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기 수사드라마 ‘CSI’에는 현장에서 발견된 땀 한 방울, 미세한 흔적 하나만으로 사건과 범인의 정체를 파헤치는 수사 요원들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표창원, 유제설 교수가 들려준 과학수사는 드라마나 영화 속이 아닌 우리 생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안타까운 희생자를 낳은 흉악 범죄로 한바탕 떠들썩했던 2012년 봄, 두 수사관의 이야기에 더욱 귀가 기울여졌다.
유제설 교수는 10년 동안 경찰로 근무하다 현장에서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느끼고 법과학과 과학수사에 매진한 케이스다. 지문과 혈흔 형태 분석, 범죄 현장 재구성을 가르치거나 논의하는 곳이라면 지구 끝까지 달려갈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대한민국의 과학수사라면 빠지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얼마 전 「한국의 CSI」라는 책을 펴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사건이 아닌, 지금 이 순간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와 과학수사에 대해 일반 국민들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지금껏 특정 집단의 영역으로만 여겨져왔던 범죄와 과학수사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법 피해자가 줄어들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려는 범죄가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기를 바라는 희망도 담겨 있다.
감추는 것보다 알리는 것이 범죄 예방에 효과적이다
LADY 얼마 전 뉴욕에서 세계적 법과학자 헨리 리 박사를 만나고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미국 출장은 어떠셨나요?
표창원 현직 경찰관들과 과학수사 전문가, 학생들까지 11명이 팀을 꾸려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학생이 된 기분으로 현지 과학수사 요원들과 트레이닝을 받고 왔죠. 우리나라 과학수사와 비교해 배운 점도 많고 깨달은 점도 많아요. 인상 깊은 경험이었어요.
유제설 표 교수님이나 저나 현장 경험이 없진 않지만 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항상 실무 경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현장 실무자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며 현장을 좀 더 이해하고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
LADY 우리나라 과학수사와 비교해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어떤 점인가요?
표창원 경찰 개개인의 능력으로 보자면 우리가 더 나은 면이 많아요. 성실성과 집중도, 손기술, 이론적 기반 등 우리나라 경찰의 개인적 역량은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아요. 대신 원칙과 절차, 매뉴얼을 지키는 부분에서는 배울점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증거 하나를 봉투에 담더라도 반드시 정해진 규격과 원칙에 따르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기록을 남기더군요. 하나하나 수행하기에 꽤 어렵고 지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LADY 두 분이 함께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표창원 저는 범죄 분석 프로파일링을 하는 사람이고 유제설 교수는 현장 과학수사 기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서로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서로의 분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과학수사 발전에 계기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이 통해 함께하게 됐어요.
유제설 한편에서는 범죄 수법과 과학수사 기법이 알려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어요. 모방범죄의 위험도 있고 수사망을 피해가는 범죄자들이 많아질 거라는 얘기죠. 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표 교수님을 만나고 달라졌어요. 사람들이 범죄와 수사에 대해 많이 알수록 사회도 안전해진다는 표 교수님의 말에 동의하게 됐죠. 이미 드라마나 영화 등 많은 매체를 통해 상당 부문 범죄와 수사 기법이 알려졌고, 이러한 상황이라면 더 많이 알려 범죄를 예방하고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생각이에요.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시대예요. 감추는 것보다 널리 알리는 것이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이에요.
LADY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발전을 어떤 점에서 실감할 수 있을까요?
표창원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려보세요.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지던 1980, 90년대 초반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현격한 차이가 있어요. 기본적으로 현장 증거 발견과 보존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특히나 우리나라 DNA 수사 기법의 전문성은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어요. 현장에서의 철저한 증거 확보와 유지, 증거들을 종합해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증명해낼 수 있는 입증 능력도 과거보다 많이 발전했어요.
유제설 16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치과 모녀 살인사건과 얼마 전 있었던 의사 부인 살인사건을 비교해볼 수도 있어요. 치과 모녀 살인사건은 용의자가 무죄 선고를 받고 미제 사건으로 남은 반면, 의사 부인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죠. 닮은꼴로 관심을 모았던 두 사건의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 데에는 과학수사의 발전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충분한 증거 수집과 그것을 분석하는 능력, 과학적 증거의 종합적 판단 등 과학수사를 통해 좋은 결과로 이끌어냈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나라 과학수사 역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철저한 증거 보존과 공소시효 폐지, 미제 사건 해결을 위한 열쇠
LADY 오랜 기간 범죄수사 분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많은 범죄 사건을 접하셨을 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지요. 두 분이 생각하는 ‘내 인생의 사건’은 무엇인가요?
표창원 저는 일선 형사 생활이 길지 않았어요. 2년 남짓이었는데 그때 겪었던 사건들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어요. 하나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이에요. 당시 초임이었는데 사건을 지켜보며 무척 화가 났어요.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 경찰 교육을 받고 현장에 배치됐는데, 야산에 숨어 있다 여자들을 공격하는 그런 저급한 범죄자 하나 잡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많이 괴로웠던 사건이에요. 두 번째는 1991년 부천대학교에서 발생했던 후기 대학 입시 시험지 도난 사건이에요. 없어진 시험지 한 뭉치 때문에 전국의 대학 입시가 무기한 연기됐죠. 결국 용의자 중 한 명은 자살을 했고 나머지 한 명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미제 사건으로 남았어요. 당시 제가 전반적인 수사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로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어요. 그때 수사에 대해 더 배워야겠다는 열망을 품게 됐고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LADY 많은 범죄 전문가들이 ‘완전범죄는 없다’라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이 많습니다. 미제 사건이 남게 되는 원인은 뭐라고 보시나요?
유제설 미제 사건을 지켜보면 어떤 하나의 요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허술하게 범행을 저지른 사건도 수사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여러 가지 요인이 결국 사건을 미제로 만드는 쪽으로 종합되는 현상을 볼 수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현장의 훼손을 그 출발 지점으로 꼽을 수 있어요. 부득이하게 수반된 현장 훼손이 과학수사 요원들에게 제대로 인지되지 않아 수사 방향이 틀어지고 미제로 흐를 수 있죠. 그 이후에도 아주 작은 요인에 의해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요. 미제 사건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어느 한 부분에 매스를 대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수사 절차와 인식, 시스템에 관한 부분을 전반적으로 발전시켜야 해요.
표창원 저는 미제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공소시효 제도라고 봐요. 당시에는 없었던 기술이나 장비가 미래에 개발될 수 있거든요. 현장에서 증거가 훼손됐거나 발견이 미비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보존만 된다면 언젠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 범인이 죽고 난 후에도 그 무덤을 파헤쳐 사건을 해결한 사례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공소시효라는 제도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사건’이라는 인식이 수사 초반부터 은연중에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요. 결국 초기에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고 잊히게 되는 거죠. 언젠가는 해결하겠는 생각이 있다면 증거를 보존하는 시설을 짓겠죠.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그럴 만한 시설도 예산도 없어요. 신이 아닌 이상 완전범죄는 없습니다.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들만 제대로 보존된다면 언젠가 해결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어요. 화성 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범인이 먹다 버린 빵, 현장에서 발견된 우유갑, 담배꽁초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금의 과학수사 기술이라면 해결할 수 있어요. 국민 투표를 실시해서라도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LADY 국가의 DNA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사생활과 인권 보호 측면에서 상충되는 면이 있잖아요.
대한민국은 안전하다? 위험한 발상, 범죄 불감증 벗어나야
LADY 우리나라의 범죄사건 해결률이 90%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이러한 통계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표창원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90%에 육박하는 범죄 해결률은 지구상의 어떤 국가도 가능하지 않아요.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도 65%를 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경찰에서는 사건 발생과 검거율을 비교해 점수를 매기고 성과를 측정합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은 접수하지 않거나 인지하지 않으려는 인식이 있어요. 가벼운 절도나 폭행사건을 인지하는 것이 아무래도 해결률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 1999년에 경찰청장이 경찰 범죄통계 원년을 선언한 적이 있어요. 성과 위주에서 벗어나 신고되는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수사하자고 선언한 거죠. 그 결과 범죄사건 검거율이 뚝 떨어졌어요. 언론에서 가만 두지 않았죠. 범죄 검거율 하락에 대한 집중 공격이 시작됐고 결국 원상태가 됐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불안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입에 올리기 껄끄러운 사안이고요. 이런 분위기다 보니 어느 누구도 “사실은 발생한 범죄의 반 이상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결국 그 부메랑을 경찰이 맞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범죄 해결률을 자랑하는데 뭐 하러 장비와 시스템에 투자하느냐는 거죠. 결국 수사 발전의 저해를 불러오고 있고요. 불편한 진실이자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어요.
유제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밤중에 여자 혼자 다녀도 안전하다?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최근 화제가 된 사건들을 보세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흉악범죄는 예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어디서 어떤 범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최대한 알리고 예방과 대책을 세워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여지를 줄여야 하는데, 이제까지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 불감증과 함께 너무 소극인 태도를 갖고 있어요. 정말로 정의를 원한다면, 범죄로 인해 희생된 피해자들을 위한다면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해요.
LADY 오랜 시간 과학수사 분야에서 사건을 접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은 무엇인가요?
표창원 정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 앞에서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자는 것이 저의 수사 철학이에요. 사건을 해결하고픈 열망이 크다 보면 무의식중에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그렇게 믿고 싶어져요.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거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재판의 오류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범인으로 지목하더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측면에 다른 범인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수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견제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정직할 수 있는 용기가 범죄 수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제설 55가구의 돈을 빼돌린 사기단을 검거한 적이 있어요. 피해자들에게 돈을 돌려주는 방법은 사기단이 그 돈을 써버리기 전에 빨리 잡는 것이었죠. 잡고 보니 이미 도박장에서 돈을 다 써버린 후였어요. 누군가의 마지막 남은 전 재산, 평생을 일해 모은 전세 보증금이 날아가버린 거예요. 사건을 해결하고도 무척이나 괴롭더군요. 피해자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게 없었거든요. 승진과 표창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과학이 인간적이지 않으면 괴물이 되겠죠. 그 무엇보다 피해자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수사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LADY 두 분께서 앞으로 바라는 점이나 계획은 무엇입니까?
유제설 그동안 과학수사를 연구하며 외로운 공부를 해왔는데 표 교수님을 만나 과학수사는 팀워크라는 걸 실감했어요. 풍부한 경험과 통찰력을 가지고 현장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과학수사 요원들을 조연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저는 조연 중에 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사건 해결을 위해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서로의 활동 영역을 넓혀 이상적인 수사연구팀을 꾸려보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표창원 필요하다면 경찰 수사 외적인 부분에서도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민간수사팀을 꾸려보고 싶어요. 각 분야의 범죄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도 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 전문 그룹 말이죠. 저희 둘은 이미 진행 중이에요. 아직 시작 단계지만 과학수사의 민간 영역이 넓어지면 그만큼 더 많은 피해자들이 과학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중립성과 독립성을 인정받고, 정말 필요할 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수사로 우리 사회 어두운 부분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꿈입니다. 사건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어요. 그것이 나와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범죄사건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꾸준한 관심을 가져주시길 당부드립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장소 협찬 / 서울문화재단 ‘책多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