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켜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가족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오른쪽 귀로는 아예 듣지 못하고, 왼쪽 귀는 보청기를 끼면 시끄러운 곳과 조용한 곳을 구별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러한 장애를 안고도 김수림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까지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현재 글로벌 금융업계에서 맹활약 중이다. 비록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 던져졌지만, 그녀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곧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마음의 상처들

청각장애 극복, 4개 국어 정복…김수림의 끝없는 도전
김수림(40)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네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먼 시골집에 버려졌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밭에서 가지를 훔쳐 먹으며 허기를 채웠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비쩍 말라비틀어진 몸에 제대로 목욕 한 번 하지 못해 피부는 온통 부스럼으로 가득 차고 머리에는 이가 우글거렸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참담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배고픔과 외로움에 지쳐갈 무렵, 그녀는 시골에 버려진 지 9개월 만에 자신을 찾으러 온 엄마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엄마를 만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어요.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데다가 영양실조까지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죠. 그런데 그 후유증 때문이었는지, 제 운명이 그렇게 정해졌던 건지, 그때부터 서서히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여섯 살 때 아예 청력을 잃었어요.”
귀가 들리지 않자 그녀는 상대방의 입 모양을 읽으며 대화하는 연습을 했다. 상대를 빤히 바라보면서 상황으로 추측해 말을 이어갔고, 이따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뚱딴지같은 대답을 늘어놓게 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어려움이 속출했다. 일반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던 그녀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선생님들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고 그 결과 성적은 늘 바닥을 맴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트레스에 폭식을 일삼았더니 몸무게가 급격히 늘어 비만에까지 이르렀고,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따돌리기 일쑤였다. 설상가상 그 와중에 엄마는 돈을 벌어오겠다면서 일본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낯선 이국땅에서 이룬 기적
그로부터 4년 뒤 김수림은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장애인 판정을 받고도 딸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던 엄마는 그녀를 일반 학교에 입학시키고, 다른 아이들과 차별적인 대우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학교에 당부했다. 그러나 귀가 들리지 않고, 뚱뚱하고,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늘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돼야만 했다.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이 일본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대 기죽지 않았다. 친구들이 일본어로 ‘바보’라고 놀리면 무슨 말인지 몰라도 입술을 똑같이 ‘바보’라고 만들어 똑같은 말로 답해주었다. 그러면서 일본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었고, 친구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독학만으로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건, 어떻게든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의 입 모양을 보며 말을 따라 하고 되풀이했던 그녀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의 기본도 모르고, 사전조차 없던 터라 그런 식으로 맨땅에 헤딩하며 일본어를 익혔어요. 같은 반 친구 중 누군가 밥 먹을 시간에 맞춰 배를 만지며 무슨 말을 한다면 그건 분명 ‘배고프다’라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고, 저도 그 다음부터는 배가 고플 때 그 단어를 그대로 내뱉었죠. 제 말이 통하면 그때부터는 자유자재로 ‘배고프다’라는 말을 넣어 문장을 만들 수 있었고요.”
말이 통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일반 학생들 틈에서 수업을 원만하게 따라갈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이 꼴등이었다. 최하위권 성적으로 겨우 입학한 고등학교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들만 모인 문제 학교였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오히려 그녀에게 더 큰 자극이 됐고, 더 열심히 학업에 매달렸다. 수업에서 놓친 부분들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로 선생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면서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고,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은 노트에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적고, 도저히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그림처럼 그 이미지를 그대로 머리에 담았다. 그 결과 만년 꼴등에서 3등으로 성적을 수직 상승시킬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와서 적응하느라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시간을 통해서 부딪치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힘을 키울 수 있었죠.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도 막상 부딪쳐보면 그 나름의 길이 있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해내지 못할 일은 절대 없다는 인생의 큰 가르침도 얻게 됐고요.”

1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아프고 힘들어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 일본에서 생활한 지 6개월째 되던 어느 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본어를 빨리 배우게 했다. 3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혼자 떠난 영국. ‘부딪쳐보자, 즐기자, 하면 된다’라는 신념으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4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해준 배낭여행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김수림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취업과 대학교 진학을 제쳐두고 일단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취직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 차별받지 않고 원하는 삶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나에게 놀랄 만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제게 흥미를 가져다줄 만한 것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죠.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영어였어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3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무기가 되는 거잖아요. 일본어를 정복했으니 영어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들었고요.”
더 넓은 세상에서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그녀는 어머니를 설득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잠잘 시간도 아껴가면서 오직 공부만 했다. 그러나 난생처음 접하는 언어가 처음부터 술술 입에 붙을 리 없었다. 어학원을 다니면서 단체 수업과 개인 레슨을 병행했다. 특히 개인 레슨을 해주었던 백발의 할머니 선생님은 마치 헬렌 켈러를 가르친 설리번 선생님처럼 열정적으로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입술과 혀의 움직임, 목의 진동, 코에서 내뿜는 숨의 느낌, 입에서 숨을 토하는 공기의 세기, 이의 맞물림 등을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확인하게 하면서 그녀가 똑같은 느낌으로 입, 혀, 목, 이를 움직여 26개 알파벳 소리를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오직 영어 공부만 했어요. 정말 원 없이 공부에 빠져든 시간이었죠. 휴일에도 서재에 박혀 공부했고, 잠시 밖에 나오기라도 하면 누구든 붙잡고 영어로 말을 걸며 대화를 나눴어요. 그 결과 3개월 뒤 초급 레벨 시험을 간단하게 통과했고, 6개월 만에 영국 대학교에 들어갈 수준으로까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어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그녀는 영어 실력만으로도 입학이 가능한 한 전문대학에 들어가 학업에정진했다. 그러나 취업을 준비하면서 또 한 번 난관에 부딪쳤다. 영어가 무기가 될 수 있는 몇 군데를 찾아서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의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모두 서류 심사에서 떨어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경쟁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인의 조언으로 장애인 수첩을 발급받아 장애인 취업 포럼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제지회사인 오지제지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고등학교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취직이었죠. 영국에서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영어 공부를 열정적으로 했을 때도 제가 제몫을 해내는 사회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어요. 하지만 하면 된다고 믿고 계속 밀고 나가니까 결국에는 해낼 수 있었죠.”
3년간 30개국 방랑기, 여행에서 얻은 것들
취업을 하고부터 김수림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사내 치어리더부에서 활동하면서부터는 음주가무 문화에 푹 빠져서 그야말로 불타는 청춘을 보냈다. 급기야 오랜 연인에게 이별 선언까지 했다. 그렇게 4년 동안은 마냥 놀기에 바빴다. 그러나 매일 놀기만 하는 생활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을 채워주는 것에 불과할 뿐, 근원적인 만족감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향락적인 생활에 서서히 질려갔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일반인들과 똑같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지내온 현실이 답답해졌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20대 후반인데다가 여자 동료들은 대부분 결혼을 한 상황이었고요. 저도 결혼을 통해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나 봐요. 그러다가 옛 남자친구가 생각났어요. 저를 가장 잘 알고, 가장 많이 사랑해주었던 그 남자라면 지금의 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새로운 연인이 있었고,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버린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마음의 톱니바퀴가 어긋나버렸기 때문일까.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밤에는 느닷없는 불안에 휩싸여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아침에는 일어나지 못했고, 억지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면서 회사에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10개월 동안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화장실에 갈 때를 빼고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다. 급기야 뇌가 완전히 정지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커다란 배낭과 운동화, 침낭 등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막연한 생각으로 여행지를 찾던 중 호주 관광 안내 홈페이지를 발견하고 첫 숙박지만 정한 채 그 길로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며칠 고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어머니에게는 ‘여행 다녀오겠다’라는 한마디의 쪽지만 남겼다. 이렇게 무작정 시작됐던 여행길은 3년에 걸친 긴 방랑으로 이어졌다. 호주, 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멕시코, 캐나다 등 무려 30개국을 돌아다녔는데, 여행을 통해 그동안 겪은 좁은 세상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세상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행복해지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청각장애 극복, 4개 국어 정복…김수림의 끝없는 도전
그녀는 어학원에 다니면서 개인 교습까지 받아가며 스페인어를 완전 정복했다. 힘겹게 배웠던 일본어, 영어와 달리 스페인어는 아주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가 머릿속에 자리 잡힌 덕이 컸다. 발음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의 발음을 이해하고 똑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스페인어 발음은 대개 한국어, 일본어, 영어 중 어느 것 하나와는 비슷하게 마련이었다. 그 결과 간단한 자격시험까지 통과하면서 4개 국어를 통달하는 기쁨을 맛봤다.
“저는 하나의 언어를 습득할 때마다 연결고리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을 느껴요. 일본어로 ‘생존’이 가능해졌고, 영어는 사회에서 ‘자립’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스페인어는 인생의 ‘즐거움’을 선물해주었으니까요.”
일본에서도, 영국에서도, 심지어 태어난 한국에서조차 그녀는 이방인이라는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여행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준 값진 기회였다.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는 데 급급했던 주변인에서 이제는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찾게 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무대 위를 달리다
3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김수림은 예전보다 한층 더 단단해져 있었다. 4개 국어로 유창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오랜 여행을 통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았다는 점은 더 이상 그녀를 청각장애를 지닌 이방인으로 한정지을 수 없게 했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그녀는 다시 취업을 준비했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세계적인 증권회사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당시 골드만삭스는 대학을 졸업한 취업 준비생 1만 명이 입사를 지원할 경우 다섯 명만이 합격하고 그마저도 입사 후 3개월이 지나면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 1년이 지나면 그 한 명이 남아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알려질 정도로 업무 강도가 센 회사였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4년 동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사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도 낳았다. 특히 남편은 그녀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상처투성이 마음이 되기도 해요.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라면 혼자의 힘으로 눈앞의 어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혼자의 힘으로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기는 쉽지 않죠. 그럴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배려가 마음을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돼요. 저 역시 그랬거든요. 때때로 안정된 삶 속에서 긴장감을 잃고 모든 게 따분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남편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어요.”
김수림은 골드만삭스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동종업계의 크레디트 스위스에서 5년째 근무하며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중이다.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무척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제 이야기를 보고 듣는 누구든지 저마다의 멋진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리라 믿어요. 장애가 있고, 공부도 못하고, 연줄 하나 없던 저도 이렇게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잖아요. 다만 스스로 만든 한계 속에 갇혀서 그 가능성을 꽃피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한 번 되돌아보세요. 한계는 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글 / 윤현진(프리랜서) ■사진 제공 / 웅진 지식하우스 ■참고 서적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김수림, 웅진 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