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

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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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에 살펴본 그의 블로그는 한마디로 설계가 잘된 도서관 건물 같았다. 정말 좋아하지 않고는 모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이 있었고, 그것도 거의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듯했다.

“여태껏 살면서 저를 스쳐간 사람들이 다 선의를 가지고 만난 사이잖아요. 50대 초반만 해도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중하더군요. 그래서 이걸 빨리빨리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해요. 또 하루 지나면 딴짓을 하기 때문에 소홀히 하게 될까 봐 빨리 해치우지요.”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그가 인터넷에 건축 중인 블로그의 기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었다. 문득 건축가와 의사를 빗대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간은 가장 행복할 때 건축가를 만나고, 가장 불행할 때 의사를 만난다고 했던가.

“그 이야기 아까도 들었어요. 오늘 은퇴하신 선생님이 계신데, 대학 때 그 얘기를 만드셨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김 박사가 하신 말씀 그대로요. 변호사는 뭔가 죄를 짓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서 만나고, 건축가는 행복해서 만난다고요. 그때 그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아닌 거 같은데(웃음).”

가장 행복한 순간에 만나는 사람, 건축가
인터뷰 내내 느낀 점이지만 그는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이상적인 지향점을 놓지 않는 균형 감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끝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균형과 유머 감각은 행복해지기 ‘쉬운’ 조건이다.

“건축가의 입장에서 보면요, 의사나 변호사를 찾는 사람들은 별 말 없이 잘 들어줘요. 그런데 건축가에게는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이 많지요. 건축을 진행하는 도중에 마음이 변해서 말이 달라지기도 하고(웃음).”

하지만 학생들한테는 그렇게 얘기해두는 게 좋을 거 같다고 했다. 그래야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생기지 않겠느냐고. 행복할 때 건축가를 찾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했다. 물론 건축주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글쎄요, 누구나 매일매일 불안하게 살지 않나요? 이를테면 누구를 만나야 한다든가 혹은 강의를 해야 하는데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말을 잘할 수 있을까?’ 이런 아주 자잘한 불안감 같은 거 있잖아요. 벌써 근 40년간 강의를 했는데, 강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불안해요. 기대되는 경우는 제가 수업 준비를 아주 잘한 날이죠. ‘아유, 오늘은 몸 좀 풀어봐야겠다’ 그런 마음이 드는 날(웃음). 이런 게 아닌 이상은 제가 어떻게 행복하다는 얘기를 남한테 할 수 있을까요.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행복은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그의 말이 옳다. 행복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은 주관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때 행복감을 느낄지 궁금해졌다.

“한 3주 전쯤 되려나. 휴일에 이 연구실에 나와서 일할 게 있었어요. 방문을 탁 여는데 굉장히 행복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 근로자의 날이라서 학교가 조용했거든요. 그런 날 마주한 이 자리가 굉장히 고마워 보이는 거예요. 제가 올해 느낀 감정 중에 최고였어요.”

연구실을 내어준 학교, 혹여 폐를 끼칠 새라 조용하게 노크하고 들어오는 학생들, 그리고 소리 없이 청소를 해주는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 그 공간에 있는 책들과 가구들의 익숙함에 행복하다고 했다. 사실 공간이 없다면 행복도 존재하기 어렵다. 행복이란 것은 가만히 누워서 상상만 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느끼고 접촉하고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이번에는 행복의 조건을 물었다.

“지난 어린이날에 국토해양부의 의뢰를 받아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건축에 대한 강의를 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나는 조금 있으면 60세가 되어가는데, 돌이켜봤을 때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었던 공간은 어릴 적 혼자 몰래 기어들어갔던 책상 밑이었다’라는 얘기를 했지요. 비가 오던 날이었고, 옆에는 만화책과 식은 고구마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강의를 듣던 100명의 아이들 중에서 70, 80명이 자기들도 책상 밑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공감하더라니까요.”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오래 생활한 내 자리, 내 의자
행복은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주관적 느낌이기는 하나 보편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공감할 수 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교수와 어린 초등학생들이 느낀 책상 밑 행복감이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밖에는 비가 오고, 책상 밑은 몸에 딱 맞는 느낌이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릿해진다고 했다. 기억에 오래 머물수록 진정한 행복에 가깝다.

“행복이라는 건 정말 공간과 관계가 깊은 듯해요. 어려운 게 아니고요. 어딘가를 갔을 때의 시간, 어떤 사람들과 얘기했을 때의 느낌….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이지요. 짜릿하거나 하진 않아요. 인기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듣고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다르죠. 뭔가 천천히 은연중에 들어와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행복을 주는 것.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잘 못 만들어내기도 하고,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아쉽지요.”

얼마 전 인터뷰한 최불암 선생님의 이야기를 꺼냈다. 집에 들어가도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것에 한탄해하시며, 최소한 의자 하나라도 당신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거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저도 가끔 수업 시간에 그 얘기를 하거든요. ‘식탁은 나무로 만든 넓은 것이 좋다. 밥만 먹는 곳이 아니고 책도 보고 신문도 보고 둘러앉아 이야기도 하는 공간이니까. 그리고 의자는 똑같은 거 살 필요 없다. 각자 자기 것을 사라’라고 해요. 어느 날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신다거나, 출타하셨다거나, 혹은 돌아가셨다거나 할 때, 그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의자예요. 단지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생활했기 때문이지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두 딸과 함께 모여 살기를 희망했고 그때를 위해 땅도 준비하고 설계도 직접 하고자 했으나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한다. 가족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 그 또한 소중함을 배가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물론 이는 여행을 통해서도 나눌 수 있다.

“가족 여행으로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이나 콜로세움과 같이 유명한 곳을 돌아보는 것은 별로예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더 좋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프랑스 남부 지방의 생폴 드 방스(기후가 좋아 샤갈, 피카소 등 유명 화가들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를 다녀왔어요. 그렇게 작은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묵으며 동네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고, 성당에도 가보고, 마을 사람들과 잡담도 나눠보는 여행을 하면 굉장히 좋을 거예요. 저도 그곳에서 ‘우리 딸들을 데려왔으면 참 좋을 걸 그랬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양손을 뻗으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가족이 함께 보낸다면, 유명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족 간의 오붓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행복한 집을 꾸미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없을까?

“하이데거라는 독일 철학자가 있어요. 벌써 머리 아프시죠?(웃음) 그가 ‘바우엔, 보우넨, 덴켄(Bauen, Wohnen, Denken: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라는 짧은 논문을 썼어요. 하이데거 하니까 어려워 보이지만 ‘짓고 살고 생각하는 게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다’라는 말이에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의 강의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친절한 김 교수님’이 ‘건축학개론’ 수업이라도 한다면 건축학과뿐만 아니라 타 학과생들에게도 인기가 뜨거울 것 같았다.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가 계속됐다.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아까 생폴 드 방스 얘기를 꺼낸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짓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거든요. 아마 그 마을 사람들은 유명한 건축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는커녕 그냥 동네에서 집 잘 짓는 사람을 불러서 지었을 거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집은 바우엔과 보우넨이 따로따로라 이거죠. 인테리어 하는 걸 보면 자기가 살 공간이라는 건 안중에 없이, 눈으로 보이는 것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하잖아요. 잘 꾸며놓은 공간을 보고 ‘아, 나도 저렇게 해서 살아봐야겠다’라며 따라 하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닌 듯해요.”

무릎이 탁 쳐지는 지적이었다. 우리는 ‘건축물’의 안에 거주한다. 건축물 자체보다는 내부 공간이 더 중요하고, 그 공간은 우리가 사는 행태에 따라 만들어져야 행복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여태껏 ‘멋진 집’을 꿈꾸어왔다면 이제는 ‘나와 잘 맞는 공간’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주었다.

땅값은 있지만 햇빛값은 없다
언젠가 KBS-1TV ‘TV 특강’에서 그는 빛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예술 장르가 건축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다소 막연하게 들렸던 그 메시지는 ‘좋은 집은 좋은 빛을 지니고 있다’라는 오늘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와 닿았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데 온 품을 열고 있다. 덕분에 대청마루건, 안방이건 바닥이 훤했다. 빛을 잘 관찰하면 자기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땅값은 있지만 햇빛값은 없다면서 말이다. 빛이야말로 행복을 주는 가장 중요한 공간적인 요소라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또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건축 재료부터 검박해야 한다고 했다. 커튼이나 벽지가 아닌, 우리 집이 어떻게 빛을 받아들이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제라도 조금 늦은 봄단장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건축가마다 다 생각이 다르지만, 저는 완성된 건물을 보는 것보다는 건물이 올라가면서 철골이 생기고 콘크리트가 생기고 벽체가 생기는 과정을 지켜볼 때 참 기분이 좋아요. 우뚝 선 벽체가 제가 의도한 대로의 빛을 받고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이 있어요. 아마 의사 선생님이라 모르시겠지만 건축하는 사람들은 아는 일종의 중독성이 있답니다. 제가 이 땅에 선을 하나 그어서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이게 50년쯤 지나면 그 땅과 주변의 나무와 어우러져갈 거라는 기대감 같은 게 있거든요. 이건 정말 최고예요.”

김광현 교수는 자신을 넘어 무언가를 다음 세대에게 넘기기 위해 짓는 것이 건축이라고 한 적이 있다. 요즘 그는 획일적으로 지어지고 있는 초등학교를 아이들 중심의 살아 있는 공간으로 꾸며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또 건축이 주는 삶과 행복에 대한 교육을 위한 책을 쓰는 데에도 제법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비록 자기가 사는 집이 물리적으로는 좀 허름하더라도 그 속에 알게 모르게 자기하고 친숙한 구석이 있거든요. 그걸 살펴보는 지혜가 있다면 혹여 자기가 사는 집이 평당 100만원짜리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는 거죠. 아무리 비싼 집이라도 그런 점이 없다면 행복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숨을 고르고 돌아보면 내가 숨쉬는 공간 어딘가에서 분명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는 김광현 교수의 메시지가 오래도록 남을 듯하다.

김광현 교수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문득 눈에 들어온 교회 건물과 하늘이 그를 건축가의 길로 이끌었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도쿄대학에서 건축 형태에 관한 주제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부터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기 시작해 현재는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8년 한국건축가협회상을 안겨준 천호부활성당 외에 성바오로딸수도회 ‘사도의 모후집(2005년 가톨릭미술상 본상 수상), 건축문화 사옥, 양수리 사미헌, 연천주택 서석헌, 외교사료관, 진안홍삼스파 등을 설계했다.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명사에게 행복을 듣다]땅과 빛, 시간을 아우르는 건축가 김광현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여자 마음을 더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는 한편, ‘행복연구소 해피언스’를 통해 기업체를 대상으로 임직원의 스트레스 관리와 행복 찾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행복 멘토’라 불리고 있다. 2008년 1월호부터 3년간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을 통해 서른여섯 명의 긍정 아이콘들을 만나 그들이 가진 긍정의 힘과 행복 노하우를 독자들과 공유해왔다. 저서로는 「마흔의 심리학」(공저), 역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 「심리학 초콜릿」, 「스타트 신드롬」, 「애티튜드」가 있다. 트위터 @happy_mentor

■글 / 김진세 ■기획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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