라고요. 본인을 돌아볼 시간도 갖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안타깝다고요.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가족 여행을 가도 맛집만 찾고, 풍광을 눈에만 담아왔는데 사진을 찍으니까 할 일이 생긴 거예요. 풍경을 더 깊숙하게 바라보게 되었죠. 스쳐 지나가는 게 많고 멈춤이라는 게 없었는데 사진을 통해 머무는 걸 배웠어요. 지금은 출사 나갈 때 남편, 세 아이와 함께 가요. 엄마가 사진을 찍으면 아이도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을 찍어요(웃음).” (정초희·36)

지성옥_Untitled
가족에만 얽매여 살던 나를 풀어놓으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엄순자)
‘엄마’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세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내 이름은 점점 희미해진다. 나는 정초희다” _정초희
“낡은 삶을 반복하는 것은 언제까지일까?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는 지금부터다.
사진으로 잊었던 나를 만났다” _엄순자
시작은 그저 ‘재밌으니까 더 열심히 해보자’ 하는 마음뿐 큰 욕심은 없었는데 일이 점점 커졌다. 응원하던 가족도 슬슬 ‘대체 엄마가 집안일을 등한시하고 무얼 하고 다니는 건가’ 수상쩍게 볼 때쯤 다행히 전시의 막을 올릴 수 있었다. 전업 작가라도 된 양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직 ‘작가’란 타이틀을 욕심낼 때는 아니지만 충분히 즐겨도 좋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연옥_우음도, 겨울
늦게 시작한 사진이고, 살림 혹은 일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짬을 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강습은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전시 준비를 하면서는 두세 번씩 모여 회의를 하고 서로의 사진을 보며 토론을 했다. 그러는 사이 일곱 명의 여성은 사진이라는 ‘애인’을 공유한 막역한 사이가 됐다. 전시 홍보까지 도맡은 정초희씨의 말처럼 “무모하게 도전했지만 프로처럼 열정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림 같은 사진을 찍어서 집에 거는 게 꿈이었는데, 전시를 했으니 이미 반쯤은 이뤘네요. 사람들이 사진하고 바람났다고 해요(웃음). 10년을 일찍 시작했으면 전업 작가가 됐을지도 모르겠어요. 나한테 이런 감각이 있는지 몰랐어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걸 수도 있잖아요.” (엄순자)

엄순자_봄, 봄, 봄
윤광준 작가는 사진을 가르치며 ‘다른 시선’을 유난히 강조했다. 찍는 기술이야 웬만큼 배우면 엇비슷하지만 남다른 사진은 남다른 시선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미 서양화가로 활동 중인 지성옥씨는 아무래도 유리한 점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제일 먼저 석 점의 작품을 팔았다. 판매된 금액과 상관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보다는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더 좋은 모양이다.
“사실 사진은 어릴 때부터 찍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한 건 아이 낳고부터예요. 제 사진을 알아봐주셔서 무척 흡족해요.” (지성옥)
“스쳐가는 사진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임연희)

정초희_Yellow Flower
전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엄마들은 예전과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 번 엄마가 아닌 삶을 시작하면 좀 더 자신의 이름을 찾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가족이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엄마가 뿔나면, 엄마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글 / 위성은(객원기자) ■사진&제공 / 안진형(프리랜서), 상상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