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댓글 공유하기
딸이 엄마에게 물었다. “앞으로 살날이 두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뭘 하고 싶을 것 같아요?”라고. 그러자 엄마가 답했다. “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야지. 네 아빠, 집에서 담근 김치만 드시잖니.” 스티브 잡스라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들었고, 스피노자라면 사과나무를 심었을 그 시간…. 생의 마지막 순간,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건강할 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혹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센터장 허대석(56) 교수가 들려준 보편적인 임종의 순간은 뜻밖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두 손 꼭 잡고, 이 세상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물들이며 눈을 감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대신 기계와의 사투를 벌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의료계의 해묵은 고민 ‘말기 암 환자 치료 중단’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30년을 보내온 저명한 의학자는 죽음 앞에 직면한 의학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첨단 의학 기술이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며 인간의 삶을 연장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는 불치병이었지만 지금은 간단한 수술로 완치될 수 있는 질병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의료 기술이 있다 해도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대석 교수는 평생 치러온 암과의 싸움에서 죽음의 순리를 깨달았다. 허 교수의 전공 분야는 종양내과. 악성 종양 등 암의 진단과 치료를 다루는 진료과다. 보통 위암은 소화기내과, 자궁암은 산부인과 등으로 각 진료 분야가 정해져 있지만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은 후에도 병세가 악화되거나 전이가 진행되면 종양내과로 옮겨진다. 주로 병세가 악화된 환자들은 만나면서 허 교수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 매진해왔다. 실제 악성 림프종 치료 성과를 높인 그의 연구와 치료 기술은 국내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의료계의 노력으로 다양한 항암제가 개발되고 암 환자의 생존율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든 환자가 완치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암의 진행을 세 과정으로 나눕니다. 100% 완치가 가능한 초기 암, 항암제를 사용하면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치료와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진행기 암, 그리고 항암제를 사용해도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치료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는 말기 암으로 볼 수 있죠. 보통 말기 암으로 진행되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진단을 내리거든요. 그러면 대부분의 보호자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라고 말하죠. 치료 중단을 권하면 대뜸 화부터 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에요. 여기서 의사들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가 최선이냐’ 하는 거예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자식 된, 배우자 된 혹은 부모 된, 또 의사 된 도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고 했다. 환자 가족들은 의사에게 새로운 의학 기술을 들이밀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라”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반대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보호자가 치료 중단을 결정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정작 중요한 당사자의 의사나 결정은 사실상 배제된 채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한다.

허 교수는 1년간 항암치료를 받아오던 고등학생에게 말기 암 판정을 한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을 동원했지만 암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고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을 가중시키지 말자고 하니 부모와 당사자도 어렵사리 사실을 받아들였고,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고 임종을 준비했다. 그렇게 학생이 떠나고 얼마가 지난 후에 그 학생이 다녔던 학교의 교장이 서울대학교 총장실에 투서를 넣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길이 창창한 어린 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 새로운 방법을 찾아볼 생각은 안 하고 ‘치료를 포기하고 죽게 만들었다’라는 내용이었다.

“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을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의학이 발달했으니 찾아보면 살릴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기적을 믿는 거죠. 하지만 가끔 ‘말기 암 완치의 기적’이라는 것도 진행기의 암이 완치됐다는 의미지 살날이 두 세달 정도 남은 말기 암 환자의 경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초기에는 완치를 목표로, 진행기에는 완치와 생명 연장을 목표로 치료하지만 말기 암 환자를 위한 시술은 달라야 합니다.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데, 여전히 치료에만 매달리는 거죠. 그것은 환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일인데, 사회적 가치관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허 교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 1998년부터 시작한 일이니, 14년 동안 환자의 의미 있는 죽음에 대해 고민해온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25만 명이 유명을 달리한다. 이 중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은 7만 명이다. 나머지 18만 명은 만성질환으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 18만 명의 환자를 어디까지 치료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의학계가 지닌 오래된 고민이다.

“효과가 있다면 그 고통과 부작용을 감수하면서라도 계속 치료를 해야죠. 그런데 보통 말기 암 진단을 내리는 시점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평균 11주로 봐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방법을 동원해 지속적으로 치료를 하게 되면 대부분 부작용으로 인해 응급 상황이 발생하고 중환자실로 보내져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 등에 의존해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실제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에 비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를 더 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죽음은 기술적 문제 아닌, 사회문화적 문제로 봐야
어쩌면 단순하고 명확한 문제다. 환자 스스로 자신에게 남겨진 11주를 어떻게 보낼지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환자 본인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통념상 말기 암 환자 본인에게 시한부를 선언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대부분의 보호자는 투병 의지를 꺾는다고 환자에게 직접 통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당사자가 아닌 보호자에게 말기 암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이를 전달받은 가족들은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전하지 않아요. 열 명 중 여섯 명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언을 할 기회도, 자신의 임종 후에 대한 의사도 말할 기회가 없어요. ‘버킷 리스트’라고 해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텐데 그것을 못하게 되는 거죠.”

당사자가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임종 순간에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사람이 죽을 때, 심장이 멎고 숨을 쉬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를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를 통해 심장을 뛰게 하고 숨을 쉴 수 있게 할 수도 있다. 만약 회생 가능성이 있다면 이 같은 의술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말기 암이나 만성질환에 시달린 사람들은 임종의 순간 이런 생명 유지 장치를 동원해도 오랜 기간 살아 있을 수 없다. 결국 병실 침대에 누워 기계에 의존해,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시간을 보내다 임종을 맞게 된다. 이처럼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기간만 늘리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인기 있는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애정남’이라는 코너가 있죠. 제가 보기엔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보다 지금의 시대상을 담은 듯해요. 사회적 통념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사상은 2천 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와, 6백년을 이어온 성리학이죠. 그런데 윤리적으로 봤을 때 여자친구를 어디까지 바래다줘야 하냐는 문제를 아리스토텔레스와 성리학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현대사회에 걸맞은 사회적 가치관을 성립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거든요. 의학계도 마찬가지예요. 1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지금의 의사들이 경험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명확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방법과 서로 다른 과정들이 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의사로서도 애매할 수밖에 없는 거죠.”

허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에는 죽음에 관여하는 수많은 사회적 통념과 제도가 있다고 말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인식과 함께 생명 유지 장치의 역할에 대한 개념도 다른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연로했고 병이 깊었지만 ‘병원에서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나’ 싶어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것은 우리 사회가 용납을 한다. 하지만 일단 병원에 들어오면 인공호흡기로 연명할 수가 있는데, 이때 연명치료를 시도했다가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받고 치료를 중단하면 가족이든, 의사든 ‘살인자’로 몰린다는 것이 허 교수의 설명이다. 미국은 아예 법으로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의 선을 명확히 명시하고 있다. 또 일본과 대만 역시 새로운 의학계 규범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존엄사와 안락사, 자연사의 경계가 불분명한 채 혼란에 빠져 있다고 한다.

“보험도 죽음의 방식을 애매하게 하는 하나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마지막까지 항암제와 인공호흡기를 쓰는 것은 보험 적용이 되지만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 진통제를 투약받으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어요.”

죽음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국내 병원 시스템 중에 가장 발달돼 있는 것이 바로 영안실이라는 점이다. 반대로 임종실을 갖춘 병원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죽기 전의 절차보다 죽은 후의 절차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 “이제 죽음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임종실이 없으니 환자들은 병실에서 임종을 맞게 됩니다. 환자에게 응급 상황이 닥치면 담당 의사가 달려오고 그 뒤의 과정은 끔찍합니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심장제세동기를 사용하며 사투를 벌이죠. 그게 몇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단 말입니다. 말기 암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법적으로는 모든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무조건 하게 돼 있습니다. 옆에 다른 환자들이 있는 가운데 그런 과정이 모두 병실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면 환자나 보호자들이 웅성대며 복도를 서성입니다. 그렇지만 지난 30년간 그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환자나 보호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당연히 행해져야 할 최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허 교수는 더 이상 죽음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임종은 기계적으로 얼마나 더 살아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임종은 병실에서 기계와의 사투 끝에 맞이하는 반면 죽음은 영안실에서 수십 개의 화환과 조문객, 그리고 리무진으로 화려하게 치장되는 지금의 현실이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통념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허 교수의 말이다.

이제는 ‘임종의 질’ 논의해야 할 때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치료를 중단하자고 통보하는 의사의 말에 “무책임하다”라거나 “포기하는 것이냐”라고 반문하는 환자나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 교수는 말기 암 환자들이 겪는 치료시술이 주는 부작용의 고통과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오랜 투병 생활로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항암치료를 지속했을 때, 환자 본인이 느끼게 되는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한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환자, 의사, 가족 모두 암울한 시간을 보낸다. 더욱이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가 남지 않아야 할 가족은 환자의 사망 후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떠안는다고 설명한다.

“제도적 보호 장치가 없는 의사로서는 보호자와 계속 싸울 수 없거든요. 하고 싶다고 하면 시도를 하는 거예요.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뿐이지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죠. 하지만 새로운 항암제를 사용하면 부작용이 더 크고 대부분 중환자실에 오게 되죠. 그러다가 덜컥, 사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대부분 후회를 해요. 생의 마지막을 항암제의 부작용에 시달리느라 가족과 소중한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과정을 겪게 됩니다.”

허 교수는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에 대한 고통스러운 치료시술과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는 생의 마지막 시간이 주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환자가 임종하는 과정은 당사자에게도 힘든 순간이지만 남은 가족에게도 큰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대화도 하고, 붙잡고 울기도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가족도 쉽게 회복을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상처가 되는 거예요.”

허 교수는 소아암 병동에 있었던 백혈병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 살 된 소년은 1년간 항암치료와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소년에게 남겨진 시간은 한 달가량. 여러 날 고민하던 아이의 부모는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아이가 세상에 왔다 갔다는 흔적이라는 게 겨우 주사 맞기 싫다고 우는 모습이나 심폐소생술을 받다 죽어가는 모습밖에 남지 않을 것 같다”라며 “병원에 남아 끝까지 치료를 받는 대신 평소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던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라는 것이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남은 시간을 가족과, 그토록 원하던 강아지와 함께 보내고 강아지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품위 있는 죽음이나 바람직한 죽음에 대해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쉽게 정의할 수가 없겠죠.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시간을 갖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적절한 표현이 바로 ‘한을 품고 죽는다’라는 건데, 영적으로 한을 품고 죽는 것은 좋은 죽음이 아니거든요. 또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계적으로 육신에 고통을 주는 것 또한 편안한 임종은 아니죠. 이럴 때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해 환자가 고통을 덜 느끼면서 임종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서양에서는 이를 ‘완화 의학’이라고 부르며 이에 대해 전문의 제도까지 갖췄다고 한다. 호스피스 제도가 정신적인 측면을 보살핀다고 하면, 완화 의학은 죽음에 이르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항암제는 많이 사용하지만 마약성 진통제의 사용량은 서양의 10%도 되지 않아요. 마지막 남은 기간을 알게 되면 그 시간이 중요하게 생각되겠죠. 자신에게 남은 한정된 시간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것이 임종을 앞둔 환자를 위해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번은 20대 후반의 여성 환자가 허 교수를 찾아왔다. 이미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꼭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녀의 꿈은 교사였고 투병 전 임용시험에 합격해 대기 중인 상태였는데, 최근 근무지를 발령받았다고 했다.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2주간 연수를 다녀와야 하는데, 가능하겠냐는 것이 그녀의 질문이었다. 연수를 다녀와서 교단에 설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평생의 꿈을 이루고 죽고 싶다고 했단다. 다행히 그녀는 연수를 다녀왔고 꿈에 그리던 교단에 며칠 동안 설 수 있었다고 했다.

“임종을 앞두고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라는 등의 거창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혼한 아내가 보고 싶다거나 연락이 끊긴 자식을 만나고 싶다고 하거든요. 가족의 입장에서는 중환자실에 있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입장도 생각해줘야죠.”

유방암으로 임종을 앞둔 40대 주부의 소원도 무척이나 평범했다고. “집에 가고 싶다”라는 그녀의 말에 가족은 만류했다. 그러자 그녀는 “잠시라도 좋으니 집에 다녀오게 해달라”라며 끝까지 부탁했다는 것. 이에 가족이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이냐”라고 물었더니 “예전처럼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싶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제가 만나는 환자 중에는 고등학생도 많아요. 그 아이들은 저를 볼 때마다 ‘언제 학교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어요. 비록 몸은 아프지만 단지 질병을 가진 존재가 아닌, 사회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존재감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허 교수는 누구나 막상 죽음과 마주하면 남겨진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남겨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어떤 죽음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볼 문제가 아닐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병을 고칠 수 없어 11주의 시간만 남는다면?”이라는 질문에 “나 지금 죽으면 안 돼. 우리 아가 어떡하라고”라는 답변부터 “영화 ‘편지’처럼 남편을 위해 영상 편지를 남기고 싶다” 혹은 “엄마와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지금의 이성친구가 나의 죽음을 알 수 없도록 헤어지고 싶다”라는 등 무척이나 다양한 답변들이 도착했다. 물론 그중에는 “끝까지 치료하겠다”라는 답변을 보내온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죽음의 순간에 하고 싶은 일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글 / 진혜린(객원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경향신문 포토뱅크

화제의 추천 정보

    Ladies' Exclusive

    Ladies' Exclusive
    TOP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