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평생을 바치겠노라 서원한 천주교의 수녀와 하나님께 평생을 어떻게 바칠 것인가 고민하던 열혈 개신교 신학생 간의 사랑은 시대의 불문과 금기를 파괴하는 일대 사건 중 사건이었다. 양쪽 교단은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연인의 가여운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상 모두가 그들에게 등 돌렸을 때 두 사람은 목사와 수녀라는 이름표를 떼고는 떨리는 두 무릎을 맞대고 꿇어앉아 신께 기도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다 더 참사랑을 하기 위해 동행하길 원하노라고.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와 수녀 출신 김연수 시인 부부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잔인한 달이라 불리던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어찌나 볕이 좋고 따뜻하던지 아직도 그 온기가 고스란히 기억되는 그런 오후였다. 우연히 소개받은 앳된 수녀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돌아서기 전까지 최일도는 그저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은 열혈 신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알았으랴. 그가 뒤돌아서는 순간 멈출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될 거라는 것을….
“안녕하세요. 저는 최일도라고….”
뒤돌아서 보니 환하게 웃는 뽀얗디뽀얀 얼굴의 한 수녀가 눈에 들어왔다. 맑은 얼굴이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그는 채 인사말을 맺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갓 피어난 하얀 프리지아꽃이 연상됐다. 기다랗고 가녀린 꽃 한 송이가 그의 앞에 서서 웃고 있는 것이다. 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번민하는 신학생에 지나지 않는 그였지만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 웃고 있는 한 송이 꽃 같은 여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운명을 알아본 죄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람인 걸 알았죠’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다. 김연수 사모(61)를 처음 본 최일도 목사(56)의 당시 심정을 표현하라면 바로 이 노랫말과 같지 않을까.
“예전에 발간된 책에도 자세히 썼지만… 아내를 처음 본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아! 이 여인은 내 운명이구나’ 하고 말이에요. 첫눈에 반했다느니, 운명이라느니 이런 말들은 그저 사람들이 예쁘게 표현한 말에 불과한 것 같지만 아니에요. 첫눈에 반한다는 것, 운명을 직감한다는 것은 분명 있습니다. 보세요. 그러니까 개신교 신학생으로 천주교 수녀를 만났는데도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웃음)”
어찌 보면 당시의 최일도 목사는 괴짜에 가까운 기독교인이었다. 개신교에 적을 두고 있는 신학생이자 전도사임에도 허구한 날 천주교 성직자들과 교류하며 전국의 수도공동체들을 떠도는가 하면 가톨릭 성인과 성녀들의 전기와 생애에 몰두하면서 지냈기 때문이다. 스스로 독신 수도자의 삶을 살라는 신의 계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정도다. 나름 종교 분쟁 없이 평화롭다는 나라에 살고 있다지만 당시만 해도 종교 간의 교류는 시국 사건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한 번도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었어요. 좋게 말하면 순박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윤리적으로 엄격한) 바리새인적인 신앙과 교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유치했죠. 일례로 당시 저는 결혼은 목회자의 길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목회자가 되면 결혼을 포기할 것이고 반대로 결혼을 하면 목회자의 길을 포기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을 정도거든요. 딴에는 출가자의 구도 행각이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문제아의 고뇌와 방황쯤으로 보셨던 것 같아요(웃음).”
당시에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속을 좀 썩였을 것 같지만 지금에 와서 그간 최일도 목사의 행적을 되짚어본다면 그마저도 진정한 목회자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사로까지 자리 잡은 ‘밥퍼’라는 약어로 대변되는 다일공동체의 빈민 구제사업을 보고 있자면 말이다.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의 장점들이 성공적으로 융합된 다일공동체의 열린 성격은 종교를 넘어 사회 안팎으로 롤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최 목사와 김연수 수녀의 만남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두 사람이 남자로 여자로 만나 사랑했으되 그 사랑은 그들이 믿는 신이 계획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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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수녀입니까!
아네스 로즈 수녀라 불리던 김연수를 만난 후부터 최일도는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어쩜 그렇게 어여쁠 수 있는지, 어쩜 그렇게 맑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떠올리다 보면 그는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장미향을 맡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최일도만이 맡을 수 있는 아네스 로즈 수녀의 향기였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와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궁리뿐이었다.
“아네스 로즈 수녀에 대한 상념들로 복잡한 머릿속을 식힐까 싶어 서점에 나갔다가 우연히 시문학지에서 김연수 시인의 「다래헌 記」라는 시를 보게 됐어요. 맑고 깨끗한 시인의 마음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죠. 시가 정말 좋아서… 당시 국어 교사였던 아내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나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이도 꽤 근사할 것 같았거든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제외한 우리 두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관계가 당시의 제겐 참 절실했어요. 왜 아니겠어요. 상대는 하나님의 아내인 수녀라고요(웃음).”
최일도는 시를 좋아하느냐는 말과 함께 김연수 시인의 「다래헌 記」를 아네스 로즈 수녀 앞에 의기양양하게 내민다. ‘마음에 무척 드는 시라 수녀님께도 전해주고 싶었다’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를 본 아네스 로즈 수녀는 이렇다, 저렇다 시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저 시를 쓴 시인이 아는 사람인가 간단히 묻고는 말이다.
“나중에 한 학생이 아네스 로즈 수녀에게 ‘김연수 수녀님!’ 하고 부르는 걸 듣고서야 제가 내민 시를 보고 왜 그저 웃기만 했는지 알 수 있었죠. 참 신기하지 않나요? 그 시를 처음 봤을 때도, 그 시를 보여주었을 때도 아내가 시를 쓰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저 국어 교사니까 시에 관심이 좀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는데 말이에요.”
목사의 길과 신부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던 열혈 신학생에게 김연수는 너무나 뜨거운 복병이었다. 평생 옆에서 바라만 볼 수 있어도 원이 없겠단 생각에 사제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연수라는 여인을 향한 마음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는 성난 파도와도 같았다. 3년을 끝없이 끈질기게 구애했다. 모두들 그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손가락질했지만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최일도에게는 김연수만 보이는 탓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그의 마음을 수녀의 신분을 가진 김연수는 받아줄 수 없었다. 이미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몸이 아니던가. 달래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고, 냉정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다 꼭꼭 숨어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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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최일도는 수도자의 길을 가려는 자신에게 왜 김연수 수녀를 만나게 했는지, 그녀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잊지 못하는지, 또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여인이 왜 하필이면 수녀인지 신께 묻고 또 묻다 종국에는 삶을 깨끗이 정리하겠다는 극한의 결심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간 곳이 목포 인근의 한 섬. 유서로 비쳐질 수 있는 편지 한 통을 김연수 수녀에게 보내고 간 곳이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을까. 섬 주민과 날씨 때문에 망망대해에 몸을 던지고자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무사히 서울로 돌아오게 됐고, 아네스 로즈라는 이름의 수녀 또한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김연수라는 자연인이 되어 그의 곁으로 간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운명처럼 만나 드라마틱한 사랑을 한 두 사람은 예쁜 동화 속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결혼으로 행복한 맺음을 한다. 비록 화장실도, 욕실도 없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마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방이 어찌나 작았던지 외짝 장과 작은 냉장고 하나 들여놓으니 겨우 두 사람 누울 공간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고작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이 단칸 셋방으로 데려오려고 수녀원에서 잘 지내던 아내를 흔들었단 말인가, 하고 속상해질 참이면 김연수는 최일도의 마음을 다 읽은 것처럼 “당신은 목회를 할 사람이다. 이렇게도 살아봐야 여러 계층의 어려움을 실제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며 다독이곤 했다.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서 누울 자리가 있어 다행이라는 감사 기도를 드리자고 했을 정도라니 가톨릭의 수녀든, 개신교의 사모든 그 어떤 자리에 있든지 손색이 없을 마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알콩달콩 재미난 신혼 시절이기에 앞서서 수녀에서 한 남자의 아내로, 자유분방하게 살던 신학생에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다.
“수녀원이란 온실 속에서만 살던 성직자였던 제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직장도 다니면서 살림을 하는 생활은 힘들다고 표현하기 전에 적응을 해야만 하는 낯선 삶 그 자체였어요. 우리라고 그저 아름답게만 살았겠어요? 여느 부부와 같았죠. 부부싸움도 했고 고부 갈등도 겪었어요.”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것이 낯선 것은 최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녀와 아내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었노라 털어놓았다. 하얀 프리지어꽃 같았던 아네스 로즈 수녀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던 까닭이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갈 참이면 아내 김연수가 아닌 아네스 로즈 수녀가 맞아줄 것 같은 착각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그런 기분이 심하게 드는 날이면 수녀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아내의 모습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을 어렵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최일도 목사의 어머니였다.
지금은 다일공동체에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날마다 새벽기도로 아들의 목회를 돕고 있는 최고의 협력자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히 수녀 출신의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탓에 결혼 전부터 고부의 갈등은 예견된 것이었다. 최일도라는 남자 하나만을 보고 수녀로서의 종신허원을 풀고 속세로 나온 여자였건만, 최 목사의 어머니는 결혼 자체를 결사반대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이 목회자의 사모로 적합하며 수녀 출신은 목회를 해야 하는 아들의 장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게 최 목사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어머니는 제가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길 바라셨죠. 당시만 해도 천주교는 교리적으로 이단에 가깝다는 그릇된 근본주의가 빗어낸 편견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런 입장에서는 수녀 출신의 사모는 큰 교회 목사가 될 저에게 약점으로만 보이셨겠죠. 더구나 큰 교회에서 번듯하게 목회를 하길 원했던 제가 공동체다 뭐다 빈민 활동을 하니 그마저도 가톨릭 출신의 아내 탓이라 여기시며 저와 아내를 못마땅해하셨답니다.”
당신, 여자라도 생겼나요?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와 수녀 출신 김연수 시인 부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할 때 종종 ‘10년 넘게 수녀 생활을 한 사람이 그것밖에 안 돼?’ 하며 제 속을 긁을 때가 있어요(웃음). 저희 부부만 주고받을 수 있는 얘기죠. 그래요. 수녀 출신인 제가 남 돕는 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목사님은 원래 그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목사님이 돈 계산에 밝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면 저조차 존경심을 갖기 힘들 테니까요. 하지만 그 돈 때문에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의심한 적이 있답니다(웃음).”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 부부는 화장대 서랍에 돈을 넣어두고 서로 필요할 때마다 지출 명목을 쓰고 꺼내 사용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최 목사의 지출이 한없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지출 명목도 ‘식사대’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어디에 돈을 썼는지 물으면 즉답을 피하는 남편이 의심스러웠다. 누구누구와 밥을 먹었다지만 확인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연수는 남편에게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그것밖에는 짐작이 가는 구석이 없었다.
“직장생활 하면서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 둘 키우고 거기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호된 시집살이까지 하던 때였어요. 고부 갈등이 극에 달했던 때였죠. 그런데 남편마저 밖으로만 돌며 집에 소홀한 거예요. 집에 들어와서는 한숨이나 푹푹 쉬고 있고 말이에요. 그러니 여자가 생겼다고 의심할 밖에요. 어떤 여자기에 그러냐고 막 따져 물었어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이 남자와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말이에요.”
‘식사대’라고 써놓고 가져가는 뭉텅이 돈의 수혜자를 확인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김연수 사모는 최일도 목사를 다그쳤다. 그리고 함께 길을 나섰다. 남편의 뒤를 따르며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최 목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자도 아니고, 젊지도 않았다. 한눈에도 길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부랑자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노인 여남은 명이었다. 그들은 속칭 ‘청량리 588’ 홍등가 주변의 한 설렁탕집에서 이미 식사를 끝내고 돈을 내줄 최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연수는 단박에 그들이 그간의 ‘식사대’ 수혜자임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밥, 그 두 번째 운명을 만나다
1988년 어느 초겨울 아침, 최일도는 청량리역 앞에서 그의 두 번째 운명과 만나게 된다. 예매한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쁘게 역 광장을 걷고 있는 그의 앞에서 한 노인이 쓰러진 것이다. 부축을 해드려야 하나, 그냥 지나쳐야 하나 잠깐의 갈등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기차 출발 시간은 가까워왔고 주위에 사람들은 많았다. 최일도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노인을 도울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이 개운치 않아 되돌아가봤더니 노인은 입에 거품까지 물고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냥 내버려 둬”라고 주위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간질 환자는 이내 평상시로 되돌아온다는 풍문을 들은 적이 있어 말 그대로 ‘내버려두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밤이 늦어 다시 청량리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침에 보았던 노인이 그 자리에서 쓰러진 채로 온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최일도 목사는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표현하기도 힘들 만큼의 뜨거움이었다.
“청량리역 광장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북적이기로 유명한 곳이에요. 그런데 그 노인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준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화가 치밀더라고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신학 공부를 왜 하며, 영성수련센터니 전원교회니 해외 유학이라는 것이 대관절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물음이 들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진지 드셨느냐?’라는 저의 물음에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라는 할아버지의 답은 ‘일도야, 내가 배가 고프다’,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길바닥에 눕혀놓을 셈이냐?’ 저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자 저희 아버지의 음성이었습니다.”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와 수녀 출신 김연수 시인 부부
“남편은 집에 오면 제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먹지 못했어요. 밖에 있는 어려운 분들 생각에 그 밥 한 숟가락을 넘기지 못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속도 상하고 청승맞아 보이기도 해 전재산이랄 수 있는 통장을 주었어요. 라면을 끓여주든, 밥을 해주든 원 없이 해보라고요. 그랬더니 그 돈을 가지고 나가 전기밥솥 네 개와 40인분의 숟가락, 젓가락을 사더라고요.”
그렇게 최일도 목사의 두 번째 운명인 다일공동체는 그의 첫 번째 운명인 김연수 사모의 도움으로 뜨거운 밥을 지을 수 있게 됐다. 부부는 처음 라면을 끓였던 양은 냄비 또한 지금껏 간직하고 있다. 처음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고마운 동반자
청량리 홍등가 부근의 허름한 굴다리에서 시작한 다일공동체의 오늘은 눈부시다. ‘밥퍼 운동’으로 대표되는 다일공동체의 무료급식 운동은 어느새 500만 그릇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한국을 넘어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등 다른 어려운 아시아 국가로까지 그 봉사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명실상부한 국제적 NGO 단체가 된 것이다. 또 다일천사병원, 다일영성수련원을 둔 사회복지재단법인으로 발돋움했다. 등산용 코펠에 라면을 끓이던 때를 떠올려보면 기적에 가까운 오늘이 아닐 수 없다. 수녀를 마음에 품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음을 야속해하며 죽음을 결심하던 그 치기 어린 젊은 신학생의 이 거대한 운명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보는 그의 회한은 의외로 다른 곳에 있었다.
“그 힘든 세월을 어찌 견뎌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고는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밥을 짓거나 그 일로 비난을 받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제 어미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서 남의 부모를 섬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노여워하는 어머니를 맞닥뜨리거나, 홍등가 한복판에 방치된 우리 아이들을 보며 아내가 낙심하며 슬퍼할 때였습니다. 가족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밖의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느라 정작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 미안함이 두고두고 최일도 목사의 마음에 큰 생채기로 남아 있는 듯하다. 어려운 시절부터 언제나 그의 옆을 지키며 동행해준 아내 김연수 사모는 그런 남편을 한껏 추켜세웠다.
“남편이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장이든, 재미난 취미든 사람들은 지겨워하며 쉽게 그만두기도 하건만… 24년을 한결같이 그 어려운 자리를 지켜온 남편의 모습에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언제나 하하호호 웃으며 살지는 못했지만 함께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저는 남편에게 더 바랄 게 없답니다.”
언제나 한발 먼저 앞선 모습을 보여왔던 최일도 목사는 인도와 섬김, 나눔에 전념하고자 얼마 전 정년을 11년 앞두고 다일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조기 은퇴해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당시 은퇴하면서 교회로부터 받은 퇴직금 4억원과 전세 보증금 2억원 중 퇴직금 4억원을 다시 교회에 헌금해 장학기금을 조성했으며 전세 보증금도 사후 기부를 약속해놓은 상태다. 지금껏 목회를 해오면서 교회로부터 자녀 양육비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최 목사는 나눔과 기부의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몸소 앞장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을 꼭 해내는 그의 실행력과 오랜 가톨릭 수녀원 생활을 통해 절약과 인내가 몸에 밴 김연수 사모가 아니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들이었을 것이다.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 종교를 나누지 않아도, 목회자인지 수도자인지 직분을 가르지 않아도, 남편인지 아내인지 관계를 정하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그들의 신 앞에 삶 전체를 바쳐 뜨거운 기도를 올렸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걸어온 구도의 길에 무엇이 더 부족하다 말할 수 있으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저 고마웠노라 말하는 그들에게 부족함을 탓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오직 그들이 무릎 꿇어 마지않는 신뿐일 것이다.
■글 / 강은진(프리랜서) ■사진 / 이성원 ■헤어&메이크업 / 니케인뷰티(02-514-4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